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에 관한 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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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218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본문 출21:12-17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아침을 열어주심에 감사합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어제보다 오늘더 주님과 동행하며 주를 닮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던 중에 백신이 잘 보급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전국민에게 보급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지만, 원활하게 잘 보급되게 하시고, 또한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중에 있는 환우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부작용이나 어떠한 흔적 없이 치료가 깨끗하게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코로나로 인하여 사회와 경제와 외교와 모든 면에서 위축되고 부실해졌습니다. 주님께서 이 나라를 붙들어 주시어 다시금 건강하게 모든 것들이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이 시기에 누구보다 힘들었던 소상공인들의 마음을 주께서 위로하시고, 다시금 회복되는 역사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 중에 환우들을 기억하여 주시어 모든 회복과 치료가 급속하게 하여 주시고, 다시 시작된 주일학교 가운데에도 주여 복을 더하여 주시사 맡겨주신 영혼들을 바르게 길러내는데 최선을 다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새벽의 시간에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에게 친히 교훈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본문의 말씀은 사형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유형의 죄를 지었을 때, 즉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 부모를 모욕하는 자, 사람을 유괴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할 것을 명하신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형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도를 말씀하시니 좀 의아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로 본문에 등장하는 죄의 유형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동시에 파괴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극단적인 형벌을 택하신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이 규례들이 사형을 합법화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사람을 죽이거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역하거나, 하나님 주신 귀한 생명을 무가치하게 값을 매겨 팔아넘기는 행위들을 막기 위해 이 법을 주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사형에 처하라고 말씀하신 세 가지 유형의 죄를 살펴보고, 그 이후에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살인한 자

첫번째 유형은 살인한 자에 대한 규례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고의적으로 살인한 자와 비고의적으로 살인한 자이다. 고의적 살인은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 살인한 경우를 가리킨다. 가인을 생각해보라. 그는 동생 아벨을 죽이기 위해 그를 밖으로 불러내었고,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그를 처죽이지 않았는가? 따라서 가해자가 의도적인 살인을 했는지, 혹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인지를 재판부는 면밀히 검토해야 하는데, 이때에는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 신17:6 에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라고 말씀한다. 왜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판단해선 안되느냐, 그 한 사람이 위증을 하거나 혹은 잘못 기억하는 경우에 억울한 생명이 처형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해자의 치밀한 계획성과 의도가 증명되었을 경우를 고의적 살인으로 판단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의적으로 살인한 사람은 사형 외에 다른 형벌은 없는가? 오늘날에도 전세계 140국이 사형제도를 폐지하였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사형제도를 아직 법적으로 유효하도록 내버려두긴 했지만, 마지막 사형이 1997년 12월에 행해졌고 이후로 23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범죄자의 인권 문제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십계명이 주어질 때에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은 어땠을까? 당시 고대근동 사회에서 사형제도는 당연히 존재했다. 그러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사람을 고의적으로 죽였어도 합당한 보상만 치룬다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돈 많은 부자들은 고의로 사람을 죽이고 돈으로 그 목숨값을 보상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절대적으로 금한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고의적으로 살인한 자는 절대 사형을 면할 수 없도록 말씀하신다. 민35:30-31 의 말씀을 보면,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악의를 품고 아주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인 악랄한 범죄자들의 경우이고, 한편으로는 비고의적으로 살인한 경우가 있다.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실수로, 사고로 사람을 죽인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 가해자는 하나님이 지명하실 도피성으로 도망치는 것이 허락되었다. 도피성으로 피하게 되면 생명의 보복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다. 이는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인 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이다. 추후에 도피성을 다루는 본문을 다룰 때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피의 보복을 피하여 자신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도피할 수 있도록 마련된 성읍으로서, 이곳으로 피신한 자는 생명의 안전과 함께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선한 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악용하는 자들이 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살인한 자들도 이 제도를 악용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살인한 자들도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로 도피성에 숨어들 수 있고, 설령 거룩하신 하나님께 제사하는 제단으로 피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문 14절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시는데, 악의적인 마음을 품어 고의로 살인한 경우라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가해자가 어디로 도망하여 숨든지, 어디로 피하든지 반드시 찾아서 처형해야만 한다. 심지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제단으로 피했다 할지라도 끌어내어 죽여야 한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제사장이 고의적 살인을 했을 경우, 그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중이라 하더라도 그를 끌어내려 죽여야 한다. 성경에서도 이 규례에 따라 아도니야와 요압이 처형되었다.

