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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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끈질기게 그리고 겸손하게 기도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

[서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억울한 일을 많이 겪게 됩니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믿는 바가 있기 때문에 더욱 억울한 일을 많이 겪습니다.
실력은 하나도 안 밀리는 데 괜히 다른 것때문에 밀리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은 다 불법, 편법쓰는데 자신은 안 쓰니까 남들보다 손해보기도 합니다.
이런 억울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간절히 기도하지만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이 더 잘 사는 거 같고, 더 잘 되는 거 같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자주 겪게 되면 마음이 낙심되곤 합니다.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는건가?
하나님 나라가 진짜 오기는 하는건가?
이런 의심이 낙심을 가져와 기도를 포기하거나 기도와 멀어질 때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믿음에서 떠나기도 합니다.
세월호 사건이나 삼풍백화점 풍괴, 성수대교 붕괴같은 사건을 실제로 겪게 되면 마음이 어떨까요?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잖아요.
저 또한 만약에 그런 일들을 겪는다면 제 믿음이 많이 흔들렸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정말 별의별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억울한 일들을 보기도하고 때론 직접 겪기도 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본론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가지 비유를 통해 그 답을 알려주십니다.
첫번째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불의한 재판관이 한 명 등장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재판관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사람이냐면, 2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아마도 돈없고 백없는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과부입니다.
당시 과부는 의지하고 보호해 줄 남편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매우 취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과부에게도 어떤 억울한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과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 지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남편의 유산을 누군가에게 빼앗겼을 수도 있고, 남편이 없어 누군가에게 불의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 과부는 원수에게 빼앗긴 자신의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해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그 재판관이 과연 그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줬을까요?
당연히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부가 주구장창 그 재판관을 찾아온다는 겁니다.
이 여인 입장에서는 기댈 거라고는 계속 찾아오는 거 빼놓고는 할 게 없으니까 계속 찾아오는 거죠.
이러니까 이 불의한 재판관이 너무 괴로운 겁니다.
무시하고 넘길려고 했는데 자꾸 찾아오니까 귀찮아 미치겠는거죠.
그래서 이 재판관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4절 후반부부터 5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재판관이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기로 했는데 그 이유가 독특합니다.
재판관으로서의 어떤 정의감이나 그 과부가 불쌍해서 사정을 들어주기로 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사람 다 무시하기 때문에 이 여인 일도 그냥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들어주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바로 이 여인이 주구장창 찾아와서 이 재판관을 피곤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가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이 비유를 오해하여 그 과부처럼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하면 결국 응답해주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떼를 쓰며 내 기도 들어달라고 하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7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불의한 재판관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하나님 백성들이 밤 낮으로 기도하는데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가만 있으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와 별 상관도 없었지만 그 사정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직접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남의 자녀 소원도 들어주는데 하물며 자기 자녀 소원은 얼마나 더 잘 들어주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악의 사람인 불의한 재판관을 설정하여 최고의 분인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닥이 이 정도인데 저 꼭대기에 있는 분은 어떠하겠느냐?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억울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욱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의 기도를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밤낮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그냥 내 욕심을 채우는 그런 기도를 끈질기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보더라도 억울한 일을 겪을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8절 보십시오.
인자가 올 때,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끈질기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의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는 우리의 참된 믿음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많이 팔린 책중에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크리스천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가다가 길을 잘못들어 한 거인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 거인의 이름은 ‘절망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에 붙잡혀 가보니 그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자포자기’였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을 심하게 때리고는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 절망거인과 아내 자포자기는 계속해서 크리스천을 때리고, 괴롭혀 그가 낙심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어느 날 자기 가슴에 하나의 키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키는 바로 ‘약속’이라고 불리는 키였습니다.
그는 그 키로 감옥을 빠져나와 절망거인의 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 아직도 하나님 나라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제 주변에도 공정하지 못한 기준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욱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과부를 기억하십시오.
과부의 끈질김이 불의한 재판관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본론2]
처음 비유에서 예수님이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면, 이제는 그럼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 가르쳐 주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또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계층이고, 세리는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계층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들은 일제 앞잡이처럼 로마의 앞잡이로 같은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무리하게 징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친일파를 혐오하듯이 당시 사람들도 세리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마 바리새파 사람은 성전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서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의 감사 내용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훌륭합니다.
남의 것 빼앗지 않았고, 불의한 일 한 적 없고,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들처럼 같은 민족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보다 경건하게 살기위해 금식도 두 번이나 했고, 십일조도 모든 부분에서 바쳤습니다.
원래 율법을 따르더라도 금식이나 십일조를 이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금식도 일주일에 두번씩이나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하루만 굶어도 힘든데 일주일에 두번씩 꼬박꼬박하면 진짜 힘들었을 것입니다.
