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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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은 현실 속에 드러나야만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현실 속에 드러나야만 합니다.
[서론] 세계관 설명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품이 바뀌고, 성품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으시죠?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바로 시작부분에 있는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가치관이라고 말하는데 그 가치관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세상을 보는 눈을 말합니다.
빨간 안경을 쓰면 온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요?
파란 안경을 쓰면 온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요?
만약, 우리가 성경이라는 안경을 쓴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요?
우리가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무너지고,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지적인 동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또는 내 감정의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믿으니까 마음에 평화가 온다? 위로가 된다? 이거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눈으로 변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 우리가 정말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바로 이원론적 세계관을 갖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신앙생활만 하나님 일로 보이고, 내가 하는 세상일은 하나님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번 질문 해 보겠습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과 교회 봉사하는 것 둘 중 무엇이 하나님 일일까요?
농부가 농사짓는 일과 목사가 설교하는 일 중 어떤 일이 더 거룩한 일일까요?
왜 우리 엄마는 예배는 그렇게 열심히 드리면서 집안은 이렇게 엉망으로 해놓는 것일까요?
자식들 밥은 잘 안 해주면서 왜 교회에서 식사봉사는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것일까?
이런 엄마들 의외로 많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와 교회 식사봉사만 하나님 일이고, 집안일, 자식 밥 차려주는 일은 하나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식사봉사만 거룩한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집안일보다 예배를 더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식 밥 해주는 것보다 교회 봉사를 더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오해해서 그럼 예배 안 드리고, 집안일만 열심히 해도 된다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주부의 집안일을 예배만큼이나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들어서는 아직 정확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죠?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도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세계관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매우 이원론적 입니다.
세상적인 것과 하나님의 것,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것과 덜 기뻐하시는 것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같은 종교인들은 자꾸 하나님 일과 하나님 일 아닌 것의 경계를 나눴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은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고 어떤 일은 하나님이 덜 기뻐하시는 지 나눴습니다.
[본론 1] 배경설명
이스라엘이 로마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도 종교적,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몇 가지 파가 생겼습니다.
저희도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서 여러가지 당들이 나뉘잖아요.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요.
율법학자와 대 제사장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에 대해서 좀 알아야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율법학자, 또는 서기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인데 그들은 아주 보수파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뭐 적는 사람들을 서기라고 부르잖아요.
그래서 말 그대로 이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필사하거나, 연구하여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이 결국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나라를 회복하려면 어떻게든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을 주도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시 나라를 회복시키려는 민족주의자들로서 로마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로마에서 부과한 세금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대제사장들은 종교 최고위직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원래 혈통으로 이어지는 종신직이었는데 로마시대에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주로 로마 총독이 임명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총독에게 돈을 주고 그 자리를 사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달리 친 로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주로 대립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 중에 모세가 썼다고 알려진 5권의 책, 즉 모세오경만 믿는 자들이고, 부활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주로 친 로마성향이었고, 상류층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두개인들에서 제사장, 대제사장들이 나오곤 했습니다.
[본론2] 세금 논쟁
이런 배경을 알고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율법학자와 대제사장들은 정탐꾼들을 보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접근하여 곤경에 빠뜨릴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그걸 위해서 먼저 정탐꾼들은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사람을 겉모양으로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고 계시는 줄 압니다”.
이 말 그대로는 예수님을 잘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그들의 립서비스에 불과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칭찬해서 자신들이 하는 질문에 예수님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속뜻 그대로 보자면,
“음, 당신, 들으니까 옳은 말만 하고 옳은 것만 가르친다고 하던데, 우리 질문도 한번 대답해보시지?”
이런 식의 겉과 속이 다른 칭찬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바리새파 사람들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있어서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에 매우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대제사장들이나 사두개인들 같은 사람들은 친로마 성향이 강해서 세금 내는 것을 당연시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 논쟁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만약에 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게 맞다고 말하면, 로마 정부를 싫어하던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친일파처럼 친로마파로 정치적 프레임 씌우기를 해버리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게 옳다고 말하면,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몰래 로마정부에 고발해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는데 자기 손에 피 안 묻히고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어떻게 대답하던지 예수님한테 불리한 게 사실입니다.