부모를 모욕하는 자

사형에 해당하는 두번째 유형은 부모를 모욕하는 경우이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말씀하시는데, 본문 15절에서 부모를 치는 자이다. 여기서 ‘치다’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때려 죽이는 경우에 사용되던 단어였는데, 이 단어를 사용하시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심각하게 구타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또한 17절에 부모를 저주하는 자이다. 여기서 ‘저주하다’ 라는 단어는 단지 말로 모욕하고 그 권위를 가볍게 여기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언어적 폭력을 일삼는 것 뿐만 아니라, 늙고 쇠하여 생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는 노년의 부모와 관계를 끊어내어 경제적, 사회적으로 고립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정신적 학대를 하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킨다.
자기 부모를 학대하거나 자기 부모에게 온갖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고 모욕하는 자들 또한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신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의 법전을 보면 부모를 때리는 자식의 손을 자르라는 규정을 담고 있는데에 비하여, 성경은 이런 자식들을 그냥 처형하라고 명하신다. 이 명령은 십계명 제 5계명과도 연결되는데,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않는 자를 처형하라는 규정은 이스라엘 사회가 부모들의 명예와 존엄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왜 하나님은 부모의 명예와 존엄성을 중요하게 여기실까? 돌아오는 수요기도회에서 5계명을 다루며 자세하게 생각해 보겠지만, 그 부모님에게 부모의 권세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보다 부모님을 이 땅에 먼저 나게 하셨고, 그 아래에서 내가 태어나도록 질서를 부여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질서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유괴하는 자

사형에 해당하는 마지막 유형은 사람을 유괴하는 경우이다. 16절 말씀을 보면,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예전 한글성경에서는 ‘사람을 후린 자’ 라고 번역했는데, 히브리어 ‘고네브’ 라는 단어는 ‘훔치다, 몰래 가져가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단어가 목적어로 사람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몰래 훔쳐가는 행위 곧 유괴를 가리킨다. 유괴의 대상은 어린 아이 혹은 여자들, 혹은 노동력이 있을 남자들까지도 생각할 수 있고, 유괴의 동기는 대개 노예로 팔아 넘기는 돈벌이 때문이며, 때로는 자기 수하에 두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함이거나 혹은 성범죄를 위함이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은 노예제도가 발전했다. 따라서 노예를 사고파는 노예시장도 활성화 되어 있었으며, 노예로 팔아넘기기 위해 사람을 납치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의 법전을 보면 유괴범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규정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노예계층이나 그 자녀들, 혹은 노년층을 납치한 것은 해당이 안되었고, 자유인 이상의 젊은 아들을 유괴했을 때에만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왜냐하면 청년 남자 혹은 어린 남자아이는 그 가정의 노동력과 경제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명하시는가? 도둑질한 자가 훔친 것을 배상하는 원칙에 따라 생명을 훔친 자는 생명으로 배상해야 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형벌 역시도 고의로 사람을 살해한 자가 받는 형벌과 동등한 사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 율법은 주변국가들에서 성행하던 노예 거래를 강력히 반대하는 규정이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내에서는 노예시장이 활성화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율법과 나와의 관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과학이 발달하고, 이성과 학문이 발달하여,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역시 뭔가 윤택해지고, 삶의 질이 올라가며, 과거보다 높은 윤리 도덕적인 사회를 이루었어야 맞는데, 과연 그러한가? 과거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을 당시와 오늘날 사회를 비교할 때 우리는 그들과 비교해서 뭔가 탁월한 진보를 이루었는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뉴스를 보면 너무나도 충격적이고도 패륜적인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남을 보게 된다. 자녀가 부모를 무시하고 폭행하며, 또한 성적인 목적으로 사람을 납치 및 감금하기도 하며,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들, 사회적으로 조금 더 이득을 보기 위해 아이를 입양했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학대한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분명 과거보다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고는 하는데 왜 사회가 변하지 않으며, 세상이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범죄의 중심에 늘 기독교인들이 있는 것일까.
나는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구원함을 받았으니 구약의 율법은 오늘날 나와는 무관하다고 잘못 생각해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이루셨으니 나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믿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백성인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이미 내가 천국행 티켓을 확보했기 때문에, 구약에서 말씀하시는 율법은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다, 나랑 관련이 없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하고도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함을 얻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율법의 명령에 감사함으로서 순종하는 데까지 우리의 믿음이 나아가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

결론

시민법을 다루고 있는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사람을 노동력 혹은 경제력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능력이 있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 뒤쳐지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걸러내려 한다. 당연히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젊은 층들은 계속해서 치고 올라가게 될 것이고, 점점 도태되는 사람들은 무시받고 하대당하다가 결국 퇴출된다. 또한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세상은 힘이 있는 자가 군림하여 약자들을 짓밟는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우리가 매일 만나고 지나치는 모든 이웃들의 생명들이 하나같이 다 귀하고,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가장 가치있고 존귀한 자들임을 말씀하신다. 세상은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할지라도, 세상은 그러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명을 존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명을 지켜주고 돌볼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생명들을 지키고 보호할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음을 말씀하신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세상이 말하는 가치관과 세상이 요구하는 법칙들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점점 더 세상은 삭막해져가고, 온갖 폐륜적인 악들이 드러나며, 이 때문에 점점 더 살기 힘든 세상이 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나라를 앙망하며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자들이 있다. 세상의 법칙에 저항하며 세상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지키시고자 했던 뜻을 따라 주변 이웃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길 바란다. 더 나아가 사회적 제도 속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자들, 생계의 위협에 내몰린 자들, 사회적, 경제적, 관계적 약자들을 보살펴 줄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 강남일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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