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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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4]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설 교(학개 1장 2~4절): 먼저 마련해야 할 집
‘내 집 마련’, 이 말을 들으시고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이미 자가를 소유하신 분들께서는 별 감흥이 없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소원을 이룬다면 감개무량할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사실 이에 대한 큰 생각이 없었습니다. 부모님 집에서 얹혀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전세를 사신다고 하면, ‘아, 또 언젠가 이사 가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고, 우리 집이 없는 것에 대해서 설움을 겪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집은 적응하면 되는 공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 열 평이 채 되지 않는 단칸방에서 살게 되면서, 작은 집에 사는 것이 매우 답답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더불어서, 이런 집조차도 쉽게 구하지 못하고 2년 뒤에 또 다른 집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매우 부담스럽게 다가왔습니다. “내 집을 마련하면 얼마나 좋을까?” 자연스럽게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김포제일교회를 오면서 교회에 가깝게 보금자리를 구할 수 있음이 감사했습니다. 그 전에 있던 곳에서는 매일 같이 부평에서 서울 서초를 왔다 갔다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집이 어디인지, 어떤 집에 사는지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을 느꼈습니다.
주변에 재개발이 들어가고 많은 성도님들께서 이사를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저와 동일한 고민을 하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재개발은 모두가 함께 다음 살 곳을 정해야 하는 숙제를 안겨주었습니다. 이사를 잘 마치신 분들을 포함하여, 앞으로 이사 예정이신 분들께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좋은 주거지를 잘 구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더불어서 이렇게 내 집 마련이 이 땅에서 중요한 것만큼, 우리의 영혼의 집을 마련하는 일은 더 크게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면 이것이 더 금방 와닿으실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편한 집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어디론가 가지 못하고 가족과 친구들과 교제가 끊어져 괴롭고 외로우신 분들이 계십니다. 또 그 외에도 현장예배, 영상예배를 매주 드리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이 답답하고 무미건조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족과 친구들, 하나님마저 떠난 것 같은 허전함과 고독함, 이러한 상태가 지속 되면 잘 꾸민 좋은 집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몸이 거주할 곳이 분명히 필요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누릴 처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을 잃었다면, 오늘 말씀 가운데서 반드시 회복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집’이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합니다. 2절에서 여호와의 ‘전’, 4절에서의 성‘전’, 그리고 판벽한 ‘집’, 이 세 어구는 히브리어로 ‘베트’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하여 집에 대한 내용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주고 받으시면서, 집의 문제를 거론하고 계십니다.
무슨 문제였을까요? 2절에서는 백성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본문에서는 시기라는 단어가 한번 등장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두 번 등장합니다. 즉, 이를 다르게 표현해보면 “때가 오지 않았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기가, 여호와의 전이 건축될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강조하는 표현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벌어졌기에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라고 하는 것일까요? 1절은 학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던 시기가 다리오 제 2년 여섯째 달 초하루라고 말하는데, 이는 기원전 520년 8–9월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바사라 불리는 페르시아 2대 왕 캄비세스가 돌연사하고, 다리우스 2세가 왕권을 잡은 지 2년이 되는 시기였습니다. 국제적인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집트와의 페르시아 분쟁하며 국내 정세를 잡기 위해 많은 소모전들이 즐비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성경주석가 앤드류 힐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학개의 청중은 주의 성전을 재건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예루살렘에 다시 세워진 공동체는 여전히 바벨론 포로 후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공동체를 세우느라고 힘겹게 애쓰고 있었다. 자급자족의 정도는 기대 이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그렇게 열악한 자원을 여호와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 같은 그렇게 엄청난 자원이 소모되는 거대한 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앤드류 힐)” 이 말대로, 유다 백성들은 좀 더 형편이 나아지고 경기가 살아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성전 건축을 미룬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을 통하여 무슨 일을 행하셨습니까? 그들에게 약속하신대로 고국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 고레스는 그들에게 필요한 돈과 재료를 아낌없이 주었고, 성전 보물을 가지고 유다로 돌아가는 유다 백성들의 길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할 재물도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시기가 아니다!”라는 탓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는 그렇게 복을 주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불신앙과 더불어 그들에게 사리사욕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보다 자신의 집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치 성전을 위해서는 8년을 공사한 솔로몬이 자신의 왕궁을 건설하기 위해서 12년을 투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심지어 성전에 들어가는 재료보다 더 좋은 것들로 자신의 집을 치장했습니다.