십일조도 소득만 한 게 아니라, 추수하고 나면 곡식의 십일조도 하고, 뭐 장 보고나면 장 본 것에서 또 십일조하면서 하나님께 바치는 데 열심을 냈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금을 워낙 많이 거뒀기 때문에 십일조까지 낸다는 게 정말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율법에서 정한 것,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킨 것보다 자기들은 훨씬 더 하려고 힘썼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들의 행위 그 자체는 참 훌륭합니다.
아마 지금 그들이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사람들이 다 신앙좋다고 칭찬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예수님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받지 않으시고, 세리의 기도는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의 기도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먼저 그는 기도의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를 잘 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전부 자기 자랑입니다.
여기 새번역에서는 11절에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여기서는 두번밖에 ‘나는’이 나오지 않지만 실제 원문을 보면 다섯번 ‘나는’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 자랑을 열심히 나열한 것입니다.
분명 감사 기도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전부 자기 자랑입니다.
이것을 ‘자기의'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우리는 ‘간증’이라고 부릅니다.
유튜브에 보면 유명한 연예인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간증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그 간증들을 잘 들어보면 순전히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증’이라고 쓰고 ‘자랑’이라고 읽는다~
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딱 그겁니다.
우리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모든 게 하나님 은혜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결국 자기가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뭐 어떻게든 도와주셨겠지만 결국 내가 노력했으니까 됐지”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 속을 다 알고 계십니다.
간증도 누가 진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자기 자랑하는 것인지 다 아십니다.
그리고 지금 바리새파 사람들의 감사기도라는 게 고작 남과 비교해서 하는 말들입니다.
자신이 다른 나쁜 짓하는 사람들과 같지 않아서, 또는 같은 동족을 등쳐먹는 세리와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 남들보다 더 낫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남의 것에 탐심을 가지는 것조차 남의 것을 빼앗는 도둑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남들보다 좀 낫다고 해서 예수님의 기준에서 그들이 진짜 잘 지키고 있었을까요?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 만남의 시간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숨겨둔 내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입니다.
발가벗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입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을 의식했다면 그렇게 기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 속에 몰래 숨겨진 탐심과 정욕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결코 남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반면, 세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세리는 비록 같은 동족을 등처먹는 죄인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갔습니다.
그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에 비해 길지도 않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자랑하느라고, ‘하나님 나 좀 봐줘요’라며 고개를 바짝들고 나아갔지만,
세리는 달랐습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의 기도는 이 한 줄뿐입니다.
우선 세리는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부끄러워 성전에 들어가서도 구석에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또, 그는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죄와 수치를 가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습니다.
세리는 자신의 죄를 깨달았기에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조차 없었습니다.
죄를 슬퍼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리의 기도를 받아주시고 그를 인정해주셨습니다.
이제 14절 ‘누구든지’ 부터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세리처럼 기도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누가 합당한 사람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이지, 모든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기도만 했다하면 습관적으로 소리내서 우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하면 습관적으로 가슴을 치면서 통곡부터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회개기도를 할 때에도, 감사기도를 할 때에도, 무엇인가 구하는 기도를 할 때에도 우리의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겸손한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저는 대학교때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교회 봉사에 단 한번도 빠진 적 없고, 십일조 안 한 적 없고, 새벽예배 빠진 적 없고, 술, 담배도 모두 끊었습니다.
그런데 졸업할 때쯤 되어 취업이 힘들어졌습니다.
다른 교회 친구들, 대학 동기들도 다 취업이 되는 데 저만 잘 안 되더라구요.
그 때 제 속에 무슨 생각이 올라왔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살았는 데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같이 교회다닌 친구들중에 제일 열심히 신앙생활했고, 심지어 맨날 놀았던 안 믿는 대학 동기들도 쉽게 취업하는 데 저는 이게 뭡니까?
이런 불만이 나왔습니다.
기도도 하기 싫어지더라구요.
그렇게 제 믿음이 약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깨달게 해 주셨습니다.
아, 내가 마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기도했구나.
그 후로 하나님께 세리처럼 기도드렸습니다.
제 교만했던 죄를 회개하며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정말 억울한 때를 당하게 됩니다.
어떤 친구는 나보다 열심히 연습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나보다 잘 나갈 때가 있습니다.
실력은 나보다 안 좋은데도 다른 수단을 써서 내 기회를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악인들이 득세하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힘빠지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억울한 마음이 확 올라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제가 말씀드렸던 천로역정에 나온 크리스천처럼 우리 가슴에도 숨겨둔 약속의 키가 있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은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갑자기 우리 가운데 이뤄진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나아가는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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