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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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S1. 환영과 인사
S1. 환영과 인사
네 여러분, 반갑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우리 좌우에 계신 분들에게 ‘천국은 가까이에 있습니다’하고 인사 나눕시다.
네 감사합니다. 오늘 이렇게 귀한 고난 주간 집회에 참여하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담임 목사님을 통해 설교를 부탁받았을 때 귀한 집회인데 저의 부족함으로 해서 혹시 분위기를 흐리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성령님께서 우리의 모든 순간을 지키실 것이라 믿고 오늘 강단에 섰습니다. 초청해 주신 담임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목사님은 친구 목사님 형님이시라서 제 마음이 가까운 형님처럼 그렇게 느낍니다. 이제 같은 노회를 섬기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S2. 본문의 주제 제시
S2. 본문의 주제 제시
오늘 저녁에 우리는 우리와 가까이 계신 예수님에 대해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는 그가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교회가 복음을 위해 하나 되기보다는 다툼과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쓴 서신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 길게 권면을 하고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 성도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진리입니다.
흔히들 예수님은 저 멀리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만나려면 세상이 최종적으로 멸망을 하거나 혹은 내가 죽어야 만날 수 있다는 생각하고 삽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가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늘은 멀리 있으니까 우리 사는 세상과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가까이 계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8장 2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늘로 떠나시면서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는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이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심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이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을 교회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나와 가까이에 계시다는 사실을 마음에 잘 붙드시고 믿음 생활하시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과 헤어져 저 멀리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이는 주님이 약속하신 천국이 저 먼 곳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기도에서처럼 우리가 구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타나 그 힘과 능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라가 임하시도록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네 절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앞의 두 절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뒤에 나타나는 두 구절은 기도에 대한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을 연결하는 한 가운데를 보면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그림으로 나타내보면 이렇습니다.
빌립보서 4장 4-7절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5. ...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에 보면 제일 가운데 한 구절이 있지요. 뭡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살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관용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와 근심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키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우리의 삶에 예수님이 가까이에 계신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신학교 시절 주해 숙제를 하면서 깊이 공부하는 기산을 가졌습니다. 그때 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너무 컸고, 당시 교수님도 잘 분석을 했다며 좋은 성적을 주셨어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와 가까이에 계십니다.
신명기에 보면 모세가 광야 생활을 마치고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새 세대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가르칩니다. 우리 신명기 4장 7절을 같이 봅시다.
신명기 4장 7절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모세는 광야 40년을 결산하면서 하나님이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신 것을 생각하며 그 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이 가까이 하셨던 시간이라고 회상합니다. 모두가 불평하고 고통하고 서로 다투던 그 광야는 기도할 때마다 응답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가까이 하셨던 바로 그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S3. 문제제기
S3. 문제제기
물론 우리들은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 주님이 어떻게 가까이 계시나? 천국은 저 하늘나라에 있는데 지금 천국에 계신 주님이 어떻게 우리와 가까이 계신단 말인가? 이미 예수님은 떠나셨고, 아직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천국이 우리 가운데 임하고 예수님이 나와 가까이 한다는 말인가? 괜히 그런 말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아닌가? 천국이 앞으로 온다면 몰라도 어떻게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가까이에 계시다고 할 수 있나? 하고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온 세상을 심판하러 육신을 입고 그렇게 이 땅으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J1. 하나님의 심정, 방법, 그리고 속성
J1. 하나님의 심정, 방법, 그리고 속성
삼위일체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이 땅에 오신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예수님은 성령님 안에서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신 것입니다.
