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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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337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본문 : 민14:1-10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하루 라는 시간을 허락하시고, 하루가 시작하는 시간부터 주님을 찾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닮아가게 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우리의 말과 행실과 생각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우리 되게 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여러 신앙의 위기들을 만납니다. 때로는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밀려오는 풍랑들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주여, 우리의 믿음을 더하여 주셔서 그러한 순간마다 늘 동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각 지파별로 한 명씩 선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한 정탐꾼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그 12명의 정탐꾼들 중 10명의 부정적이고도 믿음없는 보고를 들은 회중들의 반응이 1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통곡했다는 것은 그냥 흐느끼는 울음이 아니다. 큰 소리로 곡하는 것이다.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회중은 원망의 통곡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원망은 결국 모세와 아론을 향하기 시작한다. 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라고 표현하는데, 이 단어를 다른 성경 번역본에서는 ‘투덜거리다’라고 번역하고, 또 다른 번역에서는 ‘으르렁 거리듯 불평하다’ 라고 번역하였다. 모두 의미를 잘 살렸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나 일반 백성들 가릴 것 없이 모두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데에 한 마음 한 뜻이 된 상황이다.
그들은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었고, 한없이 절망했다. 가나안에 사는 아낙 자손, 그 거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그저 메뚜기와 같은 존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이상의 희망이 없다며 스스로 단정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을 여기까지 인도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고, 또한 그들을 사용하셔서 이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향한 분노의 마음도 드러낸다. 2절 중반부부터 3절까지 보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스라엘의 반응이 참 충격적이다. 절망적인 현실 때문에 애굽 땅에서 죽거나 광야에서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또한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하는가?’ 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이른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칼에 찔려 죽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사실인가? 그들이 출애굽 당시에 어떠한 일을 경험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엄청난 권능으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바로의 어마무시한 군대가 추격해오는 것을 보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군대를 홍해에 완전히 수장시키시는 기적을 두 눈으로 보았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갈라 마른 땅을 건너가게 하신 이적을 경험하게 하셨지만, 오늘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칼에 찔려 죽게 만든다고 말한다. 지금 이스라엘은 자기들 눈에 절망스러워보이는 현실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해서 인식한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자기 백성을 가나안에서 죽이실 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안식의 땅으로서 가나안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시는 중이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자기들 스스로 현실을 진단하고 하나님의 의도까지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야 만다.
여러분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도 영적 출애굽을 경험하고 영원한 안식의 땅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그런데 우리의 눈앞에 절망적인 현실이 엄습했을때, 우리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할 때가 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러한 상황에 두셔서 죽도록 힘들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힘들게 만드셔서 죽게 하실 작정이신가?’ 만약 이런 생각을 품었더라면 이는 우리가 본문의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해서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절망 가운데 두셔서 우리를 죽을 정도로 괴롭게 하시겠다고 하셨는가? 단 한번도 주님은 그리 말씀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다만 우리가 절망스러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하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십자가의 복음을 경험했을 때 우리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값없이 베푸신 놀라우신 은혜를 처음 접했을 때 여러분은 어떠했었는가?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받았다는 기쁨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았는가? 도무지 자격없는 죄인 중의 괴수였던 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입었음을 깨닫고 감사와 찬송이 터져나오지 않았는가? 저도 그랬다. 끝없는 완악함과 죄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아주시며, 사랑으로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나의 죄성보다 더 크고 강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그 사랑 앞에 완전히 압도되어 경배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랑 앞에 평생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만 송축하겠노라고 거룩한 결단과 다짐을 올려드렸을 것이다. 일평생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만 경배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렇게 거룩한 결단을 올려드릴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우리의 신앙도 현실적인 어려움과 문제들 앞에서 아주 빠르게 냉각되기 시작한다. 가슴속 품었던 뜨거웠던 열망과 열정들이 세상으로부터 밀려오는 거센 저항앞에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고, 또한 영적 시련을 만나며 식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실패하고 넘어지던 것들이 결국 절망 가운데로 우릴 이끌고 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 앞에 거대한 아낙 자손들이 서 있음을 보게 된다. 