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를 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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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439장 십자가로 가까이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네 감사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인생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어두움에 살던 단계, 중생하여 빛으로 옮긴 단계, 그리고 소명을 감당하는 단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 주시는 능력이 됩니다. 또한 십자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소명을 위해 직분과 은사를 주시는 능력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마리아 여자의 이야기는 이러한 성도의 변화를 위해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생수는 우리를 어두운데서 벗어나 빛으로 인도할뿐 아니라 어두움으로 인해 입었던 상처와 아픔도 다 드러내어 씻어 줍니다. 오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주신 예수님의 생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 또 우리 생애에도 이런 생수주시기를 함께 구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예수님의 생수는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시는 중생을 이루십니다. 중생은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따른 것으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복음을 듣고 영적인 앎을 깨우치게 되면서 우리 안에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과정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는 때에 사마리아를 지나시겠다고 계획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3, 4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4장 3, 4절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돌아 가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왕래할 때 사마리아를 피해 요단강을 건네 베레아 지역을 거쳐 다녔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싫어해서 그 땅으로 다니는 것을 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에는 분명히 베레아 지역을 거쳐 요단강을 건너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실 때는 사마리아를 통해서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마리아 수가는 구약 성경에서는 세겜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곳은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까웠고,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정오 12시가 되어서야 예수님은 그곳 우물가에 앉으실 수 있었습니다. 6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4장 6절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유대는 사막성 기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낮 열 두시가 되면 아무도 길을 걸어 다닐 수 없습니다. 그 이전 시간부터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집에서 쉬거나 잠을 잠시 자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마침내 열 두시가 되어 우물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당시 시간으로 여섯 시라고 하면 지금의 아침 6시를 한 시로 보면 낮 열 두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급히 마을로 들어가 음식을 구하러 간 것을 보면 시장도 했던 시간입니다. 그러는 중에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는데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옵니다. 7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4장 7절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물론 제자들이 지금 없기 때문에 여인에게 부탁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시러 그렇게 제자들을 독촉하여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물론 여인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녀는 오히려 당황하여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9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4장 9절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중생은 내가 전혀 예상하고 있지 못하던 시간이 임합니다. 그것은 내 삶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한 여인을 통해 사마리아 전도를 시작하기로 작정하셨고, 그녀의 일정에 맞추어 발걸음을 재촉하여 제자들과 함께 이 우물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여인을 만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주님의 시간표에 맞추어진 은혜이지 우리의 삶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오셔서 믿음을 주시고 나를 만나주시는 예수님을 환영하고 그 믿음을 온전히 붙드시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부어주신 생수는 더하여 우리의 어둠의 삶에 있던 감추고 싶은 것들을 들추어내고 치유합니다. 예수님은 낯설어 하는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약속하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요청을 했고, 예수님은 가서 남편을 데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16절 말씀을 봅시다.
요한복음 4장 16절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인은 남편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 여인은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는 있었지만 그도 그녀의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데려올 남편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없다는 여인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녀의 형편을 몰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여인이 살아오던 어두움의 삶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셔서 그녀를 그 어둠으로부터 생명의 빛으로 부르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형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자가 창녀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도 하고, 또 최근에는 아마 형사취수제로 인해 형이 죽고, 동생도 죽고 하면서 다섯 번째 형제도 죽었고, 이제는 여섯 째와 살고 있는 여인이 아닐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이 여인이 살던 어두운 세상은 그녀에게 큰 상처이고 아픔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아픔을 감추고 싶고 남들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형편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사람을 피하고 만남을 도피하고 싶어합니다. 아마 이 여인이 모두가 쉬는 낮 열 두시에 우물을 찾은 것도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고,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이 숨은 여인을 찾아오셔서 그녀가 가장 숨기고 싶어하고 자신이 숨고 싶은 그 이유를 들추어 내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남의 비밀을 몰래 들여다보고 즐기는 악취미가 있어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그 무겁고 아픈 마음을 치유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 살이하다가 지치고 피곤한 가운데 만난 고통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감추고 숨겨두고 사노라면 우리는 자신도 숨기고 살아야 하는 그런 고통의 어둠의 세계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하고 부패한 인생의 걸음이 만드는 수많은 죄악과 그로 인한 절망, 그리고 주고 받은 상처들을 내 마음 안에 숨겨두면 우리는 세상과 만날 수 없고 빛을 향해 나올 수 없습니다.
빛이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 깊숙이 숨겨진 그 아픔을 어둠 속에 두지 않고 빛으로 꺼집어 내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드러내심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환부를 개복을 통해 들추어 내고 그 환부를 도려내듯이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숨겨진 상처와 아픔을 끄집어 내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을 자신이 다 못들어 냅니다. 예수님께서 남편을 데려오라고 여인을 이끌고 문제 속으로 들어가셨지만 여인은 그저 부인만 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인정한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하는 말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거짓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기의 힘으로 남편을 데리고 예수님께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아픔을 인정해 주십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 고백을 주님은 부인하시거나 부족하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래 맞다, 네 말이 맞다, 너 한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다 아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지, 틀린 말이 아니다 하고 여인을 위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내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문제를 다 아는 예수님을 선지자군요 하고 인정을 했고, 이어 예배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가 오시면 알게 되겠죠 하고 말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26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4장 26절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 놀라운 선언은 그녀를 새롭고 온전하게 변화시켰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드러난 환부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 그 모든 것을 치유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자신의 감추인 모든 상처와 아픔을 아시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을 받아주신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줄, 메시야이신 줄 알고 났을 때 그녀의 인생에는 부끄러움이나 사람을 회피하던 모든 어둠의 삶이 떠나 버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8, 29절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여인은 이제 변했습니다. 자신의 행한 모든 일이나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숨겨지거나 감추어질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나를 찾아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이신데 사람 앞에 내가 부끄러울 것이 무엇이 있겠으면 사람 피해 숨어 다닐 이유가 뭐가 있냐는 것입니다.그녀는 이제 그런 것들에 의해 사는 어둠의 사람이 아니라 동네의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놀라운 복음 전도자로 거듭나고 있는 것입니다. 숨기고 감추어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자 그녀에게 있던 놀라운 내적인 은사와 자질들이 회복되고 그녀는 새로운 삶을 걷는 여인으로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생은 구원주이신 예수님을 통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와 시간에 어둠에 있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놀라운 구원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알려 주셨고, 십자가의 고난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우리는 오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구원받아 빛의 길로 옮겨온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중생은 또한 우리의 숨겨진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내 속에 숨겨둔 어둠의 세상의 아픔들을 들추어 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주님의 손으로 치유해 주시니다. 내 힘으로는 인정조차 어려운 일들이지만 예수님 손에서는 모든 것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능력이 있습니다. 중생의 은혜를 힘입어 내 속에 감추어둔 것들을 드러내어 시인하고,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중생자의 평강과 빛된 삶으로의 전진을 이루시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