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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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막6:14-29
여러분은 일인자가 좋습니까 아니면 이인자가 좋습니까? 정치계에서 김종필씨는 영원한 이인자라는 소리를 들엇죠? 자신의 역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하다가 생애를 마쳣습니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살리에르는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모차르트를 시기했고 질투했습니다. 질투와 시기심으로 인해 그는 모차르트에게 안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자신의 실력도 제대로 꽃피우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살리에르를 음악가가 아닌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이인자로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뛰어난 음악가인 베토벤을 발견하고는 질투하지 않고 응원하고 격려했습니다. “이 사람은 장차 음악사에 남을 놀라울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까지 이야기 했습니다. 그 결과 베토벤은 자신의 재능을 훌륭히 꽃피울 수 있었고, 사람들은 ‘악성 베토벤’과 ‘천재 모차르트’를 모두 훌륭한 음악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인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탑리더가 되고 싶어하지 이인자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먼가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싶어하거든요 조용히 내가 드러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세워주면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엇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던 삶을 살았던 사람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가 잇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몸의 주목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한 젊은 청년이 자신을 찾아와서 뜬금없이 세레를 달라고 하셧습니다 그가 보았을 때 그분은 바로 그렇게 기다렸던 그리스도엿습니다
세레를 베풀었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엿습니다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라고..그 때부터 자신을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그의 곁을 떠나서 나사렛청년을 따르기 시작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다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광야에서의 삶을 살앗습니다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주의 길을 예비하신 자신의 사명의 길을 묵묵히 갔습니다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떠나가더라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을 할수도 있스빈
어떻게보면 이인자였던 요한과 그리고 주를 따라갓덴 제자드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이들은 징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증인의 삶은 예수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우선 이 성경의 기록자인 마가는 장면을 바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잘 알고 예수를 잘 안다는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된 선입주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영접치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둘씩 짝을 지어서 전도대를 파송했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커다란 성과가 나왔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회개를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큰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제자들 자신의 능력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은 누구이며 천국 복음의 내용이 무엇임을 가르치기 위한 전도실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말미암아 오늘 읽은 본문 14절에 보면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사실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는데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행 21:13>에 보면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른바 주의 종들 곧 복음 전도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회를 심기고 봉사하는 일꾼들의 원리도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교회를 심기는 목회자나 직분자가 가장 유의할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섬기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으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들에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리워져도 괜찮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드러나고 그의 이름이 드러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할 때 오해를 받을때도 잇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드러남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을까요? 내가 점알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섬기고 헌신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직분자성격에서도 . 자신을 십자가 뒤에 가리우고 늘 자신을 낮추고 예수의 이름만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성도들의 삶의 원리입니다.
하여간 이 본문에서 예수의 이름이 제자들의 전도로 말미암아 사방에 퍼졌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는 배척 받은 복음이지만 복음이 이방 땅으로는 줄기차게 확산되어 갔습니다. 드디어 복음이 이방인의 땅에 알려지고 예수님께서 하신 능력의 설교 그리고 이적 기사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초자연적 능력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오늘날로 치면 빅 뉴스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새 소망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의 영적 갈증을 풀어준 위대한 메시아의 출현으로 꿈과 희망을 갖게 됐고 그 메시아이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좋아하지 앟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예수님의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을 배척햇지만 나머지 동네에서는 환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거든요...그래서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2. 증인의 삶은 곧 죽음과 직결함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증거하는 삶은 결국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때무입니다 또한 인간의 죄를 드러나는 삶 때문에 희생을 치루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세레요한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엇이 드러날까요? 바로 죄가 드러나기땜누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민중들의 소박한 기쁨과는 다르게 예수의 출현 을 가장 두려워 하고 놀라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헤롯 왕이었습니다. 이 본문의 헤롯은 대헤롯 곧 헤롯 1세가 아니고 그의 아들 헤롯 안디파스였습니다. 헤롯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이 제사 듣게 된 것은 헤롯의 갈릴리의 관저가 디베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베랴는 주로 이방인의 도시이며 예수님께서 미쳐 발을 들여 놓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 을 듣고 헤롯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즉 14절에 있는 대로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기와 위기가 적절히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중들이 예수를 좋아하고 따르면 따를수록 위기는 다가 오고 있습니다. 잔인한 왕의 손에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 이 목 베임을 당했다는 그 자체가 예수에게도 죽음이 다가올 것 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같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도 상한 마음, 빈 마음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기쁨과 평화와 감사가 있지만 권력욕과 물질의 탐욕과 죄를 회개치 않는 자는 예수가 도리어 두려운 존재일 수 있습니다. 여기 헤롯 왕이 예수의 능력의 말씀과 권능의 일을 보고 받고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왕으로서 또는 정권을 가진 자로서 정권욕과 탐욕 때문에 양심을 팔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심의 고통 때문에 늘 불안 초조 그리고 고통 가운데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의 출현 소식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불안의 내용이었습니다. 시중에 들리는 여론은 예수는 바로 엘리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지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전에 자기가 저질렀던 사건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라고 했습니다.
