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 (30-31문)

Jooahn Kim
제네바 신앙교육서 해설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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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John 1:18 NKRV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서론

사람의 습성 :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 중 하나는 바로 내가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입니다.
그래서 항상 잘되는 식당과 잘되는 가게는 일정수준에 도달하면 문을 닫아 버립니다. 공간도 넓지 않고, 테이블도 많이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우리가 숨 쉬는 것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산소, 그 산소가 내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냥 산소는 늘 내 주변에 있으니까 아무 걱정 없이, 아무런 고마움 없이 숨쉬게 됩니다.
그런데, 식당과 가게도 내가 가고 싶을 때, 아무때나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식당을 맛집이라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맛집이라는 것은 그집의 음식이 다른 집의 음식보다 맛있어서 맛집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맛은 희소성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즉, 아무리 맛있는 집이라고 해도, 내가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다면, 그것은 맛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맛집이 되기 위해서는 맛은 기본이고, 장소가 협소하여 줄을 서서 먹어야 하고, 영업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맛집은 오후 12시 부터 1시까지만 영업하고, 장소는 좀 쫍고 협소하면서,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는 이런 곳을 두고 맛집이다 라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품, 맛집 등 유명해지는 모든 가게들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비법, 그러니까 아무리 똑같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비법 중의 비법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단위를 찾는 사람들

최근에 가장 작은 단위가 갱신되었다.
수천년간 사람들은 가장 작은 입자를 원자라 여겼다.
사람이 관찰하고, 실험하여 분리할 수 있는 최소의 단위가 바로 원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곧 원자는 전자와 원자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이로서 가장 작은 입자가 갱신되었던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다시 가장 작은 입자라 여겼던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나뉜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세상은 떠들썩 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양성자와 중성자 보다 더 작은 단위가 발견되었다.
쿼크와 글루온이라는 두 물질이다.
오늘날 가장 작은 입자는 쿼크와 글루온이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가장 작은 입자를 찾게 될까?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에 가장 작은 입자는 분리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상태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장 작은 입자가 바로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이 이토록 가장 작은 입자를 찾는 것과 맛집, 명품 등 아주 희소성을 가지는 것을 찾는 것은 어쩌면, 절대적 존재를 찾고자 하는 갈망, 그리고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하자 하는 갈망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9:20-21 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Exodus 19:20–21 NKRV
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올라 올 것을 염려하셨을만큼 사람은 하나님 곧 절대적 존재를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

오늘 본문 요한복음 1:18 에서도 출애굽기 19장에 나왔던 모습을 다시 한 번 더 언급합니다.
John 1:18 NKRV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고 말이죠.
여기서 “본래"라는 말은 한번도, 아무때든지 라는 말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된 이유

왜?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까요?
사실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 이전에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만났고, 하나님을 뵈었었습니다.
Genesis 2:15–17 NKRV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이끌어”라는 동사는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으로 가라는 음성을 통해서 사람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함께 에덴 동산을 향해 같이 가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의 타락 사건 이전에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만나고, 하나님을 보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에 의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게 되면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죄악만을 바라보고 죄악만을 선택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하 자도 모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의미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 뭐 어때서요?라고 말이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의 의미

구약에 나오는 사울의 모습

사울은 하나님께서 처음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자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나라들을 점령하도록 하셨다.
하지만, 삼상 16:14 을 기점으로 사울의 모습은 변하게 된다.
1 Samuel 16:14 NKRV
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이 본문을 기점으로 사울은 이렇게 변하게 된다.
1 Samuel 18:10 NKRV
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미친 사람처럼 변했다.
하나님을 알았던 때의 사울은 그야말로 멋있는 모습이었다. 누구나 사울을 보며 존경하였고, 그는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자, 사울은 미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멋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저 가엾고 불쌍한 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을 알았던 다윗의 고백

하나님을 알았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Psalm 54:4 NKRV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Psalm 59:17 NKRV
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Psalm 68:20 NKRV
20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를 도와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나의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나의 든든한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망에서 벗어나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모른 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없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나를 헤치기 위해 계략을 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 혼자, 나 홀로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발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도와 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떨까요?
부모님도 없이, 주변에 친척도 없이 나 홀로 세상에서 나를 지키고,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는 것,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된 사람들의 상황이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드러내심

그런데, 이런 어둠의 시대 속에 한 줄기 빛이 생겼는데, 그 빛은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John 1:18 NKRV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었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했었는데, 지금 그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을 보지 못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겪어야 했던 그 불행이 지금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라지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아들이고,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성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아무도 볼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나타내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보셨습니까?
안타깝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아니, 예수님을 보아야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했는데,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봅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는 것이죠.

본다의 의미

우리가 흔히 “본다”라는 단어를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굳이 눈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우리의 청각, 촉각, 후각, 미각 그러니까 듣고, 맛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본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보지 못해도 경험함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해도 먹어 봄으로 인하여 그것을 볼 수 있고, 후각을 통하여 냄세를 맡음으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 한번 눈을 감아보시기 바랍니다. (한 명을 앞으로 불러)
= 냄세를 맡게 하고 무엇인지 맞추도록 한다!
이처럼 우리는 보지 않아도 이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않는다 하여도, 하나님을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보지 않는다 하여도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6 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John 14:26 NKRV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복음서를 넘어서 성경 전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했던 그 모든 일들을 볼 수 있게 하는 존재가 바로 성령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었던 자를 살리시며, 죄를 사하여 주셨던 그 일들이 이 성령에 의해 우리가 경험함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죠.
이게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없을 것이고,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하며,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이순간에도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봅니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경험함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결론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희망을 드러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그 누구도,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는 그 예수님을 통하여 얻게 된 성령으로 하나님을 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들이 되었다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고, 하나님을 통하여 위로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자 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라는 것이죠.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버리셨다라는 것이죠.
자신의 품 속에 있고,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그 성자를 성부 하나님께서 포기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중의 은혜이며, 아주 값진 것입니다.
이 값진 은혜를 따라 하나님을 경험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시는 귀한 인생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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