저는 2003년 8월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있어서 미국으로 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희는 재산이 하나도 없었고, SFC 간사 생활을 12년 정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유학을 하기 위한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교수님께서 당시 SFC 본부에서 총무로 사역하는 저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저희 대표간사님과 의논을 하셔서 길을 찾아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 아는 분들에게 저희 후원을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그 뜻을 좋게 여겨서 저희의 유학 재정의 반을 책임지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후원자들을 모아서 필요한 재정의 80% 정도가 확보가 되어 유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에 도착해서 학업하는 첫 달부터 아무도 후원금을 보내지 않았어요. 당시에 저희는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돌아올 수 있는 비행기 표 네 장 값 정도만 통장에 있었습니다. 가서 학비 내고, 치도 하나 구입하고 하니까 있던 돈 사 써버리고 이제 한국에서 오는 후원금만 의존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안오는 것입니다. 첫 달은 그러려니 했는데 감사하게도 미국에 먼저 유학하고 있던 대학 동기가 김간사 유학하는데 그래도 내가 조금 보태고 싶다고 해서 1,000불 수표를 한 장 보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그달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달에도 후원금이 안들어 옵니다. 아이들 학교는 대부분 학교에서 무료로 해 주었지만 그래도 지불해야 하는 돈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것하고 먹고 살아야 하고 다음 학기 학비도 준비해야 하는데 재정이 없는 것입니다.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은 마지막 순간에 꺼내서야 하는 재정이니까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두 번째 달에도 후원금이 없는 상황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저희가 공부하던 신학교 기숙사 세탁소에는 사모님들 간에 귀신이 나온다는 말이 돌고 있었습니다. 한 분이 혼자 세탁하러 가는데 거기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남자 목사님들은 신학교 기숙사에 무슨 귀신이냐며 터부시 했지만 사모님들은 그런게 아니었어요. 그게 얼마나 걱정이 되는 일인지 모두가 혼자서는 빨래를 하러 다니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사람이 씩씩하게 빨래를 혼자서 하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귀신 하나도 안무섭다’ 하고 큰 소리를 치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대범해졌느냐’고 했더니 대답이 이렇습니다. ‘나는 후원금 안오는 게 무섭지 귀신은 하나도 안무섭다’는 겁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그달도 말일이 옵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내가 말합니다. ‘할 수 없으니 한국 통장 그거라도 씁시다. 우선 급한 학비나 아이들 비용도 해결해야 하니까 좀 찾아 쓰고 재정이 오면 처리합시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책을 좀 보다가 들어오는 길에 은행 ATM기에 갔습니다. 카드를 넣고 돈을 찾으려고 금액을 입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반응이 없고 돈이 안나오는 거에요. 아니 어떻게 된거야? 하고 다시 해 봐도 안됩니다. 얼마나 등골이 오싹하던지 지금도 그때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할 수 없이 아침에 알아보기로 하고, 집에 가서 아내에게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 기도하면서 기다리자고 했지요. 당시 저희는 매일 저녁 9시에 아이들이랑 가족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 기도회를 하고 통장을 인터넷으로 죄회해 보았는데 아무 추가된 돈이 없습니다. 그래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은행으로 갔어요. 말도 어눌한데 바로 가서 사람들 만나기가 힘들어서 우선 카드로 찾아보자 하고 카드를 넣었더니 아니 어제 그렇게 안나오든 돈이 찾아지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두 달 동안 행정처리에 익숙치 않아 개인들과 교회에서 후원하기로 했던 돈이 그날 새벽에야 도착을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건드려야 할 돈을 손을 대지 않았으니 우리 부부는 너무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 우리가 남겨둔 재정을 사용하려는 것을 막으시고 준비된 후원금으로 생활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저희의 후원의 반을 부담하기로 하신 분들이 당장은 모이기 힘이 드니 1/3 정도를 먼저 지원하기로 했는데 두 달 동안 후원을 못하신 거에요. 이후에 돌아와서 보니 이분들이 후원을 못하고 그 모임이 결렬이 되었던 거에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분들의 후원금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상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첫 달에 친구를 통해 보내 준 그 금액은 사실 이분들이 우선적으로 후원하기로 하셨던 금액이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 달에도 그만큼의 작정하지 않은 후원이 있었던 거에요. 그리고 그다음 달이 지나고 그 다음달이 되니까 이번에는 그 금액의 두 배가 작정하지 않은 후원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햐! 이러면 이번 달에는 돈이 좀 남으려는가’ 하고 보니 그게 아니라 그달에는 저희가 의료보험을 갱신을 해야 하는데 꼭 그만큼의 재정이 더 들어 왔던 거에요. 다음 달에도 그렇게 추가 후원금이 있었고, 그다음 달에는 학비를 내야 하는 달이었는데 이번에도 두 배의 작정하지 않은 후원금이 들어 온 것입니다. 무려 일곱달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까 저희 후원회장을 맡으셨던 목사님께서 보시고는 교회의 성도 일부에게 형편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감사하면서 후원회를 별도로 만들어서 후원금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분들이 작정한 금액이 처음 후원자들이 하기로 한 액수와 꼭 같았어요. 그렇게 하고 나서 매달 있었던 작정하지 않은 후원금은 딱 끊어졌어요. 