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8주일예배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5 viewsNotes
Transcript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계시자의 나타나심
계 1:9–20
9절부터 나오는 내용은 사도 요한이 본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보았고 신령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1:9)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이제 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 요한”이라 했는데 붓을 들고 글을 쓴 사람이 사도 요한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즉 모든 믿는 사람의 형제라는 말입니다. 형제는 운명을 같이합니다. 같이 고생하고 같이 영광을 받습니다. 높고 낮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형제이므로 높고 낮은 것이 없습니다. 누가 높고 누가 낮고 그렇지 않습니다. 계급이 없습니다. 받은 은사가 다르고 은혜가 다르니까 각각 그 은사와 은혜에 따라서 봉사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봉사를 하고 어떤 분은 저런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봉사를 하는 것뿐입니다. 목사, 장로는 계급이 아닙니다. 일반 교우들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이 아닙니다. 높고 낮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은사가 다르고 은혜가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돕는 은혜가 있습니다. 돕는 은혜란 말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8)
여기에 돕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돕는 사람을 결코 등급이 낮게 보지 않습니다. 사실은 다 돕는 것인데 그 가운데 특별히 노력으로 돕고 물질로 돕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넓게 보면 다 돕는 일입니다. 하나하나 굳이 명색을 따져서 말하자면 사도도 있고 선지자도 있고 합니다. 그러나 돕는 은혜가 있는 이들은 사도나 선지자가 아닐지라도 서로 다 형제입니다. 서로 높이고 도와주면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혈통으로나 육신으로 형제 되는 것보다 영으로 형제 되는 것이 더욱 귀합니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의 피를 함께 믿는 형제가 더욱 귀합니다. 아무리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라 하더라도 예수 안 믿으면, 예수 안 믿는 친척이라고 하면 겉으로만 친척이라 할 뿐이지 속까지도 친척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이 제일 귀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믿음으로 형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환난을 함께 당하니까 형제입니다. 교제권(fellowship)을 같이 가지니까 형제입니다. 여기에서 “나라”는 영광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장차 오는 나라를 특별히 생각합니다. 함께 들어가니까 운명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함께 동참합니다. 이런 것이 형제입니다.
참음은 영광의 나라로 가는 발걸음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면 인내를 귀히 여깁니다. 참는 것을 귀히 여깁니다. 참는 것이 참 귀합니다. 불신자들도 인내를 귀히 여깁니다. 잘 참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참는 것을 큰 복으로 여겨요. 누구를 위해 참습니까? 예수를 위해 참아요. 예수를 위해 하는 일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농사꾼은 가을에 곡식을 거두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참아 냅니다. 희망을 품고서 무던히 참고 견뎌요. 그러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오실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참아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성질에 지배를 많이 받습니다. 급한 사람들은 급하게, 그저 쉽게 행동을 합니다. 반면에 느린 사람들은 느리고 게을러서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에 맞추지 못하고 뒤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성질에 지배를 많이 받고 성질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렇지만 점점 더 은혜를 많이 받고 힘써 노력하면 나아집니다.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점점 나아집니다. 그 수준이 높아집니다.
환난은 무엇을 이룬다고 그랬습니까? 로마서 5장 3절에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인내란 참는 것인데 환난이 있어야 인내가 생깁니다. 괴로움과 어려움이 없으면 인내를 배우지 못합니다. 참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귀합니다. 환난이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또 무엇을 이룹니까? 연단을 이룹니다. 연단은 참 좋은 것입니다. 왜 좋습니까? 연단을 많이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험이 닥칠 때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더라,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더라, 그 시험을 이기면 마음이 참 좋더라, 하나님의 은혜가 오더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연단은 귀합니다. 연단은 무엇을 낳습니까? 소망입니다. 연단을 받아 보니까, 어려운 때 참아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더라,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이렇게 은혜를 주시더라, 그러면서 소망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소망을 내다봅니다. 심령도 밝아집니다. 성령의 감동도 깨닫고 분변하고 내세에 대해 확신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소망을 낳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환난의 아들입니다. 인내는 무엇을 낳습니까? 연단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은 환난의 손자입니다. 또 연단은 무엇을 낳습니까? 소망입니다. 그러면 소망은 환난의 무엇이 됩니까? 소망은 환난의 증손자가 됩니다. 이렇게 대를 이어 갑니다. 이 대가 끊어지면 안 됩니다. 귀한 줄은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인데, 정성을 바치고 간절히 힘을 쓰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렇게 되게 하십니다.
