잃은 것을 찾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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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설교 / 2021.02.17
본문 : 누가복음 15장 1-10절
제목 : 잃은 것을 찾는 기쁨
설교자 : 윤영준 목사
주제: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아내신 하나님의 기쁨에 함께 동참하자.
도입: 영화 ‘기생충’ 이야기 / 사람들은 선을 가지고 있다.
본론: 1)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하나님은 선을 넘어오셨다.)
2) 하나님은 죄인 한 사람을 전부로 바라보신다. (하나님의 셈법은 다르다.)
3) 하나님은 잃은 자를 찾는 기쁨을 누리신다.
결론: 한 때 내가 잃은 자였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늘도 잃은 자를 찾는 기쁨에 동참하자.
지난 해,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가 있었다.
박찬욱 감독의 ‘기생충’이라는 영화인대요. 영화 리뷰를 보다가 알게 된 것은 뭐냐면요.
감독이 선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유리창과 창이 만나는 지점의 선, 냉장고 문과 문이 닫히는 중간을 선으로 표현하고, 그 선을 가운데 두고 배우들을 양쪽에 두어 배우들 사이에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배우들의 대사들을 통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분과 신분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끊임없이 암시한거죠.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선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자기가 어디에 서야하고, 무엇을 해야하며, 누구와 이야기하며, 누구와 식사를 해야 하는지 기준을 다 정해놓고,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였다. 그런 그들에게 마치 자신들이 정해놓은 선을 넘은 것과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의 신경을 굉장히 거슬리는 일이였죠.
누가복음 15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단순히 예수님이 이야기를 하시고, 음식을 드신다고 문제삼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 삼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는 대상들,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대상들이 누구냐는 것이였다.
왜냐하면 세리와 창기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죄인들이였기 때문이죠. 세리는 로마 정부에 붙어 자신의 동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거두어가는 동족들의 배신자들이였고, 창기들은 자신의 몸을 팔아살아가는 죄인이였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였겠죠. 그래서 그들과 선을 긋고 멀리하였다.
이런 선긋기를 사회학적으로는 ‘면역학적 반응’라고 표현하더라고요.
면역체계가 밖에서 들어온 낯선 것을 적으로 인식하고 경계하듯이,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그어놓고 그 선에 따라 대하는 것이다.
요즘 뉴스를 떠들석하게 하는 ‘왕따 문화’와도 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점은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무리를 짓고 파벌을 만들어 서로 죄를 들추어내고, 정죄하는 일들이 가끔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교회들에 서신을 보내어 파벌을 나누는 일을 매우 경계했다. 교회 안에서 서로 갈리고 죄를 들추어내고 서로를 정죄하는 태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일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정죄 어린 시선들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신다. 첫번째 비유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이고, 두번째 비유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이다.
이 비유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 세 가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을 넘어오셨다.)
이 비유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첫째는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점이다.
아까의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은 선을 넘어 오신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절대로 넘어가려하지 않고, 넘어오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그 선을 넘어 오셨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이 땅에 죄인들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코 이 사실을 감추려하지 않으셨고, 죄인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들을 부르시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2장 17절은 말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 곁에는 누가 있나요? 예수님 곁에는 회개한 죄인들, 그리고 회개할 죄인들이 함께 있으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오기를 꺼려했지만 거부했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께 나아왔다.
의사가 병원에서 병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교회들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한다. 교회는 이래야돼 저래야돼 비난한다. 물론 그런 비난과 비판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수용 부분들이 있다면,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야 하는 점은 이 땅의 교회는 온전하지 못하고, 온전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온전한 것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온전하지는 않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순결하고 거룩함을 추구하고 발버둥치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점점 성숙해가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비로소 온전해질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순백의 천과 같이 깨끗하여서 먹물 하나라도 튀면 큰 일 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이죠. 특별히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 회개한 죄인들의 모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여기며, 그 분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으며, 그 분 없이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음을 고백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만나 이야기하시고, 함께 식사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교회 안에 연약하고, 흠이 있고, 죄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어떤 미국의 교회에서는 교회 건물은 성스러운 장소가 아니며, 교회는 성자들의 모임이 아니고, 누구든지 올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입구에 ‘마치 커피를 쏟은 것처럼’ 까만 페인트를 칠해놓았다고 하더라고요. 이 곳은 순백의 성지가 아니라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는 곳이고, 누구나 속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라는 하나의 메시지인거죠.
물론 예배당을 아무렇게나 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위해서 예배당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예배당 자체는 성전이 아니며, 교회는 성자들의 모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한 거룩을 추구하는 죄인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모두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이라도 나도 이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가능성을 보아야 하겠죠.
