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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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제자는 세상원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 원리로 살아가야 한다.

[서론]
지난 주 우리는 세금과 부활논쟁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항상 현실에 뿌리박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를 결정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도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결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게 무엇일까요?
외모, 능력, 성격 아마 이런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다 배우자 선택할 때 고려할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곳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와 배우자가 함께 동일한 곳을 바라보며 가는 것이 바로 결혼이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저는 직업도 다르고, 외모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동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보고 듣고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머리 속에는 아직도 다른 생각들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도 동상이몽입니다.
[본문1]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그 유월절때 나눈 빵과 잔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리석게도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도 서로 누가 더 잘났냐를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꼭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웃어야 하는데 울고, 울어야 하는 데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이 죽으실 날이 가까워오는데 그들은 아직도 서로 서열다툼이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메시아와 그가 세우실 나라에 대해 잘못된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 메시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가져오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꿈꾸는 세상과 예수님이 꿈꾸는 세상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가져야 할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더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십니다.
이방 나라들의 왕들과 권세자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 합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대접을 받아 자신이 높아지려고 합니다.
또는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어 자신이 더 높다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호의’라는 게 당시 사람들에게는 갑이 을에게 베푸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는 전혀 다른 삶의 원리를 가집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가장 어린 사람,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 되려면 오히려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다스리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식사자리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보통 식사 자리에서는 섬기는 자보다 섬김을 받는 자가 더 높은 자, 더 큰 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섬김받는 자리가 아닌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종으로 섬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나라는 세상 속에 감춰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대접받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대접받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익숙해져 대접받지 않으면 섭섭해 합니다.
이런 재밌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 교수, 기자 이렇게 세 명이 식당에 가서 같이 밥을 먹으면 누가 돈을 낼까요?
답은 식당주인입니다.
웃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대접받는 데 익숙해지면 그만큼 자신은 하나님 나라와 멀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대접받기 쉬운 자리에 있다면 오히려 낮아져서 더 섬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어떻게든 낮아지려 하지 않으면 자꾸 높아지려 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서울 시장 선거가 있습니다.
후보자들이 서울시민을 섬긴다면서 후보 등록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청년의 고충을 경험한다면서 편의점 알바를 한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지하철 안을 방역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뭐죠?
쇼, 이벤트에 불과합니다.
표 더 많이 받기 위해 선거기간에만 낮아지는 척, 섬기는 척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섬김은 이런 이벤트적인 섬김이 아닙니다.
잠시 잠깐 내가 높아지기 위해 섬기는 척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 사랑을 나타낸다면서 세상에 이런 ‘섬김쇼’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쇼를 하는 지 진짜 섬기려고 하는 지 결국에는 들통납니다.
또한 한가지 더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를 공산주의로 오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을이 갑을 없애서 모든 사람이 갑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공산주의와 다릅니다.
한정된 자원과 경쟁이 존재하는 한 갑과 을이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갑이 자신을 낮춰 을을 섬기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갑이 되려하고 갑 대접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들은 갑이 되어도 을을 섬기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살아간다고 누가 알아주기를 합니까 아니면 상이 있습니까?
네~물론 이 땅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님이 주시는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28-30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왕권을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준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나라에 들어와 내 밥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고, 옥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겠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겪은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서 왕권이 주어집니다.
이 왕권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제자들만의 특권입니다.
그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앉아 그들은 먹고 마시며,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릴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왕자가 되어 왕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의 믿음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겪는다면 이것은 마치 주님과 함께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며 겪는 고난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올 때 왕권으로 보상을 받게 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주어질 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시간과 돈도 더 들어갑니다.
반대로 섬김받는 것은 쉽죠.
그러니 누구나 섬김받으려고 하지 섬기려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발견한 사람들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2]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낮아지고, 섬길 수 없습니다.
