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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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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4 찬송 : 285,204장
말씀을 위한 기도
시 119 : 97 – 105절 구892
탁월한 설교자였던 마틴 로이드죤스는 “오늘날 우리가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가지만 그 중에서 으뜸 되는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축복의 도구가 아니라 부도난 수표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말씀이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과 도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우리의 입맛에 맞는 말씀을 듣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마가 나서 온통 천지가 물바다가 되면 가장 어려운 일이 식수를 구하는 일이듯이 참으로 많은 말씀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여전히 갈급하고 타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올해는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 난지 114년이 되는 해입니다. 평양 대부흥운동이란 1907년 1월 14일 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장로가 회개하므로 시작된 엄청난 회개운동입니다.
이 운동을 통해 한국기독교는 급속한 부흥이 시작되었고 사회 전 영역에 기독교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회개운동의 두 가지 특징은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기도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 저 영국 웨일즈의 부흥운동으로 시작하여 인도와 남미 그리고 미국의 1.2차 부흥운동, 그리고 1990년대의 휘튼대학의 부흥운동까지 부흥의 두개의 키워드는 말씀과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말씀을 듣다보니 말씀의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전적으로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가 버릇처럼 되풀이되어 독창성과 신선미를 잃는 일”이라고 정의되는 매너리즘이란 원래 예술세계에서 “독창성을 잃어버리고 평범한 경향으로 고정되어 감동을 상실함으로 사실상 퇴보해 가는 전통주의”를 의미합니다.
직장이나 사업의 최대의 걸림돌이 타성에 젖어있는 매너리즘이듯이 오늘 우리의 삶도 말씀의 매너리즘에 빠져있지 않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천주교와 가장 다른 점은 성경말씀을 하나님 말씀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말씀이 순서나 이벤트 등에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여름이 되면 불교에서는 소위 “단기 출가”나 “여름불교학교”를 시작했고 요즘에는 “사찰 홈스테이”라는 것을 통하여 철저한 불교 방식과 삶을 터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불경의 내용들을 열심히 가르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어느 순간 여름성경학교에 성경은 빠지고 프로그램과 이벤트가 주요 순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어린이들의 관심을 끌어 교회에 오게 한다는 취지는 좋으나 어느 순간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같이 버린 꼴처럼 진부한 프로그램을 버리고 참신한 프로그램을 한다고 하다가 성경을 같이 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구약의 토라와 탈무드를 전심으로 가르칩니다. 토라와 탈무드를 외우고 그것을 가지고 토론합니다.
그런 일들이 어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초등학교는 만 6세에 입학하여 9년을 다니게 되는데 저학년 때에는 대부분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런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정체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시편 119편은 우리가 아는 바대로 성경에서 가장 길고 가장 절수가 많은 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대부분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의 표현과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고 그 말씀에 힘입어 우리 삶에 소망과 기쁨이 넘치고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 그것은 먼저, 우리는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99, 100절 말씀을 보면 말씀은 우리를 명철이 있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을 준다고 말씀합니다. 지혜는 일반적으로 “어떤 일에 대처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명철이란 단어는 많이 듣긴 들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명철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삠’(םיכ)이라는 말인데 그 뜻은 “사물들의 성질을 분별하는 지적이고 영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명철은 바로 “육적이고 영적인 것을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보고들은 것이 맞는다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술입니다. 분명 눈앞에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눈속임입니다. 눈 멀쩡히 뜨고 속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얼마나 많은 것에 우리가 속습니까?
그러니까 눈에 보인다고 다 아는 것 아니고 다 깨닫는 것 아닙니다.
명철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을 바르게 판단하고 인식하게 해주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이렇게 육적이고 영적인 모든 것들을 바로 보고 바로 깨닫게 하는 능력을 줍니다.
또 본문 105절을 보니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말씀에서 ‘등()’은 가까운 곳을 비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길을 걸어가는데 멀리만 비추면 바로 앞의 장애물 때문에 넘어집니다.