우리가 꼭 말로 ‘나가’라고 해야만 ‘나가’라는 메시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표정과 말, 행동을 통해서 의도하든지 의도하지 않았든지 하나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죠. 교회 뿐만이 아니다. 가정과 직장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구성원들이 ‘내가 정말로 이 공동체에 속할 수 있을까? 안될것 같아.’ 포기하고 좌절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누구든지 진지한 마음이 있다면, 어떤 이들도 우리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포용성을 보여주는 일은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바리새인의 시선은 무엇인가요?
“사랑할 것들만 사랑하자. 사랑받을만한 사람만 사랑하자.” 나머지는 배제하고 밀어낸다.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다르다.
“사랑받을 만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랑받을 수 없는 것들도 사랑하라. 사랑받을만한 것이 눈꼽만큼 없어 보이는 사람도 사랑하라”
죄인들을 배척하며 밀어내시기보다 오히려 더 가까이 품으시고 안으신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며, 단지 눈 앞에 있는 이들에게 집중하신다.
우리가 서로를 정죄하면 정죄할 수록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따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죄인을 찾기 위해서 길을 떠나셨으며,지금도 그 한 영혼을 찾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긍휼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2) 하나님은 셈법이 다르시다. (하나님은 하나를 전부로 읽으신다)
두 번째, 하나님은 셈법이 우리와 다르시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성과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무엇일까요?
효율성이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것인가?
어떻게 하면 최소의 자본과 인력을 투자해서 최대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지가 기업들마다 최대 이슈이다. 그리고 이 효율성에 대한 강조는 기업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흘러간다.
효율성으로 따진다면,
양 백마리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사람은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왜 잃어버렸는지를 잘 분석하고,
남은 아흔 아홉 마리를 잘 관리하며,
앞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은 이익을 내도록 투자하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셈법은 우리와 다르시다.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사람은 길을 떠난다.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내버려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를 찾으러 길을 떠난 것이다.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한 여인도 마찬가지이다.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노동품삯인데요. 그것을 찾기 위해서 온 집안을 뒤집어 엎는다. 방마다 불이란 불을 다켜고 방을 뒤집어 엎으며 찾는 수고를 한다.
미련해보인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사람이 더 큰 비용을 들여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푼다. 도저히 이해타산이 맞지 않는다.
차라리 한 드라크마를 찾는 수고를 하지 않고, 잔치를 열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차라리 그 시간, 그 에너지, 그 비용이면 다른 것을 투자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가는 대신 말 잘듣고 자신을 잘 따르는 99마리의 양에 집중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셈을 하신다.
양 한마리보다 양 아흔아홉마리가 더 중요하지도 않고,
양 아흔아홉마리보다 양 한마리가 더 중요하지도 않다.
예수님께서는 양 한마리와 양 아흔아홉마리 둘 다 중요하다.
둘 다 의미가 있다. 둘 다 사랑하신다.
그래서 도저히 포기하실 수 없으시다.
만약 10원짜리 동전 하나 잃어버렸다면 저는 굳이 애써서 찾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얼마든지 10원짜리 동전은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10원짜리 동전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만일 부모님의 유품이라고 한다면, 그 얼마만큼의 시간과 비용이 든다고 할지라도 찾을 것이다. 왜냐하면 10원짜리 동전은 더이상 나에게 단순한 10원짜리가 아니다. 다른 동전들로 대체불가능한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예수님께 그런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다.
예수님께 우리는 단순한 머릿수가 아니다. 예수님께 우리 한 사람은 전부의 의미이다.
세상이 보기에는 발에 치일정도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나라는 존재 하나 없어져도 세상은 잘 돌아갈지라도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께 ‘나’라는 존재는 전부인것이죠. 어떤 희생이 있어도 반드시 찾아야 하는 존재이다.
제가 교회에서 집에 가기 위해서는 고속국도를 타고 가다가 양재 IC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 때마다 보게 되는 현수막이 있다. 여러분도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저희 딸을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가 경기도 화성에 있을 때도 똑같은 현수막들을 몇 개 본적이 있거든요.