그렇게 저희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시고 기도하지 않은 것도 공급해 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도는 내 삶에 가까이 계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고 구하십시오. 하나님 가까이 계심을 알게 하시고,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시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해 주시기를 항상 소원하고 구하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W1.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기에 성도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W1.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기에 성도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가까이 계시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이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가까이 계시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 4절 말씀을 봅시다.
빌립보서 4장 4절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는 가까이 계신 주님을 기억하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사실 성도인 우리가 무엇을 기뻐하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시편 4편에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4편 7절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기쁨을 두셨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만든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두신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의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기쁨은 추수하여 곡식과 새 포도주를 풍성하게 얻은 것보다 더 크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월급 통장에 돈이 가득 채워지는 것보다 하나님이 내게 더 큰 기쁨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가까이 계신 예수님이 주시는 바로 이 놀라운 기쁨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얻고 누리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에 항상 젖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감정은 영의 상태를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 새 생명의 삶을 사는 영적인 상태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이 두신 기쁨이 항상 가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성도인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상담을 요청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동생뻘 되는 가정이 있는데 이 부부가 깨어지려고 하니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을 찾아 남편 되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의 말이 자신은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을 깨고 싶지 않은데 아내가 계속 다른 남자를 만나고 가끔 씩은 집 근처에 와서 아이도 멀리서 보고만 있다가 다시 돌아가버린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아내를 만나야 하는데 이분을 만날 수 없어서 남편만 위로하고 만약 부부 관계를 깨고자 하지 않는다면 좀 더 인내하고 기다려 주라고 조언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아내되는 분은 왜 그랬을까요? 아내는 원가정이 아버지가 알콜 중독에 젖어 있고 엄마를 항상 때리는 알콜 폭력 가정의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건강하고 부유한 기독교 집안의 후덕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서로 사귀게 되었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 좋은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계속 그녀를 괴롭힌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주는 남편은 너무 좋은 사람이고 자신도 사랑하지만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자기에게 욕을 하고 폭력까지도 행사를 하는데 이 사람이 너무 편하다는 거에요. 남편과 비교하면 이 사람은 너무 질이 떨어지고 나쁜 사람이지만,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지만 그 사람과 있으면 자기가 너무 편안하고, 맞고 욕들어 먹으면서도 내가 있을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항상성을 가지고 삽니다. 항상성이란 내 삶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내가 익숙한 감정에 익숙하고, 내가 살아오던 것에 익숙해져서 새로운 것은 불편하고 항상 있던 그것이 좋아지는 성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내는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아버지가 고함지르고 뭘 부수고 하는 게 익숙한 거에요. 그리고 어느 듯 그게 편해진 거에요. 그렇지 않고 고상하고 존중하는 삶은 너무 불편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바꾸지 못하고 부정적이고 악한 데 익숙하다 보니 참 좋은 것이 주어지니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후 남편의 인내로 이 가정이 잘 회복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감정에 익숙합니까? 욕하고 비난하고 부수고 원망하는 감정이나 혹은 언어에 익숙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죄 아래 살던 우리의 옛 습관과 옛 감정을 이제는 다 뒤로하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기뻐하시는 분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주신 영생의 기쁨이 내 삶에 항상 거하도록 말씀에 힘쓰고 항상 기도하는 삶을 통해 주님의 기쁨을 잘 지켜나가시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W2.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면 성도는 용서의 삶을 삽니다.