아마 자신들은 제대로 덫을 놓았다며 내심 자신만만했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이 위기를 어떻게 넘어가셨을까요?
24절입니다.
예수님은 데나리온을 하나 가져오라고 하셔서 그 돈에 누구의 얼굴상과 글자가 새겨져 있는 지 묻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정부에서 발행한 돈이기 때문에 그 곳에는 황제의 얼굴과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래 설명을 보면 ‘데나리온’ 동전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얼굴 형상과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신적 존엄자의 아들, 존엄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신적 존엄자의 아들'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신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는 이 문제가 단지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적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돈을 세금으로 내면 로마 황제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숭배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러니까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게 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들의 이 세금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단순하지만 이해하기 참 힘든 말이었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이 애매한 한마디는 매우 유명한 말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우리나라도 70-80년대 독재정치가 있었을 때 목회자들이 이 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서 황제는 정치를 의미하고, 하나님은 종교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정치와 종교를 이렇게 분리하셨기 때문에 종교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자기 합리화를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한국 교회들이 독재정치에 대해 침묵만 했던 비참한 결과를 낳았던 적이 있습니다.
또는 이 말을 정부에 세금 내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헌금하더라도 정부에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들은 우리를 이원론적 세계관에 빠지게 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 교회와 세상을 완전히 구분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먼저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는 이 말의 번역인데요.
많은 학자들은 이 번역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정확한 번역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줘라,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들이 황제가 발행한 돈을 사용하지 않냐?
그러니까 황제에게 빚진 게 있다면 그에게 갚는 게 옳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데 있어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장사할 때는 로마돈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그 돈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예수님께 보여드린 거죠.
그러니까 그들은 로마돈을 사용해 경제적 이득을 얻으면서도 로마에게 세금을 지불할 때는 신앙적인 문제로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건 완전 모순적인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이런 위선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도 ‘그러나' 다음에 중요한 말이 나오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도대체 하나님의 것이란 뭘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사람들이 이분법 적으로 생각하기 쉽다고 했잖아요?
세상과 교회를 나눠서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선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로마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은 악한 것이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선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그들에게 위선을 만들어냅니다.
로마황제에게 세금 안 내고 하나님께만 헌금 하면 신앙이 더 좋은 것이고, 거룩한 것인가요?
그거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화폐를 이용해서 이득을 얻은 것이 있다면 황제에게, 정부에게 세금을 내는 게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로마 정부나 황제를 비롯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세금은 내든, 안내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너희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의도는 이런 세금 문제가지고 다투지 말고,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라는 말입니다.
크리스천 중에도 세상에서는 어떻게 지내든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두 세계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에서는 아무 렇게나 살면서 교회에서만 신앙생활 잘하는 척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교회에서만 주인이시고, 세상에서는 주인이 아니신거죠?
우리가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신가요?
그럼 우리가 공부하거나 노래할 때는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신가요?
제가 예전에 학교다닐 때 겪은 일이 있습니다.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토플을 공부했었습니다.
유명한 학원에 등록을 했는데 그 학원은 무조건 스터디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스터디 시간과 금요 예배시간이 겹치는 거에요.
저는 그게 너무 고민되는 겁니다.
금요예배를 한번도 빼먹은 적이 없었는데 토플 공부한다고 예배를 빼먹어도 될까?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그냥 학원 갔습니다.
한 두 주 정도 그냥 스터디 모임을 하는데 공부가 손에 안 잡히는 거에요.
죄책감이 들고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학원에 말해서 위약금 좀 물고 그만뒀습니다.
그때는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착각했죠.
그러나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 공부보다 예배가 더 거룩한 것이란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던 거에요.
아마 지금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저는 분명 죄책감없이 토플스터디를 했을 겁니다.
토플 공부를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했을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주일예배도 빼먹고 그냥 공부만 하면서 하나님이 이것도 기뻐하실 거야 라고 말하면 안되죠.
그건 자기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기만하는 거죠.
