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과 역설

요한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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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 우리는 내 계획에 하나님의 계획이 맞춰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과 계획이 얼마나 이해하기 힘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5절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 남자형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왜 그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했겠습니까? 오셔서 치료해 달라고 소식을 전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당장 달려 가지 않았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이나 더 계시던 곳에 머무르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바로 달려 가지 않았을까요?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말은 14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합니다.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님은 나사로가 장사된지 4일이 될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3일동안 영혼이 주변을 떠 돌아 다니다는데, 3일안에 영혼이 육체와 다시 결합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죽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현재, 예수님은 이전 10장에서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는 위험에서 벗어나 요단 저편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이 요단 저편이라는 곳은 나사로가 죽은 베다니라는 동네에서 24킬로 떨어진 곳인데, 하루정도 걸으면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사로가 죽은지 왜 4일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하룻길을 걸어서 예수님이 계시는 요단저편으로 왔습니다. 이때, 아마도 나사로는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으시고 이틀을 더 그 곳에 머무셨습니다. 그러면, 나사로가 죽은지 3일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지 3일째 되는 날 나사로를 만나러 하루를 걷습니다. 그러면, 나사로가 죽은지 사일이 되는 날 도착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3일이 지나서 도착하려고 이틀을 더 머무신 것입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나사로가 아프니 빨리 오시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소식을 듣고 바로 오시면, 죽은지 이틀이 되어서 나사로가 살아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식을 전하러 간 사람들만 돌아왔습니다. 소식을 전하로 간 사람들이 돌아 온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이틀째입니다. 이제 남은 하루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3일이 지나버렸습니다. 이제 완전히 나사로가 살아날 희망이 없어진 것입니다. 얼마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원망 스러웠을까요?
그래서 나사로가 죽은지 4일째 되는 날 오신 예수님을 보자 마자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원망부터 합니다.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John 11:21 NKRV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후에 마리아도 예수님을 보자마자 같은 말을 합니다.
John 11:32 NKRV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한마디로 왜 빨리 오지 않았냐는 말이지요. 마리아와 마르다는 3일을 애타게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가장 적합한 시기 즉 3일안에 예수님은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나사로를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제자들과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믿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John 11:15 NKRV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이 빨리 가지 않으신 이유가 제자들로 믿게 하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또 42절을 보겠습니다.
John 11:42 NKRV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장례식에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있을 것이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 시점에 예루살렘에서 단 1시간 거리에 있는 베다니라는 동네에서 기적을 보여 주어 많은 유대인들이이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직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3일의 시간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살릴 3일이 지난 4일의 시간을 계획했습니다. 예수님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계획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시간에 따라 인생의 계획을 합니다. 내가 계획한 시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기도하고 간구하며 기다립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내가 계획한 시간에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마치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그러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얼마나 목을 메며 간절히 기도하며 예수님이 3일안에 오시기를 기다렸겠습니까? 우리도 얼마나 간절히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의 계획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계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해서 계획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나의 촛점을 맞추십시오.
<전환문> 그리고 우리가 인정해야 할 한계가 또 하나 있습니다.

2. 우리는 편견으로 예수님을 이해하려 합니다.