W2.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면 성도는 용서의 삶을 삽니다.
이러한 기쁨의 삶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 5절 상반절 말씀을 봅시다.
빌립보서 4장 5절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여기에 관용이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받아들임’을 말합니다. 사도는 성도들이 이 관용의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남을 용서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교회 안에도 용서하지 못해서 힘들어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남의 잘못을 보면 그것을 들추어내어야 하고, 그것을 드러내어 창피를 주거나 그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은 가려서 선악간에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 옳고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보면 시비를 가리기 전에 먼저 들추어내고 그래서 창피를 주고 나중에 사실이 아니거나 다르면, 그러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 22절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 22절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사실 이 말씀은 490번 용서해 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곱 번의 일흔 번은 490번이지만 예수님은 숫자에 매여 그렇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은 언제라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에 이것이 율법이고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우리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그렇게 온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다음에 나오는 만 달란트 탕감받은 은혜를 이미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 달란트를 데나리온으로 환산을 하면 6천만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기 때문에 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지요.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기 때문에 6천만 데나리온은 6천만 일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인데 6천만 일은 164천 384년입니다. 그러니까 만 달란트라고 하면 16만 년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일당을 5만원으로 보면 3조 정도가 되고, 10만원이면 6조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큰돈을 탕감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번에 저희 교회에서 사경회를 가졌는데 강사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1억하고 50억원은 차이가 많이 나는 돈이라는 겁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 앞에 만약 100조가 붙으면 어떨까요? 100조 1억하고 100조 50억하고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그렇죠. 그러면 그 차이는 크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죠. 집을 거래할 때 보면 3억 2천 만원에 집을 내놓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2천 만원 깍자’ 하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2천만원만 놓고 그걸 깎아 달라고 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 더 큰 돈이 있으니까 뒤에 것은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용과 용서도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 일 자체로만 보면 용서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10조나 되는 큰 용서를 받았으면 천만원 짜리 빚, 백만원 짜리 허물은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10조나 되는 큰 빚을 탕감받은 기쁨이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내가 받은 것은 10조인데 백만원 짜리, 천만원 짜리 그것 용서 못하면 10조 탕감받은 게 무슨 기쁨이 되겠느냐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큰 용서를 기억하고, 그 용서받은 기쁨 안에서 항상 관용하며 사시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용서라는 말은 요즘 상담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 때문에 내 마음에 생긴 억울함이나 그로 인한 고통을 내가 당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분노를 지속하고 있으면 나만 건강이 나빠지고 기분도 우울해 집니다. 그래서 혈압도 높아지고 장기도 상하는 것입니다. 아예 다른 사람을 다 용서하고 그 사람 때문에 생긴 엉어리를 내 속에 담아 두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의 은혜, 천 만원짜리 손실과는 비교할 수 없는 10조짜리 큰 복을 생각하고 마음에서 용서하고 떠나보내면 모든 사람에게 그는 큰 복을 누린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진정으로 용서하고 자유하시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W3.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면 평강을 누립니다.
W3.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면 평강을 누립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는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6절 말씀을 봅시다.
빌립보서 4장 6절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사도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생각하며 염려와 근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항상 마음이 불편하고 힘이 듭니다. 성도인 우리들도 과거에 대한 후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고 돌이키지 못하는 과거로 인해 우리는 걱정하고 삽니다.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미래로 인해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근심과 염려를 두고 이런 권면을 하셨습니다. 우리 마태복음 6장 34절 말씀을 봅시다.