돼지처럼 개처럼 살면 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서 개는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개는 토하였던 것에 도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무언가 잘못 먹어 토했는데 또 그걸 먹으러 간단 말입니다. 돼지는 어떻게 한다고 그랬습니까? 이놈이 잘 씻고는 또 더러운 시궁창에 갑니다. 그러니까 개나 돼지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결을 사모하는 것은 성도의 특징입니다. 성결을 참으로 사모하여 힘써 구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차차차차 되어 갑니다. 여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라는 말씀에서 “나라”는 영광의 나라이고, “참음”은 참는 것을 말합니다. 참는 것이 영광의 나라를 향해 가는 우리 성도의 발걸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음에 동참하는 것이 형제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는 섬에 있었더니”(1:9).
여기에는 어떤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는 별개의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천사를 통하여 교회에 증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의 내용은 같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즉 이 말씀을 전하려다 핍박을 받아서 밧모라 하는 섬에 유배되어 갔습니다. 밧모 섬은 에게 해에 있는 섬으로 곡식을 못 심는 불모의 섬입니다. 돌이 많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나라의 제주도도 옛날에는 귀양살이하던 곳이었습니다. 제주도도 돌이 많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죄인들을 밧모 섬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요한이복음을 전하다가 밧모 섬으로 정배(定配)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깨우치는 음성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1:10)
“주의 날”은 오늘날 주일을 말합니다. 주일에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나팔 소리와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팔을 불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나팔 소리와 비슷한 그런 소리가 났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나팔 소리는 깨우치는 소리입니다.
군대에서 큰일이 나면 나팔을 붑니다. 적이 침입한 것을 알았을 때 나팔을 붑니다. 일어나라고 깨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팔은 큰일이 났다고 경고할 때 붑니다. 나팔 소리같이 깨우치는 음성이 큰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을 깨우치는 음성입니다. 사도 요한이 잠자다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별안간 정신이 차려지곤 합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는 이거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깨닫는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정신이 번쩍 들면서 하나님이 가까워지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나를 사랑해 주시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체험이 종종 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도 그렇게 깨어나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늘 술에 절어 살던 사람이 어떤 큰 분, 즉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느낌이 생겨서는 그 길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정신 차리게 하는 일이 있는데, 때로는 슬픈 생각이 들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슬픈 생각은 잘못한 것이 생각나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 덕분에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같이 긴장감 있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깨이는 것입니다.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1:1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책에 쓰라고 자주 말씀합니다. 모세에게도 책에 써라, 책에 기록해라 말씀했고, 다니엘에게 계시의 말씀을 들려주신 후에도 책에 기록해라 말씀한 적이 있고, 선지자들에게도 종종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책에 기록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책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귀합니다. 한 번 말하고 그만두는 것보다 책에 기록해 보관하는 것이 더 귀합니다. 한 번 말로 하면 들은 사람이나 알지 다른 사람이 경험해 볼 수 있겠습니까? 못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는 책에 기록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책에 기록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이 훨씬 잘 전해집니다.
또한 말로만 전할 때는 과장되는 일이 많습니다. 다섯 가지라 그랬는데 여섯 가지라고 하면서 과장합니다. 정확하게 몇 가지라고 말했는데도 그저 많다 그러기도 합니다. 사람에게는 과장하는 거짓이 있는데 못된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글을 써넣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책의 경우를 가지고 하는 말이지만, 말을 전할 때도 자기 마음대로 붙여 가지고서 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책에 써서 여러 사람이 함께 보관해 내려올 것 같으면 그런 잘못이나 그럴 염려는 사라집니다.
