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4주일설교_계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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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평안
삼위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평안
일곱 교회는 모든 교회
1–3절에서는 계시록은 어떻게 생긴 책인가, 즉 책의 근원을 말합니다. 4–6절은 송영 즉 하나님을 찬송하는 부분입니다.
1-3절에서 책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태도는 송영, 하나님에 대한 찬송입니다. 찬송이 있어야 신앙생활이 기쁠 수 있습니다. 찬송, 찬양은 우리 삶의 윤활유가 됩니다. 찬송을 듣고 불러보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의 차이가 큽니다.
그럼 무엇을 찬송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1:4a)
여기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말합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고 하지만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는 일곱 교회만 있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골로새 교회도 있는데 일곱 교회에는 안 들어갔어요.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두아디라 교회, 버가모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만이 일곱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왜 일곱 교회만을 선발했습니까? 골로새 교회는 왜 빠졌습니까?
이것은 비유입니다. 일곱이란 수는 하나님의 완전을 말합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완전에 합당하도록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합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완전한 수의 교회를 말합니다. 일곱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세워질 모든 시대의 교회, 동양과 서양에 있는 모든 지역의 교회를 말합니다.
이 일곱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각 시대 모든 세계 교회에 적용되기 때문에, 이 일곱 교회를 향한 꾸지람과 칭찬을 모든 교회가 다 받아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과 참된 평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1:4b)
이제 요한은 일곱 교회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기원하면서 성부가 어떤 분임을 설명합니다. 성부를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계시며 죽지 아니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 장차 오셔서 영원히 계실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일체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오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장차 오실 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장차 오실 이”라는 말을 읽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1:4c)
요한은 성부 하나님을 말한 다음에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을 말합니다. 여기 “보좌”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신 자리, 즉 왕좌를 말합니다. “일곱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보좌 앞에” 계시다는 것은 그가 성부의 왕적 권위와 능력과 기타 모든 속성을 그대로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한 분이신데 일곱 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도 비유입니다. 지금 여기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이 시간에 다른 데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과 일하심을 표현하기 위해 일곱이라고 했습니다. 보좌 앞에 일곱 영이란 말은 성령은 한 분이시지만 이루시는 역사는 많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1:5)
요한은 5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입니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도 예수님입니다.
세상 끝날에 누가 오십니까? 예수님이 오십니다. 세상 임금들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머리란 말은 다스린다는 말 아닙니까? 세상 임금들의 머리란 말은 세상 임금들을 전부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말입니다. 그가 철장(철로 된 막대기)을 가지고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다스린다고 했습니다(2:27).
철로된 지팡이, 창으로 질그릇을 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깨지겠죠? 이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수님을 반대하던 세상의 왕들이 다 깨진다는 말입니다. 땅의 임금들의 치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끝날에 오셔서 하실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4–5절에서 세 분을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하나님 아버지, 둘째는 그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으로 표현된 성령, 셋째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치리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즉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참 평안은 삼위 하나님께만 있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것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는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들로 평안을 누려보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참된 평안은 하나님만이 주십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편지를 쓸 때 ‘평안하십시오’라고 기원은 하지만, 평안을 줄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줄 수 있고 또한 스스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교회는 엄청난 박해와 어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문안할 때 조심스럽게 진리대로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말합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것은 세상의 어떤 조건에 의지해서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풍성해서 평안해지는 것도 아니고 권세나 이 세상의 안전보장 제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평안도 아닙니다. 이 평안은 하늘의 평안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병이 났다 하더라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평안입니다. 환난이 와도 유지할 수 있는 평안입니다. 가난해도 유지할 수 있는 평안입니다. 그런 평안이 있다고 세상이 알수도 없고 줄수도 없는 평안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평안을 우리가 믿지 아니하고 그 평안을 받으려고 힘도 쓰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평안의 맛을 모릅니다. 그러한 평안이 있는데 그 평안을 받으라는 거예요. 환난 가운데 살더라도 그 평안을 누리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세상을 평안한 세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환난 가운데 평안을 누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평안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어서 요한은 그리스도께 대한 송영을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죄에 묶이고 죽음에 묶여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를 해방시켜주셨다는 말입니다. 