말로는 마음으로는 백번 천번 다짐할 수 있지만 삶으로 살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 두번 이벤트로 섬길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진짜 섬기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접받으려는 사람의 본성을 이겨내면서 어떻게 우리는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중 수석제자인 베드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목숨걸고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과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말과 달리 그가 얼마나 연약한 지 알고 계십니다.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갈 때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심지어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고나서야 예수님의 이 예언을 기억할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사탄이 밀 체질하듯 우리를 체질하려고 합니다.
밀을 체질하면 알곡과 가라지로 분리됩니다.
이렇게 사탄이 체질해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 사탄의 시험에 결국 넘어져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번째 부인할 때에는 예수님을 저주했다고까지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막상 죽음의 위협이 다가오자 도망쳐 버렸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믿음을 꺾을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먼저 세상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죠.
‘세상 사람들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냐?’
이런 생각으로 남들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또한 내 안에 두려움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내 믿음 때문에 가정에서 사회에서 어려움이 지속되면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학가서 믿음이 떨어지고, 직장가서 믿음이 떨어지고, 시집가서 믿음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회식하는 데 신앙때문에 혼자만 술 안 마신다고 하면 직장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도 생깁니다.
제가 직장다닐 때에도 상사분 앞에서 술 안 마신다고 용기있게 말하기가 너무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많이 피했지만 피할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노래방에 갔는데 술을 계속 주는 거에요.
그래서 그 술을 노래방 테이블 밑 쓰레기통에 몰래 몰래 버렸습니다.
안 보고 버리니까 술이 바닥에도 떨어져 축축해진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내 믿음대로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연약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기도가 아니고서는 제자들이 이 고난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석 제자였던 베드로를 위해서도 예수님이 기도하셔야 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하실까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혹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게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 언제나 중보해주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가족중에 자기 혼자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니까 가족들끼리 서로 간절히 기도해주는 모습을 보며 너무 부러웠다고 합니다.
나를 위해서는 누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해주나 생각하니 슬펐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중보기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기도해야 하지만, 우리 자신보다 아니면 우리 부모님보다 더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또한 성령님입니다.
로마서 8:26 절입니다.
‘이와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로마서8:34 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 땅에서는 성령께서 간구하시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간구하십니다.
[본문3]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극심한 고난을 대비해 스스로를 준비하고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앞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실 때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주머니, 자루, 칼까지 챙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학자들은 예수님이 왜 이렇게 상반된 말씀을 하셨을까 고민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명확히 알기가 어려운 것은 그 당시 상황과 배경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전도여행때에는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그들은 전도할 때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극심한 고난의 때가 찾아올 것을 예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무법자들과 한 패로 몰렸다’고 하는 이 성경 말씀이 내게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한 일은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자신의 십자가 고난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십니다.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입니다.
메시아가 다른 사람들의 죄악때문에 자신도 범죄자로 취급받아 고난을 받고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겪으실 고난이 바로 이와 같은 고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이런 고난을 예수님과 함께 겪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때를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칼은 문자 그대로의 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적대자들과 칼로 싸우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어떤 사람의 귀를 칼로 자르자 예수님은 칼로 일어선자 칼로 망한다고 베드로에게 경고하셨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칼’은 진짜 칼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제자들에게 극심한 고난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를 제자들이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칼을 실제 칼로 여기고 예수님께 “칼 두 자루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코미디 같은 말인가요?
제자들은 전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동상이몽이라고 하죠?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있지만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그들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칼을 가지고 같이 싸우자는 말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의 마지막 말이 등장합니다.
38절 마지막에 ‘넉넉하다’ 입니다.
제자들이 칼 두자루가 있다고 하니 예수님이 ‘넉넉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이 칼 두자루면 충분하다는 말일까요?
어떻게 로마 병사들과 싸우면서 겨우 칼 두 자루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이 아니죠.
예수님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제 그만 얘기하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휴, 참,,,됐다 됐어…’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우리들이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혹시 우리가 예수님과 동상이몽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만약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참 불쌍한 존재일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섬김받기 보다 섬기기 위해 내 시간, 내 돈, 내 에너지를 썼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게 만약 하나님 나라의 비밀임을 안다면 우리의 태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며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 이순간도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바라보는 곳을 우리도 함께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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