어두움을 밝히는 교회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1:12)
사도 요한은 일곱 금 촛대를 보았다고 했는데 이 금 촛대는 무엇을 비유합니까? 교회를 비유합니다. 교회를 금 촛대라고 말했습니다. 그 해석을 우리가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1장 20절입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라 했습니다. 교회를 촛대에 비유했습니다. 촛대란 어두움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두움을 밝혀 주는 기관입니다. 어떤 어두움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어두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어두움을 밝혀 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밝혀 줍니까? 성경을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어두움을 밝혀 줍니다. 성경을 잘 가르쳐서 배우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알도록 해줍니다. 교회는 촛대요 촛불이요 등대입니다. 교회는 세력을 가지고 세상에서 무엇을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세력단체가 아닙니다. 세력을 위주로 하자면 교회는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큰 세력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많이 모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등불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단체입니다. 적은 수가 모이더라도 신앙으로 분명하게 살고 하나님 말씀으로 바로 살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교회가 됩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하더라도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의 운동이 약할 것 같으면 걱정스러운 교회가 됩니다. 교회가 어두우면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는커녕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 운동에 도리어 해를 끼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깨닫도록 하고 잘 살도록 해서 점점 퍼져 나가도록 하고 점점 커지도록 해야 합니다. 오합지중으로 모여서는 집이라도 같이 짓자, 여러 가지 세상에 속한 일도 우리 한번 힘 있게 해보자 하는 것은 교회 운동이 아니에요. 교회는 등대요 촛대입니다. 교회는 힘이나 세력으로 말하면 약합니다. 세력을 위주하지 않기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핍박을 받더라도 남을 핍박하지 않는 것이 교회입니다.
귀신에 대한 잘못된 속설 교정
부자가 죽어서 어디에 갔다고 성경은 말합니까? 음부에 갔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3–26
)
26절을 보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큰 구렁텅이란 건너갈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너 있는 쪽으로 건너가고 싶으나 갈 수 없고 우리 있는 쪽으로 건너올 수도 없습니다. 부자가 죽어서 음부로 갔다고 했습니다. 음부에 가서 꼼짝 못합니다. 이 세상으로 올 수도 없습니다.
마가복음 5장 1절부터 읽어 보면 거라사 사람이 귀신 들려서 난폭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고랑을 차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막 5:4–9
)
이 말씀을 보고는 죽은 귀신들이 사람에게 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니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그랬으니, 군대 귀신이 지금 여기 거라사 사람에게 붙은 것이다, 그러니까 군대 노릇 군인 노릇 하다 죽은 귀신들, 전쟁하다 죽은 귀신들이 사방으로 다니면서 병을 주기도 하고 사람에게 붙어서 못살게 굴기도 한다, 다른 귀신들도 마찬가지인데 물에 빠져 죽은 것같이 특별히 흉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 즉 귀신들이 돌아다니면서 병을 주는 것이다, 하는 식으로 가르치는 모양인데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떠나면 갈 곳으로 가는 것이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에요. 귀신은 마귀의 군사들로 하늘에서 떨어진 자들입니다. 계시록 12장을 보면 마귀가 떨어짐에 따라서 그 군사들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대마귀가 타락하면서 함께 거느리고 타락한 귀신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것들이 이 세상 여기저기 다니면서 역사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돌아다니면서 병도 주고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군다는 것은 지극히 비성경적이에요. 성경에 위배됩니다.