함께 읽진 않았지만 민 13:29 의 말씀처럼 수많은 대적들이 나를 치기 위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방이 둘러 싸였다. 피할 길도 없고, 피할 곳도 없다. 도무지 이 절망감 속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우리의 연약한 신앙은 그 순간에도 실족하여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기 시작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상황 속에 몰아넣으셔서 죽이려고 하시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내모셔서 숨막혀 죽게 하시려는가.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아주 먼 옛날,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신앙에 관한 이야기이다. 4절을 보라.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내뱉은 이 한마디를 보라. 하나님 마음에 비수를 꽂는것이다. 그들은 3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한다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칼을 꽂는 형국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애굽에서 인도해내셨는데 어찌 이런 망령된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심도 눈으로 보았고,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도 건넜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도 공급받았고, 또한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도 경험했던 그들이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들을 직접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런 참담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도 절망스럽게 보일 때, 마치 어느 소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에, 우리의 연약한 신앙이, 왜곡된 믿음이, 우리의 죄성이 이처럼 우리를 걸어 넘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현실이 이토록 죽을정도로 절망적이라면, 어떤 해답도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 중에 있다면, 사방이 둘러쌓인 것 같은 고통 중에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 그분만을 붙들어야 하지 않은가? 크고 놀라우신 손으로 매번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눈 앞의 현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에 그들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런 참담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보다, 지금 당장 눈 앞에 밀려오는 저 시련의 파도가, 대적의 무리들이, 원수들의 공격이 더 강하다고 판단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데로 나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딱 그정도까지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에 불과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대다수와 정반대로 반응하던 두 사람이 등장한다. 정탐하러 간 자들 중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다. 그들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외치기 시작한다. 7-9절 함께 읽어보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하나’ 온 회중이 절망하여 하나님을 외면한다.
‘하나님은 이 문제는 해결하실 수 없을 거야. 하나님은 여기까지야.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 문제는 해결하실 수 없어’ 이처럼 모두들 하나님을 제한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께 온갖 망령된 생각과 말들을 쏟아내던 상황 속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을 선포한다. 뭐라고 선포하는가? 9절을 보시면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라고 고백한다. 열명의 정탐꾼들은 그들 앞에서 자신들을 메뚜기와 같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거대한 아낙 자손들도, 그리고 수많은 거류민들도 전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가나안 족속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9절 중반부를 보면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온 백성들과는 달리 이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떠한 현실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그 아무리 거대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 어떤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아람 군대들이 온갖 강한 군사들을 동원하여 성문을 둘러 쌌다. 이 광경을 바라보며 그의 사환은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의 사환은 도저히 서있기도 어려울 정도로 두려운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너무나도 담담한게 아닌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엘리사에 의해 영적인 눈이 열렸을 때에 그는 엘리사가 어찌 담담할 수 있었는지 깨닫는다. 아람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신32:10 말씀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말씀하신다. 아무 도움도 기대하기 어려운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광야와 같은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곳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지키시고 돌보신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그 백성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있었다. 육신의 눈으로는 거대한 위기가 찾아온 것 같지만, 그것은 지극히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때가 찾아온 것 같지만, 그것은 능력의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파도가 몰려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라는 믿음안에서 그 모든 것들은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 속에서 여러 문제들을 만날 수 있고,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들 앞에서도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확신하시길 바란다. 우리가 찬송했던 가사의 내용처럼, 우리가 인생 속 여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때로는 지치고 허덕이고 괴로워 할 때, 우리를 도우시고, 모든 짐 진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감당할 힘과 능력을 더하시고, 고통 중에서도 승리하게 하실 분은 오직 주님 뿐임을 확신하라.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주님께서 바로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 오늘도 이 사실을 확신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