마태복음 6장 34절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들 중 대부분은 혹은 95% 정도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걱정을 면서 살까요? 학자들은 그 이유가 걱정하는 데 습관이 들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항상 걱정하지 않으면 마음이 오히려 불편해요.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걱정하고 염려해야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아니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해요. 다 편하기를 원하지. 그렇죠. 다 마음 편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걱정하는 것이 너무 습관화되어 있고 그게 일상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걱정을 안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 가정의 자녀들을 조사해보면 이분들은 항상 걱정하는 많이 하는 삶을 산다고 합니다. 왜요? 이들은 자신의 하루의 행복이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행복은 술마시고 오는 아버지한테 달려 있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항상 나도 모르게 염려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 내가 행복해도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항상 다른 사람에 의해 깨지곤 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걱정하는 습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참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그 걱정과 염려에 매이지 말고, 그 문제를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면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알아서 그것을 해결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집에 하나님께 구해야 할 일이 생기면 걱정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경험할 수 있고, 또한 아버지와 특별히 사귈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보호를 의뢰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부르짖는 것을 좋아하시고 아버지에게 답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 탕자의 비유를 보면 어떻습니까? 탕자가 돈이 있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아버지를 생각조차 안합니다. 그런데 돈 다 떨어지고 거지가 되고 보니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옵니다. ‘종이라도 삼아 주세요’ 하고 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 누가복음 15장 22, 23절을 봅시다.
누가복음 15장 22, 23절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 다 탕진한 아들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온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다가도 조금 어렵고 힘이 들어 마음으로 아버지를 찾아오면 용서하시고 아들의 권세와 자격을 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아들놈이 어떤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반지까지 다 벗어버리고 집 나간 겁니다. 아버지는 그것 다 간직하고 있으시다가 아예 새 걸로 반지 끼워주시고 잔치를 벌이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 본문 7절 말씀을 봅시다.
빌립보서 4장 7절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 성도가 살아가는 데 있어 마음과 생각은 너무나 중요한 영의 기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신 자리이기 때문에 성도가 마음과 생각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마음과 생각을 흔들리지 않도록 지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버지께 의뢰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기도는 아버지와 함께 나누는 식탁의 교제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또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풍랑이나 환란이 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요동을 치고 안정을 얻지 못하고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문제 앞에 서 있으면 나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모든 문제들을 주께 감사의 마음으로 올려 드리면 아버지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나 모든 피조물의 지각보다 탁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때 걱정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다른 일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저희는 우리를 후원하기로 하신 분들이 후원을 안하게 되면 미국 공부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힘들고 걱정과 근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간에 우리가 더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을 갖게 하심으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칠 개월은 매월 약속하지 않은 후원금을 그만큼 채워 주셨고, 이후부터는 새로운 후원회를 조직하셔서 새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가족들은 큰 평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재정이 부족해도, 아니 사람의 계획에 비해 충분하지 못해도, 그래서 걱정스러워도 아버지의 뜻이 분명하면 그렇게 순종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에베소서에서 이런 기도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 에베소서 3장 20, 21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에베소서 3장 20, 21절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예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고 구하면 주님은 넉넉하게 들어 주십니다. 바울은 우리 하나님은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넉넉한 평강이 간구하는 우리에게 평안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기도는 내 계획대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면 그 뜻에 만족하고 기뻐하면 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할 때 우리는 참된 자유와 평강으로 염려가 아닌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L5, L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L5, L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와 항상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을 꼭 붙잡고 사시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은 넉넉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의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들 앞에서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어서 아버지가 주시는 넉넉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가까이 하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온전히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사시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 이 시간에 찬양을 한 곡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 잘 아시는 찬양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라는 찬양인데요, 우리는 기뻐할 수 없고, 관용할 수 없고, 평강할 수 없지만, 주님이 내 손을 가까이에서 꼭 잡고 가 주시면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관용과 평강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이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우리 삶에 기쁨과 관용과 평강을 주시도록 한마음으로 찬양드리면 좋겠습니다.
찬양
주님여 이 손을 꼭잡고 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