그런데 또 발 앞만 비추면 멀리 내다보지 못하니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내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인생의 먼 앞날과 그리고 오늘 현재를 비추어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내 삶에 있어서 바른 판단을 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바른 판단대로 살게 해줍니다. 이것이 명철과 지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내 인생의 길이 되고 이정표가 됩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이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성경이 약속하는 이 복된 일들이 나의 삶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 둘째로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말씀대로 기도해야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기도하라는 이유가 뭡니까? 그리고 뭐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던 모 장로님은 매우 꼼꼼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처음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목사님 설교로는 무언가 미진해요. 그래서 들은 말씀을 근거로 하나하나 의미를 추적해나가고 성경을 하나하나 읽다보니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을 읽다보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더라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하라는 것은 성경전체의 기조이고 주님의 명령이며, 기도응답은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말씀이 너무 많다보니 최근에는 말씀을 많이 아는 지식적인 신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분들은 얼마나 성경말씀에 대해서 정통한지 모릅니다. 제 친구 목사님이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교회의 성도 중에 한 분이 원어 성경에 능통한 분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말씀을 전하면서 원어를 사용할 일이 있었는데 그만 발음이 조금 틀린 일이 있었는데 몇 칠 후에 그분이 그 원어를 펴주며 정확한 발음은 ‘이것’이라고 지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원래 배우는 것을 좋아해서 해설 성경에 나오는 헬라어 히브리어를 배우더니 어느 날 인가부터는 성경을 아예 원어성경을 들고 다니더라는 겁니다. 그때부터 시비를 거는데, 감당을 할 수 없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봉사, 전도, 헌금, 십일조, 기도도 없고 오직 성경만 끼고 다닌다는 겁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은 복된 일이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면 정말 귀하고 복이 되려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수 있어야합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주님이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고 그 명령을 따라 말씀을 읽었다면 기도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 아닙니까? 그러기에 말씀은 기도의 근거입니다.
말씀을 따라 기도하고 말씀을 따라 기도했으니 응답이 오고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보지 않고 기도만 하면 신비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는 말씀보다 체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자기주장이세고 고집이 셉니다. 경험한 것만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는 자기중심적 신앙입니다.
또한 반대로 말씀만 보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바리새인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한 시간 말씀 보면 한 시간 기도하고 한 시간 또 기도했으면 한 시간 말씀보고 균형이 맞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도 말씀을 근거로 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말을 빨리 해야 기도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표현력이 좋아야 기도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기도해야 기도 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성경이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고 응답이 오는 이유는 우리가 기도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응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든지 기도의 기초가 되는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있는 말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는 말씀과 요한복음 16장 24절에 있는 말씀,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분명히 알면 기도응답의 이유가 내가 잘난 것이 아니고 내가 기도를 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분임을 알고 감사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 셋째로, 말씀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는 말씀의 능력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입니다.
구약의 아모스 선지자는 아모스 8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시대는 말씀이 없는 기근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시대보다 말씀이 풍부한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 한 것은 말씀은 많은데 말씀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 시대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씀을 받고 진정 말씀이 내 삶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줄 압니다.
여러분의 생활에 말씀이 말씀되게 하고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성령 충만을 술 취한 것에 비유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의 몸에 술이 들어오면 술의 지배를 받아 다른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지배를 받아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이런 경험은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말씀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사람이 달라지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언제나 부흥운동이 일어난 곳에는 먼저 말씀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초대교회 중 바울에게 특히 칭찬을 받던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베뢰아 교회였는데 사도행전 17장 11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렇게 말씀을 가까이한 결과를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말씀을 묵상하고 상고하며 그 말씀의 지배를 받으니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날마다 늘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고 지역을 변화시키고 감동시키지 못하며 영향력이 없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구약에 보면 말씀을 지키려고 몸부림친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나봇이라는 사람이고, 하나는 다니엘입니다.
나봇은 자신의 포도원을 팔라는 아합왕의 말을 거부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이 주는 음식을 거부합니다.
나봇이 토지를 팔지 않는 이유는 레위기 25장 23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다니엘이 왕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는 이유는 신명기 12장 20절 이후에 말씀하는 피와 기름을 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나봇과 다니엘, 그리고 그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 말씀을 생명같이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위대한 신앙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고 그대로 살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는 사람이며 그 말씀 붙잡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말씀을 통한 기적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을 보고 싶으십니까?
말씀대로 살며 그리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너무나 많이 들었다고 가벼이 여기지 말고, 안다고 교만하지 말고 오직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체험하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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