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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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교회를 부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1절은 “이를 위하여”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상 한가운데 우리를 남겨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을 문제없이 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부르심의 목적을 21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무엇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까? 20절 끝부분에도 “이는”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결국, 교회가 세상 속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다름 아니라 ‘불의한 일로 고난받으며 참는 일입니다.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3장 9절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그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교회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바로 그 때문에 너를 불렀단다”. 심정적으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랬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제 이 말씀을 흩어진 교회에 주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 뭔가 큰 깨달음에 도달한 듯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말씀은 참으로 낯섭니다. 물질의 복을 주시거나,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해결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불의한 일로 고난’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의식’에 따라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새롭게 회복된 양심으로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흩어진 교회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정의 구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궁극적으로 상대하는 것은 불의한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구조는 단지 결과입니다. 원인은 그 안에 내재한 악(惡)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중심에 있는 ‘악’과 상대합니다. 베드로는 교회가 ‘은혜’를 드러내라고 말합니다. 그 은혜를 드러내는 일은 고난을 따라옵니다. 희생이나 억울함이 수반됩니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함을 당하는 것입니다. 고난받으나 그것을 악으로 갚지 않는 방식입니다.
정의를 부르짖는 우리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정의롭지 못한 세상과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잣대로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는 교만입니다. 정의로 심판하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정의로운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계속 당하면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폭력적인 언행으로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는데, 정작 가해자는 반성이 없습니다. 가해자는 자신이 가해한 줄을 모릅니다. 최근의 학교폭력 사태만 보아도 가해자는 기억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장난이었다고 합니다. 의도가 없었다 합니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생사에 대해 고민할 만큼 엄청난 괴로움을 경험합니다. 밤잠을 설치면서 피폐해집니다. 몸과 마음이 부서집니다. 가해자들은 상대방이 예민했다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만큼 무례했는지, 폭력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속 참았는데 하나님은 또 참으라 합니다. 그럴 때 은혜를 드러내라 합니다. 은혜를 드러낼 때 고난이 있다 합니다. 억울함이 있다 합니다. 솔직하게 저는 더는 못하겠습니다. ‘하나님 저는 더는 못 참겠어요’ 기도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것이 전혀 낯선 부르심이 아니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길을 가셨습니다. 이 길의 본을 남기셨습니다. 여기서 ‘본’은 마치 어린아이가 철자를 공부할 때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 쓸 수 있도록 만든 교본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분이 남긴 발자취를 마치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며 따라 쓰듯이 하나씩 따라가야 합니다.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지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를 바짝 뒤따라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바울과는 다른 접근과 이해를 보입니다. 바울의 경우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라는 권고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라’라는 표현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자신을 드렸다’라고 표현합니다, 베드로는 ‘그가 고난을 받으셨다’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역사적인 예수를 강조하며 그분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셨다는 교리적이고 결과적인 사실보다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촉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고난과 죽으심의 십자가가 동시에 ‘내가 따라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주저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신 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이 길이 하나이며, 다른 길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반드시 좇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22절에서 예수님께서 죄를 짓지 않으셨음을 말합니다. ‘죄가 없다’ 하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으실 수 있는 자유가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이미 세팅된 기계 같은 과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자유의 길이었고, 순간순간 선택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며,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씨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죽기까지 순종한 모든 과정은 자동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온전한 자유를 드렸습니다. 기꺼이 자신을 드렸습니다. 자유롭게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유에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로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볼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죽음과 죄와 허무의 문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25절에서 교회가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목자와 감독 되신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으로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목자이시며 감독이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며, 함께 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인도함 가운데 있습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억울하고 힘겨운 삶으로 고통받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모든 성도님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도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갈 때 우리의 본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