자유인이 되었으면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여전히 노예로 살아가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물리적으로는 자유로우니까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 소망, 기쁨, 보혈, 부활 등 이런 요소들이 감사와 기쁨의 이유가 아니라면 노예의 증거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가치들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적응하는 과정입니다. 이 세상에서 먼저 맛보고 누려 보는 겁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는 더 풍성하게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 누리고 귀히 여기지 않는데 천국에 가서 잘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모든 것은 예수와 상관없는 것은 없습니다. 계시록에서 예수의 이름이 어린양으로 나오는데, 그 어린양은 속죄 제물입니다. 피흘려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입니다. 계시록은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셨다는 말씀을 늘 기억시킵니다. 천국에 가서도 예수의 속죄로 말미암아 보장받고 보호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 죗값을 담당했으니까 그 피가 우리를 해방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1:6)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제사장 나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세에 들어가면 우리가 다 제사장입니다. 내세에서 제사장 나라는 영광의 제사장 나라입니다. 우리가 내세에 들어가서 하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 직분의 역할입니다. 내세에 가서 가만히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섬기는 일을 계속합니다. 그것은 고된 일이 아니라 기쁜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섬기는 일을 고되게 생각하고 힘들게 생각하는 것은 육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는 참 즐거움이에요. 하늘의 즐거움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그렇게 수고하면서도 마음이 기쁜 것은 성령이 주시는 은혜요 참 즐거움입니다. 세상에서 주를 섬길 때는 혹시 불평이 있을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그런 불평이 없습니다. 쉬지 않고 기쁨으로 계속 섬길 수 있고 섬길수록 기쁨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섬기라고 지었습니다. 마귀를 섬기라고 지은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을 섬기라고 지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면 평생 불안하고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욕심을 채워 줄 재간이 있습니까? 따라서 늘 불평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섬기도록 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마귀를 섬기도록 지음 받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마귀를 섬긴다면 그건 끔찍한 불행입니다. 결국 마귀와 같이 되고 마귀와 운명을 같이하게 됩니다. 마귀와 같이 살다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쁨이 없고 늘 불평뿐입니다. 마귀는 땅 위에서 주린 사자가 먹을 것을 찾으려고 두루 돌아다니는 것처럼 다닙니다. 누가 말하기를 마귀가 제일 분주하다고 합니다. 주린 사자처럼 그렇게 분주하게 돌아다니지만 마귀는 늘 불안합니다. 만족이 없고 늘 불평불만뿐입니다. 결국 망합니다. 마귀는 만족이 없기 때문에 마귀를 섬기면 결국 더 많은 마귀를 섬기게 됩니다.
전에 인도에서는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숫자가 3억 얼마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4억 얼마가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한 신을 섬기면서도 만족은커녕 더욱 괴로우니까 다른 신들을 더욱 섬깁니다. 많은 신을 섬기지만 불안만 가득합니다. 마귀를 섬기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계속 불안합니다. 이것은 끔찍한 불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본연입니다. 본래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겨야 참 자유가 있고 참 기쁨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세상은 계속 하나님을 섬기는 세상입니다.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이 예수님이시므로 그에게 모든 영광과 모든 능력을 돌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게 될지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멘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만 번역해 놓기에는 함축된 뜻이 너무 많고 깊기 때문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7절입니다. 이 구절은 계시록의 요절입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1:7)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볼지어다”라는 말은 확신을 말합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번역은 완전한 번역 같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흠잡자는 것이 아니라 번역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완전하다는 것은 원본 즉 사도가 본래 헬라어로 쓴 성경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15세기 독일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가 인쇄술을 발명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단지 원본을 베껴서 읽었는데 그 베낀 것을 사본이라고 합니다. 인쇄술이 발명되고 나서야 비로소 성경책도 인쇄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계시록도 본래 사도 요한이
쓴 원본이 아니라 사본입니다. 당연히 원본에는 아무런 흠이 없습니다만 사본에는 완전하게 번역되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교회의 결정으로 성경번역위원들을 정하고 성경을 다시 번역해서 개역을 하는 것입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라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구름과 함께 오신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아요. 구름과 함께 오신다는 말은 비유입니다. 영광과 권능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서는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을 상기하는 내용입니다. 구름과 함께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라고 했으니 그를 핍박하던 사람들도 볼 것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여기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은 구원받지 못한 족속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실 때 구원받지 못한 그들은 희망이 없기 때문에 애곡합니다. 슬피 웁니다. “그러하리라.” 그러하리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나이’(ναί)라고 하는데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다음에 있는 ‘아멘’(אָמֵן)이라는 히브리어와 같은 뜻입니다. 즉 주님이 재림하시는 것은 확실한데 헬라어로도 히브리어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맞다고 이중으로 확언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