뉴스 기사를 찾아보니, 1999년 딸을 잃어버리고, 그 딸을 찾기 위한 한 아버지의 사연이 있었다. 21년동안 아버지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뿌린 전단지가 자그마치 300만장, 발품을 판거리는 지구를 18바퀴를 돌 수 있다고 한다. 조금 더 알아보다보니 우리가 미처 알지못하는 실종된 아이를 찾는 부모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터뷰에서 그 부모들은 이사도 못가고, 전화번호도 못 바꾼다고 하였다. 혹시 아이가 돌아올까 싶어서… 혹시 전화가 올까싶어서… 이사도 못가고 번호도 못바꾼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이제 그만해라. 지겹다. 감정팔이 아니냐. 남은 가족들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냐. 포기해라”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그 분들은 한결같이 잊혀지지 않고, 포기가 안된다고 말한다.
자녀를 찾는 부모의 시간과 노력과 헌신을 어떤 다른 가치로 환산하고 셈할 수 있겠는가? 그 분들에게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창조자 되시며 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도 잃어버린 한 영혼을 그렇게 찾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신 것일까?
하늘 보좌에 앉아있던 독생자 예수께서
잃어버린 우리를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며 돌이키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해주셨다.
죄와 사망에 빠져서 두려움 가운데 신음하고 있던 우리의 존재를 그대로 들어 짊어지시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오셨다.
하나님의 셈법은 한 사람을 보시며, 전부라고 읽으시기에 그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주셨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우리의 셈법을 돌아보아야 한다.
효율성의 굴레를 벗고 하나님께서 진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세상이 보기에는 미련해보이고 부질없어 보이는 것 같아도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3)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은 기쁨을 누리신다.
마지막으로 비유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는 기쁨을 누리신다는 점이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로 은혜가 되었던 부분이 이 부분이였다.
예수님께서 잃은 자를 찾는 수고를 단지 사명감으로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셨다는 것이 참 은혜가 되었다.
5-7절 읽어보겠습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이 더하리라”
9-10절입니다.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떨고 있는 그 양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은 환한 미소와 기쁨으로 온통 가득하다. 양을 어깨에 얹어매고 돌아오는 발걸음에는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고통, 그리고 십자가에서 쏟으신 구원의 사역을 사명으로 감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는 기쁨으로 감당하셨으며 그 기쁨을 모두와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신다.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기쁨이 넘쳐서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이것이 성도의 참된 기쁨이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부터를 돌아보게 되었다.
‘오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 나는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을까?
온통 내 문제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내가 잘해야되고, 내가 잘되어야되고, 내가… 내가… 내가…’
나에게 빠져서 탕자의 비유의 첫째 아들처럼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에 홀로 기뻐하고 잇지 못한 것은 아닌가? 내가 한 일, 내 공로에 대한 셈을 하며 하나님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 돌아보았습니다.
결론 : 내가 한 때 잃은 자였다는 사실을 감사하며, 잃은 자를 찾는 기쁨에 동참하자!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모임은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 가까이 나아오면
기꺼이 자신과 함께 식탁을 나누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한 때 잃은 자였다는 것이다.
제 발로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우리 모두 한 때 잃은 자였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길로 떠났으며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던 죄인들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죄된 고통 속에 사는 우리를 찾아오셔셨고,
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가 그 하나님께 돌아오기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울타리에 속하기까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로다할 수 없는 은혜가 있었다.
우리는 은혜 받은 죄인이다.
나로 나 된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주님의 은혜이다.
그렇기에 감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서로를 용납할 수 있습니다.
허물이 있을지라도 덮어줄 수 있습니다. 정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로 돌아오는 이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잃어버렸던 그 영혼을 짊어지시고 돌아오신다면,
우리는 그 기쁨에 함께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뻐해야 하나요?
우리는 잃어버렸던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합시다.
성도의 참된 기쁨은 환경의 지배를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도의 기쁨은 우리의 소유의 유무,
사회적 지위와 성공의 유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잃은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에서 흘러나오는 기쁨과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회개할 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올 때의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동굴에 모여서 예배를드리곤. 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소망하며 여러가지 예수님의 이미지를 돌에 그리거나 조각하였다. 그 카타콤의 회화와 조각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선한 목자의. 모습이다. 길 잃은 어린 양, 부상당한 연약한 양을 찾아 어깨에 둘러맨 선한 목자의 모습. 환한 얼굴로 양을 메고 돌아오는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들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박해의 시간들을 통과해냈다.
오늘 코로나로 인해서 감사와 기쁨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실 뿐만 아니라 잃은 어린 양을 찾아내시고 건져내고 계신다.
“오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잔치에 들어가 함께 즐기고 기뻐하시는 은혜가 우리 공동체에게 임하길 원합니다.
주님께로 끊임없이 돌이키는 은혜가 우리 온 성도님들과 가정과 공동체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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