군대라는 말은 본문에서 분명히 그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수효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말했듯이 수효가 많기 때문에 군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군대처럼 많은 귀신들이 지금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고로 죽은 영혼들이 귀신이 되어서 세상에 돌아다니면서 병을 주고 사람을 못살게 만든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아요. 성경 진리와 맞지 않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다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병을 주고 못살게 합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을 제명에 죽지 못한 자들이라고 그럽니다. 하지만 성경대로 보자면 그것도 하나님의 작정인데 제명에 죽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작정대로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어디로 갔습니까? 노아 홍수 때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여기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했는데 물에 빠져 죽은 영혼들은 “옥”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옥”은 음부를 말합니다. 음부에 갇힌 것입니다. 음부에 갇혔기 때문에 세상에서 다시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그가”에서 “그”는 예수님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입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에서 “영”은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수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 영혼들이 다 옥에 갔습니다. 갇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은 제명에 죽지 못하고 그야말로 흉하게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비명횡사한 영혼들이니까 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병을 주고 그럽니까? 성경에 그렇게 나옵니까? 성경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음부에 있는 것입니다. 거라사 귀신 들린 사람이 우리는 군대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그가 군대에서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짐작으로 푸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군대처럼 많다는 말입니다. 수가 많기 때문에 군대라고 하는 거예요. 군대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레기온’(λεγεών)으로 로마 군대의 단위 이름입니다. 그 수가 육천 명이 되는 군대 단위예요.
누가복음 16장으로 돌아와서, 부자가 세상을 뜬 다음에 어디로 갔습니까? 음부에 갔습니다. 세상을 뜨면 음부에 간다고 성경에 많이 말씀했어요. 음부는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한 번 들어가면 계속 갇혀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병자는 다 귀신 들렸다고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입니다. 그런 곳에 따라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생명을 낭비하는 일들은 고쳐야 합니다.
사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좋아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을 누군가 하면 그게 옳겠거니 하면서 시험에 들어가지고 바른 신앙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틀린 것을 틀렸다고 안 할 수 없어요. 누구를 비평하기 위해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공연하게 드러내 놓고 퍼져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정직하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분은 섬기기 위한 것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18)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 권세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장차 심판할 때 음부에서 영혼들이 다 나와서 심판을 받습니다. 이 부분은 계시록 20장에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19)
여기 “네가 본 것”은 일곱 금 촛대와 그 사이에 계신 “인자 같은 이”입니다. 인자 같은 이의 모양이란 것은 특별히 예수님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일”은 2, 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장차 될 일”은 심판 때 될 일을 말합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20)
여기 “비밀”은 오묘한 뜻을 말하고 “금 촛대”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 밑에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해서 그 해석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는 종들을 별이라고 한 것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빛을 발하기 때문에 별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게 하는 말씀의 역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단정하고 빛나는 생활, 교역자라면 이 같은 것들을 다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 된 자들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2장 1절에 보면 일곱 별을 오른손에 붙잡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른손에 붙잡혔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자격이 있으면 힘 있게 쓴다는 것이고 잘못하면 엄하게 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직분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계급장을 다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계급이 없습니다. 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 형제입니다. 다만 은사가 다를 뿐이에요. 각자가 돕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등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계급이 절대 아닙니다. 은사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남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평안하게 잘 다스려 나갈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련이 없는 사람은 교역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마련이 없이 말을 아무렇게나 탁탁 하고, 마련이 없이 처신하고, 교제할 때 마련이 없이 실수하면 교역자가 될 수 없어요. 그 방면에 은사가 없는 것입니다. 등급이 낮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가 없다면 그 방면으로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한다면 가르치는 은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역자가 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믿는 사람은 형제라는 것입니다. 다만 은사에 따라 어떤 사람은 이 지위에서 일하고 어떤 사람은 저 지위에서 일하고 또는 저 방면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일이 각각 다른 것뿐입니다.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직분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심부름꾼이고 또 예수님의 양 떼를 돕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모든 교인 중에 제일 겸손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제일 낮아질 줄 아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천국에서는 낮아지는 것이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배척하시고 낮아지는 사람을 쓰십니다. 다시 한번 명심할 것은 우리는 다 형제라는 것입니다. 은사에 따라 직분이 다를 수 있고, 또 직분이 없을 수도 있지만 모두 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교역자들에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다 섬길 특권을 받았습니다. 섬길 능력을 받았습니다. 천국에서는 섬기는 것이 일입니다. 제일 잘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고 상급도 제일 많이 받습니다.
박윤선. (2014). 정암 박윤선의 요한계시록 강해. (조주석, Ed.) (초판, pp. 34–49).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경수대로369번길 20, 401호: 도서출판 영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