11절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듣습니다. 정말로 나사로가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John 11:12 NKRV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또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John 11:13 NKRV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한마디로 말귀를 못 알아 듣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왜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말을 정말로 나사로가 잠들어 있는 것으로 이해 했을까요? 또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이 들면 왜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 했을까요?
한마디로 제자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데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John 11:7 NKRV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이유는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유대지역으로 가는 것을 만류합니다.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John 11:8 NKRV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은 방금 유대에서 돌로 맞아 죽을 뻔 했는데 다시 그 위험한 유대로 간다는 것은 로 여긴 것입니다. 합리적이죠. 그래서 가능한 유대지역으로 가지 않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하자, 그러면 병이 나을테니 가지 맙시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자기 중심적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이 확고하자, 도마는 오바합니다.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John 11:16 NKRV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지금 예수님이 유대로 가는 이유는 죽은 나사로를 통해서 제자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 었는데, 어뚱하게도 도마는 그럼, 우리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이렇게 오바 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눈물 흘리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각기 다르게 해석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은 딱 세번 있습니다. 한번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고, 또 한 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 눈물을 흘리셨고, 이제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3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John 11:35 NKRV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분명 예수님은 나사로는 죽을 병이 아니고, 깨우러 오셨습니다. 즉,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곧 예수님이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눈물을 왜 흘리셨을까요?
33절을 보겠습니다.
John 11:33 NKRV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을 느끼셨습니다. 여기서 “심령에 비통을 느끼셨다”는 말은 “원문은 신음소리같이 작은 탄성을 내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의 의미는 내적으로 화가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사"의 표현은 마음을 무엇인가 휘젓는 듯한 느낌을 말합니다. 즉, “내적인 괴로움"을 말합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은 마리아와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속으로 매우 화가나고 괴로우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빛과 생명이신 예수님이 그들의 눈 앞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믿음없이 죽은 나사로만 생각했습니다. 그 죽은 나사로를 살리려 오신 예수님이 그들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어둠에 있었고, 죽음에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시고 탄식 하신 것입니다. 괴로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빛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 온 유대인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에 있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3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John 11:36 NKRV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들은 눈물의 의미가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우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지요. 바로 유대인들 때문에 울고 계신 것입니다.
또 3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John 11:37 NKRV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을 책망합니다. 원망합니다. 분명 그들이 맹인이 눈을 뜨는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이 일부러 나사로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목격하고도 사람들의 반응은 각기 다릅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많은 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매우 다른 반응을 합니다.
4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John 11:46 NKRV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기적을 알립니다.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에게 알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4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John 11:47 NKRV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수님을 적으로 규정하고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걱정을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까 모의를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에 성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 성경을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오해 합니다. 매일 매일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안에 있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는 반응과 달리 부정적인 반응을 합니다. 오해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 탐구하기 보다, 오직 나의 상황에 맞는 말씀만 찾아, 소위 말하는 은혜 받기 위해서만 성경을 읽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일부러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아예 알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또, 분명히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시고, 많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특별한 은혜와 경험을 갈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찾기 보다, 내가 설득되고 마음에 드는 것을 경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 신앙 때문입니다.
눈을 뜨십시오. 그리고 성경에 분명히 적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달으려 하십시오.
<전환문> 그런데, 우리가 분명한 하나님의 뜻과 진리와 계획을 깨다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인정해야 할 한계가 있습니다.

3. 우리는 믿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느끼는대로 행동하는 합니다.

본문 27절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듣습니다.
John 11:27 NKRV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우리와 같은 신앙고백이지요. 자신의 계획과 원하는대로 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향해서 마르다는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신앙입니까? 그리고 마르다의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올바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John 11:22 NKRV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라도"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놀라운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의 믿음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3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John 11:39 NKRV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마르다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라고 생각해야 맞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그렇게 엄청난 신앙고백을 했는데, 예수님을 완전히 신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르다 반응은 어떻습니까? 4일이 지나서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현실적이고 합리적입니까? 그런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언제나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믿음이 없는 반응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느끼는 것을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마르다의 반응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마르다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읽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마르다처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으로서 우리의 신앙고백과 전혀 다르게 살아갑니다. 전혀 예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마르다와 같은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그리고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까? 그러면, 나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모두 내려 놓고 예수님과 이 성경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매 순간 순간 마다 무릎을 꿇으십시오. 우리의 본성이 신앙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대로 행동하는 사람임을 인식하고, 의지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 고백한 신앙앞에서 사십시와.

4. 맺는 말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11장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인정해야 할 한계에 관하여 생각해 밨습니다. 우리는 수십년을 하나님을 믿고, 또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신앙생활하지만,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 유한한 인간입니다. 그럼으로 어느 누구도 나는 하나니의 뜻을 완벽하게 알고 믿음을 따라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완전히 안다라고 하는 사람이 가장 무지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직접 함께 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2000년이 지나 성경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그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또 예수님을 눈 앞에 보면서 놀라운 신앙고백을 한 마르다도 순간 순간 느낌을 따라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분명히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계획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과 우리의 판단과 결정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은 것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굳이 명명하라면, “겸손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앞에서 겸손하십시오. 함부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들먹이지 마십시오. 기록된 하나님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꿈이나 다른사람의 예언같은 것을 어떻게 신뢰하고 믿을 수 있습니까? 무엇인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그 확실한 것이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멀 것이라 의심하십시오.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 성령 안에서 그 자기 확신을 확인 하십시오.
이러한 겸손한 신앙을 가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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