아무튼 우리는 자꾸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 세상 일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적인 일, 육적인 일 / 하나님의 일, 세상 일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하는 일이라면 영적인 일,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똥싸는 일도 우리 몸을 건강히 돌보는 일이니 영적인 일이 됩니다.
모든 일을 마치 하나님 섬기듯 정성과 마음을 다해 한다면 그것이 거룩하고 영적인 일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현실에 뿌리박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본론3]
그 다음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시죠?
우리가 이제 4월 4일이 부활절이 잖아요.
부활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달리 이 세상 사람들은 믿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부활은 정말 터무니 없는 기독교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사두개인들이 바로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세주의자들이라서 지금 살아갈 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시대에 예수님 안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슷한 거죠.
이렇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몇 사람이 모세오경에 나온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과 논쟁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은 믿지 않지만 모세 오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거든요.
그래서 부활을 믿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이 문제를 가지고 자주 논쟁을 하고는 했습니다.
모세오경에는 형사취수법, 수혼법이라는 항목이 있는데요.
이게 뭐냐면 28절에 나온 대로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남겨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형수를 맞아들여서 뒤를 이를 아들을 낳게 해주는 겁니다.
제가 찾아보니 우리나라 고조선 다음에 나타난 부여에도 이런 제도가 있었더라구요.
전쟁이 잦은 나라에서는 남자들이 언제 죽을 지 모르니까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주고, 남편이 없는 형수가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줄 목적으로 이런 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사두개인들은 이 질문을 해서 부활을 주장하는 예수님을 어렵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일곱 형제가 있는데 첫째가 죽어서 둘째가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그런데 둘째도 죽어버리면 셋째가 형수를 아내로 맞이들이죠.
그렇게 다 죽어서 부활하게 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부활한 후에도 이 세상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상식으로 생각해볼 때 이 질문은 대답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에는 이런 모순이 있기 때문에 부활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할 줄 알았던 거죠.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35절을 보겠습니다.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은 부활하면 결혼할 필요 자체가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있냐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야 죽음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종족보전을 위해 애를 낳을 필요가 있지만 부활한 후에는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애를 낳을 필요조차 없게 됩니다.
그러니 결혼할 필요도 없는 거죠.
또한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완전히 무의미한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더 나아가 그들이 믿는 모세오경에도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나온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 증거로 출애굽기3:6 절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장면을 말씀하시는데요.
37절에 보면 가시나무 떨기 앞에서 주님이 모세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세 당시에 죽었지만 마치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죽은 것은 이 땅 위에서지만 주님이 계신 곳에서는 지금도 그들이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믿는 자의 죽음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잠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들었다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눈을 떠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도 죽는 게 아닌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 과연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가 어떻게 드러날까요?
사두개인들은 어차피 이 세상이 끝이니까 부활도 없으니 그냥 잘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35절에서 예수님은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려면 자격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 자격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들은 다 마치 이 세상이 끝인것처럼 살아가지만 부활소망을 품은 하나님 백성들은 다릅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는 율법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부활을 믿지만 실제 삶에서는 부활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39절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멋지게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승리하시자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고 맞짱구를 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로만 믿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라면 예수님이 가져온 하나님 나라를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현실이 뿌리내리지 않은 이론적인 신앙일 뿐이었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라고 했습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세금에 관한 논쟁이었지만 결국 삶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금문제로 하나님께 신앙을 보이려 했지만 예수님은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너희들의 삶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이 따로 있고, 세속적인 일, 세상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영적인 일이 됩니다.
두번째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부활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부활을 머리로 믿는 게 아니라 내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부활을 내 삶에 소망으로 삼고 있나요?
장례식에 가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가족들에게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일까요?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지금 우리 삶에도 부활의 소망은 우리에게 삶의 고난가운데서도 인내할 힘을 줍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선한 일을 행할 동기를 제공해 줍니다.
오늘 말씀은 결국 우리가 믿는 바를 얼마나 우리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전 인격 속에서 이뤄지는 과정이고,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이뤄지는 과정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현실가운데 뿌리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나와 남을 보는 눈이 변화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