헤롯이 범죄한내용이 그의 마음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차에 예수님의 출현은 요한이 다시 부활해서 나타난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는 것은 인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양심의 소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양심의 소리는 들어도 회개했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눅 13:32>에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했습니다. 양심의 소리가 있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 나아오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양심의 자유와 평화를 얻습니다. 최근에 북한 노동당 사상 담당 및 주체담당 비서인 황장엽씨가 망명하면서 말하기를 양심의 소리를 억누를 수 없어서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다고 했습니다. 양심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형상(Image Dei)에 근거한 것입니다. 많은 작품에서 인간의 양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의 고통과 양심의 소리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면 아무런 성과가 없습니다. 양심의 고통과 양심의 소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되고 하나님의 은총에 붙들릴 때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 마음 속에 양심이 소리치거든 예수께 나아오십시오! 양심이 소리치거든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양심이 소리치거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십시오. 양심이 고통이 되거든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17절에서 29절까지는 왜 헤롯이 그토록 양심의 고통을 받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성경을 쓴 마가는 예수님의 인기에 대한 헤롯의 반응을 기술하면서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바로 메가톤급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그 시대의 인간의 죄악을 낱낱이 지적하되 왕이든 귀족이든 종교의지도자이건 정치가이건 또는 일반 대중이건 간에 요한은 상관하지 않고 무차별 공격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천국의 설교였고 의의 설교자였습니다
. 그는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입니다. 요한은 누구든 불의를 보고 용납치 아니했습니다. 의가 없던 당시에, 양심이 비뚤어지고 정치적 도덕적 성적 부패가 극에 달했던 그 시대에 세례 요한은 설교자로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 문란하게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옳지 않다고 설교로 책망했습니다. 요한은 광야의 소리였을 뿐 아니라 의의 소리였습니다. 아무도 왕의 부도덕을 말하지 않는 시대에 세례 요한은 왕의 죄악을 탄핵했습니다. 불의를 지적당한 당사자 중에 특히 헤롯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지적하는 자에게 그것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도리어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고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내의 말을 들었습니다.
남자는 세계를 움직이고 여자는 남자를 움직인다는 말이 있지만 헤롯 왕의 양심도 헤로디아에게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헤로디아의 작전에 말려듭니다. 헤롯의 생일날 문무백관들을 다 모으고 갈릴리의 귀인들 요즈음 식으로VIP를 모두 모아서 잔치를 벌일 때 헤로디아가 데려온 딸이 직접 들어와서 헤롯과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을 매혹하는 춤을 추었습니다
. 그때나 지금이나 통치자의 허세는 비슷한 듯 헤롯 왕 자신도 분봉 왕이면서 그 여아에게 네가 원한다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아인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와 이미 계획한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 요구는 헤롯으로 하여금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왕명으로 말한 것이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왕으로서 체면 유지를 위해서 즉 자기의 왕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의로운 세례 요한의 목을 벤 것입니다. 헤롯은 사적인 정에 의해서 공무를 그르쳤을 뿐 아니라, 공권력의 부당한 사용으로 타락한 정치를 했습니다.
결국 정권욕과 자기 과시욕과 도덕적 타락이 빚어낸 결과였습니다.
결국 증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댓가를 치루는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세레요한은 죄를 지적했습니다 인간의 죄성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양대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사명을 감당햇습니다 그러다가 어처구니 없는 헤롯 때문에 목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는 어처구니 없는 우리 인간들대문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땅에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셧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 이 땅에서 특히 교회안에서 영광을 받으려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나의 재능도 나의 이름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왕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은 영광의 삶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드러내는 삶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오해를 받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을수도 잇습니다 하지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는 삶입니다
세레요한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됩니까 좀 대충대충 살지 너무 미련하게 살아서 그렇지 않앗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세레요한은 정도를 걸었습니다
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 지금 길들이 매우 잘 놓아져잇잖아요? 어느지역을 가든 길이 잘닦여져서 운전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렇기 길을 잘 닦아야 합니다.
좋은 길은 계속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수많은 길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생명의 길이 있는가 하면 죽음의 길이 있습니다. 대로가 있는 가하면 아주 좁은 길 있습니다. 길에 따라서 미래와 운명이 결정되고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그러면 어떤 길이 좋은 길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즉 “주님을 모셔드릴 마음의 길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 회개는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고쳐서 마음의 길을 평탄하게 만들고 주님을 모셔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증거할 때 때로는 우리가 어찌할고 라고 히개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를 갈면 싫어하는 사람도 잇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성격자체가 죄를 드러내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오실 길을 예배한 세레요한...그는 회개를 촉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싫어햇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감당햇고 그리스도 길을 에배햇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믿지 않는 이들을 찾아가시는 길을 예비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우리가 그분들을 구원할수도 없고 예수 믿게도 할수 없습니다 그저 그분들의 마음의 굽어진 길을 서서히 펴질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교인은 행위에 관심이 없고 자기만 구원받으면 되지만진실한 성도는 자기 행위를 지켜보는 사람의 구원에도 관심을 두고"저들이 나를 통해 주님을 인식한다"고 의식하며 행동한다.
전도는 라이프스타일이지 프로젝트가 아니다.관심을 프로젝트에 두지 말고 사람에게 두며 계속 사랑을 베풀면 전도는 이뤄진다.
마스크를 전달하시면서 기도하십시오 주님 이분에게 주님의 사랑이 부어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카톡을 전달하면서 앞으로 한달에 한번씩 초청모임을 랄 예정입니다 필오하신분들에게 카톡을 전달하시면서 주님..이분에게 검사를 도구를 통해 자신을 알고 복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옵소거 우리는 그저 전달하기만 하면 되구요 주님께 맡기시빗다
증인의 삶을 사는 것 비록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을 지라도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걸음 한걸음 느리지만 서서히
한발자국씩 주님을 드러내는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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