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 (23-24문)

Jooahn Kim
제네바 신앙교육서 해설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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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Genesis 1:27–28 NKRV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서론

세상의 중심 : 나

사회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네, 바로 “나" 입니다.
사회라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명의 “나”가 모여서 하나의 “우리"를 만들고, “우리”가 모여서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우리"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작은 단위는 바로 “나"인 것이죠.
그리고 제가 일전에 이야기 했던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을 기억하실 텐데요. 이 데카르트의 명언에서 중요한 존재는 바로 “나"였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이는 모든 것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죽게 생겼는데, 내가 많은 돈을 벌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없다는 것이죠.
내가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한다면, 내가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내가 살아가고 생명이 있기에 많은 돈이 의미가 있고, 높은 자리가 주는 명예가 필요하며, 강한 힘이 필요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를 제외하고는, “나"라는 존재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즉, 그만큼 “나"라는 존재는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해석자 : 나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곧 나의 존재가 어떤 존재로 설명되어지고,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로 정의됨에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는 것 또한 의미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요.
바로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가 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해석되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는 동일한 객관적인 상황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겪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즐거움 속에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고, 누군가는 슬픔 속에 좌절된 삶을 살아갑니다.
바로 이 둘의 차이가 “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즐거움 속에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은 “나"라는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슬픔 속에 좌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나"라는 존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중심이 “나”라는 존재에 달려있고, “나"라는 존재를 알면 곧 세상을 알 수 있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세상은 곧 여러명의 “나"가 모여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본론

연결고리

오늘 본문은 모든 신학자들이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첫 출발점이 되는 본문으로, 세상의 중심인 “나",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 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로부터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과 사상의 근거가 바로 오늘 본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우리는 “나"아닌 또 다른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나"라는 존재들의 집합 그러니까 세상 속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인간의 활동과 관련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출발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에게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라"는 복을 주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 발전시키게 될 때, 두 가지 문제점에 부딪히게 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것이고, 다음으로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라는 명령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해결하게 될 때,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을 떼게 되고 이 첫걸음 점점 발전되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도록 만들게 될 것입니다.

본문 이해를 위한 본문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의 의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라는 그 복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 하나님께서 주신 복

먼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를 살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29절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에게 주신 복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복을 주셨다라는 말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 나에게 없는 것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가지고 있고, 내가 아는 것을 줄 수는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9 은 이렇게 말합니다.
1 John 3:9 NKRV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께서 죄를 가지고 계시지 않기에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레위기 25:23 은 이렇게 말합니다.
Leviticus 25:23 NKRV
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모든 토지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에게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 라는 복을 주셨다는 것이죠.
즉,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충만하시고, 정복하시며,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시고, 만드신 그 땅 가운데 충만히 거하고 계시며, 그 땅을 통치하시고 계시며, 그 땅의 있는 모든 것들을 보호하시며, 보존하시는 분이시기에 창세기 1:29 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라는 복을 주셨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형상,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받았다 라고 할 때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은 “땅에 충만하고, 땅을 통치하며,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복의 의미

다음으로, 그렇다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라는 명령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의미를 살피기 위해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

Mark 4:35–41 NKRV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본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함께 건너편으로 항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선미부분 그러니까 꼬리 부분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제자들은 열심히 배를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갔을 까요. 갑자기 광풍이 불어 거센 풍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배로 쏟아져 들어오는 물을 퍼나르며, 배가 침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드넓은 바다 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노력하던 제자들은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어찌 베개를 베고 주무시기만 하십니까?”라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라 명령하셨고, 이네 바다는 잠잠해 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서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목격한 제자들은 “과연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며 심히 두려워 하며 떨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다의 의미
이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우리가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당시 사람들이 바다를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는가?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다 속에 거대한 괴물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바다를 지나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는 것을 바다의 괴물이 노하여서 자신들을 괴롭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바다를 근처에 두고 있는 곳이라면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항해를 나가기 전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제자들의 생각 속에는 바다라는 것을 괴물이 살고 있는 장소로 인식하였고, 거기다가 지금 풍랑이 일고 있다는 것은 바로 괴물이 노하여 자신들을 비롯한 예수님을 잡아먹으려 하는 상황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님 우리가 죽게되었습니다. 어찌 베개만 베고 주무시기만 하십니까?”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이 요청에는 아주 다급하고 절박하며, 깊은 짜증이 담겨 있는 문장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배를 타고 가는데, 어찌 바다의 괴물이 일어나서 우리와 예수님을 잡아 먹을려고 할 수 있습니까?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 일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바다를 향해 명령하셨고, 이내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 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본 제자들은 두려워 하기 시작합니다. 그냥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심히, 매우,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왜요?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도 바다의 괴물을 향하여 잠잠하여 져라!라고 명령하고, 그 명령을 따라 바다가 잠잠하여 졌던 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 그 누구도 다스리지 못했던 그 존재를 지금 단 두가지의 문장을 통해 다스리시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비추어지는 ‘하나님이 주신 복’의 의미 : 회복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 그 복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땅에 충만하게 거하시고 계시고, 이 땅을 창조하신 창조자로서 이 땅의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시며, 다스리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과 같은 일을 행하도록 부르시면서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복 말이죠.
그리고 이 복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마가복음 4장 35-41절을 통해서 들려지는 이야기 그 속에서 바다라를 꾸짖으시며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셨던 그 예수님의 모습 속에 담겨 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일고,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이 이는 풍랑을 잠잠케 하신 그 예수님의 모습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신 그 복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것은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괴물이 사는 바다 그리고 그 바다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 이는 마치 악과 선의 대립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제자들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비춰 줍니다.
제자들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거대한 악에 의해 오염되고, 무너지며, 깨어진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들은 서로를 물어뜯기 위해 안달이 나있고, 서로를 죽이고 죽이며, 쟁취할 것을 명령받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도태된다 말하고,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지 않으면 누군가 나를 물어뜯게 될 것이라 협박합니다.
그런 세상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잠잠하라, 고요하라"명령하십니다.
그 동안 물어뜯겨 죽어가던 자들을 살리시고, 그동안 남을 물어뜯으며 깨어지고, 무너진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금 회복시키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모든 복음서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중요한 핵심으로 “회복”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충만하게, 이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시는 그 모습, 그 모습의 핵심은 바로 무너지고 깨어진 자들을 불러다가 회복시키시며, 그들을 일으키시는, ‘회복의 역사’였습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나에게 찾아오셔서 이 회복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서, 거대한 힘에 부딪혀 좌절을 느끼고, 무너지고, 깨어질 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회복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이 일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모든 것을 무너뜨릴 듯이 달려 들 때, 그 풍랑을 잠잠케 하셨던 것 처럼, 지금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를 생각할 때, 회복시키는 자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깨뜨려 버리는 그 바다 앞에 늘 서게 되는 우리네 사람들을 일으키고, 회복시키며, 맞서도록 하는 존재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 잃어버린 자의 것을 찾아주고, 쓰러진 자를 일으켜 주며, 외로운 자에게 친구가 되어주셨던 것처럼 지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회복의 통로로 부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이죠.
이 시간 이런 사람들이 되십시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여 주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여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앞선 자는 뒤처진 자를 위해 조금 느리게 걸어주고, 가진 자는 없는 자를 위하여 베풀며, 높은 자는 낮은 자를 향하여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 처럼 말입니다.
모두들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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