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21-24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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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오늘 본문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도입
도입
부모님의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은?
흔히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면, 대부분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립니다.
따뜻하고, 푸근하며, 친구와 같은 그 어머니의 사랑, 어미니의 품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죠.
아버지의 초라한 뒷모습 :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초라한 뒷모습 : 아버지의 사랑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맞먹는, 어머니의 사랑 못지 않는 사랑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자신의 꿈과 자신의 욕망,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마음 한켠에 묻어둔 채, 잊어버린 채, 오직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책임감이라는 족쇄를 발에 차고 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존재, 바로 우리가 그토록 아무런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부르는 그 이름,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도 분명 친구들이 있고, 하고 싶은 꿈이 있었고, 즐거움 속에, 행복함 속에 살아가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들과 동일하게 자기 자신이 원하는 행복,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 가지고 싶은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아버지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꿈도 없고, 희망도 없이 그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돈을 버시고, 힘들게 일을 하시면서 생긴 굳은 살들, 햇빛에 그을린 피부, 오랜세월 불규칙적인 생활 습관으로 생겨버린 뱃살 등 으로 가득해진 모습, 바로 우리가 자라 감에 따라 점점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우리네 아버지들은 점점 초라해 지신 것일까요?
분명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때 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모습은 높은 산과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쎈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는데,
왜 우리가 한살 한살 먹어 가며 자라갈 때 마다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은 점점 초라해지고, 작아지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어머니의 사랑과는 달리 우리가 평범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정작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헌신, 그 헌신이 아버지를 점점 작고 초라하게 만들어 갔던 것이죠.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싸움들을 싸웠고, 승리하며 쌓인 상처와 피로가 바로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을 초라하게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본론
본론
본문분석 : 구조
본문분석 : 구조
오늘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자면,
오늘 본문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4절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
두번째는 5-7절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던 그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입니다.
이 구조를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키: 아버지의 사랑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키: 아버지의 사랑
이렇게 우리가 두 가지 구조를 살핀 다음 해야 할 것은 바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키포인트를 살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서두에서 이야기 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오늘 본문 속으로 가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포기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이 아버지의 위대한 사랑, 바로 이 사랑을 오늘 본문은 가지고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4절 상반절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근거해서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구별되는 존재로 계시지만,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라는 이 신비롭고도 신비한 존재 방식에 따라 오늘 본문을 다시금 번역하자면 이렇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하나님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신 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떨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 이십니다. 서로가 구별되어 각기 다른 존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라는 신적 속성을 함께 공유하시는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하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고, 이는 곧 자기 자신이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에서 나셨다"라고 번역 될 수 있는 것이죠.
즉, 지금 하나님의 모습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오늘 본문이 그려내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바로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고 책임져야 할 가족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랑, 무섭고 너무나도 거대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도구도 없이, 무기도 없이, 그저 묵묵히 싸우는 그 아버지의 희생을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희생의 대가 : 평범한 삶
아버지의 희생의 대가 : 평범한 삶
그리고 우리는 이 아버지의 헌신으로 인하여 지금 이만큼 자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점점 초라해지고 작아지는 그 희생을 통해서, 그 희생을 밑거름 삼아, 그 희생의 대가를 먹고, 우리는 이만큼 자랐다라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밥을 굶지 않고, 문맹인으로 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아버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비록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와 비교하면, 부족해 보이고, 뭔가 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아버지를 향해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바로 지금 여러분들이 이만큼 자랐다는 것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바로 아버지의 보이지 않았던 그 헌신, 아버지 자신이 하고 싶어 했던 것과 먹고 싶어 했던 것들, 그리고 아버지 자신이 그토록 바라고 꿈 꾸어왔던 모든 꿈들을 포기하며 얻어낸 그 대가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만큼 자라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아버지의 희생을 여러분들이 딛고 일어섰으며, 그 희생으로 인해 주어진 대가를 먹고 자라왔다는 것입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 설명하자면, 여러분들은 바로 아버지에게 들러붙어 아버지의 피를 빨아먹고 자라온 기생충과 같은 삶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토록 가볍게 여기는 평범한 삶이 아버지의 희생이라는 그 큰 대가로 인하여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희생이 우리의 평범한 삶을 유지하고 가능케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희생하신 그 위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5절에서 7절까지의 유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유익을 얻었지만 감격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며, 그 유익을 지키려 애쓰지 않지만 말이죠.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그 희생의 사랑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유익을 5-7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5-7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서 얻게 되는 유익은 바로 보통의 삶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며,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 받을 상속자가 된다는 것, 한마디로 평범한 한 자녀가 되는 것이 유익이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희생을 통해 얻는 유익을 당연하게 받는 것과 아버지의 유산을 당연하게 상속하게 된다는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굉장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신분제도에 의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숨어다녀야 했습니다.
홍길동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시대가 어느땐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좋아짐에 따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 속에서 과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의의 사고를 통해서, 또 혹은 이런 저런 사정에 의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까지도 우리 옆에 있습니다.
즉,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한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아버지의 헌신을 통해 주어지는 것을 누릴 수 있음도 굉장한 혜택이라는 것이고, 그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 받는 것 또한 굉장한 혜택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가볍게 여기는 모든 혜택들, 그러니까 지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평범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평범한 삶을 선물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음 가운데로 내모는 한 사람,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헌신과 여러분들의 보통의 삶이 맞바꿔진다는 사실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스럽게 여기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 복을 구하며,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늘어 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을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위대함을 버리고,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꿈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우리가 평범한 삶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결론
결론
여러분들은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여러분들이 쉽게 누려왔던 그 평범한 삶에는 아주 중요하고도 소중한 아버지의 인생이 희생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또한 하나님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이 자리에 오실 때마다, 여러분들에게 좋은 일들이 있을 때 마다, 여러분들이 숨을 쉬며, 인생을 살아가실 때 마다 꼭, 반드시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누리는 보통의 삶, 평범한 삶에는 아주 값지고 값진 아버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아버지의 희생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 위에 여러분들의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며, 점점 자라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인생이 되십시오. 마땅히 주어지는 것에 감사 할 수 있는 인생, 그 인생이 바로 참 행복을 누리는 인생이요.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이끌 수 있는 특별한 자리에 오르는 비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