이러한 대비가 오늘 본문 3~4절에서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4]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1절에서 알려주는 BC 520년 8-9월은 농부들이 포도와 무화과 그리고 석류를 수확할 시기이며, 초하루로서 구약의 안식일 중 하나인 월삭의 때였습니다. 백성들은 성전에 모여 예배와 축제를 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배 현장에 역설이 보입니다. 성전에 지붕이 없습니다. 건물이 지어지다 말았습니다. 뜯어지기 시작하고, 온갖 폐허의 잔해와 쓰레기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고 있는 유다 백성들은 어떤 집에 거하고 있습니까? 4절의 말씀처럼 판벽한 집에 거합니다. 그들의 집은 지붕을 얹고 완성된 집입니다. 집 안에 치장도 합니다. 아마도 성전 재건을 위해서 받은 재물을, 그들의 집을 지을 용도로 빼돌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 우량한 목재는 성전으로 가지 않고, 백성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채워졌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너희 집은 지붕도 있는데, 내 집은 지붕도 없이 황폐하느냐?!” 이렇게 4절을 통해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2절에서 의미심장한 표현을 하셨습니다. 백성들을 표현하실 때 ‘이 백성’이라고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며 복과 소망, 위로와 힘을 주실 때는 분명 ‘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들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책망하시고 계십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진노하리라 하시는 분노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즉, 이들은 하나님을 홀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먼저 짓지 않고, 찾지 않고, 소중히 여기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정신은 말라기의 예배에서까지 이어지면서 하나님께 하찮은 제사를 드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 구약학자 알렉산더 모티어는 다음과 같이 이 구절을 주석합니다. ‘그들의 문제는 좋은 물품들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선함이 결여된 것이다.(J. A. 모티어)’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선하다고 여깁니까? 이 땅에서 풍요롭고 안락하고 쾌락을 누리며 아프지 않고 평안한 것, 이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이것이 보장되지 않을 때 우리의 소원은 먼저 이것을 채우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사명 감당? 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씀 보는 것? 기도하는 것? 전도하고 순종하는 것? 내 집 마련도 못했는데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의식주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의식주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의식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선하심보다는, 물질의 선함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채워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등지고 가장 소중한 가치를 찾아 나섭니다. 당장에 하나님께서는 내 집 마련을 도와주실 것 같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와 여러분들은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난을 주시고, 나의 소유를 빼앗아가셔도, 여전히 그분은 나에게 선하신 분이신가?’ 이 대답에 자신 있게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저 또한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의 터와 집, 안정된 관계나 가치 등 모든 것을 흔들어 버리시면 어떻게 하지? 하는 고민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 가운데 맞닥뜨리는 모든 것은 이 부분에 대한 씨름과 해답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성경의 약속대로 선하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을 도외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을 짓는 일은 건물을 짓는 일일까요? 물론 그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교회 공동체가 지어지는 것이기도 하며, 우리 자신이 성령을 모시는 거룩한 전이 되는 것도 포함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한 사람이 지어지고, 교회가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한 몸 공동체로 지어지는 모든 것이 바로 성전이 되는 일입니다.
학개 선지자의 청중들이 성전을 짓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했듯이,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다짐해야 하는 우선순위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안에 먼저 ‘성전’이라는 집을 마련해야 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집을 두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들이 성막을 통해, 나아가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거하시게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성전 삼으십니다.
제자반 과제 중에 있는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놀랄 만한 기독교 교리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정착하시고 그 곳에 안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인간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 믿는 자의 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고, 인간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 그분은 내 어두운 마음에 들어오셔서 불을 켜셨습니다. 차가운 난로에 불을 지피고 냉기를 몰아내셨습니다. 그분은 정적이 흐르던 곳에 음악을 연주하셨고, 불화가 있던 곳에 조화를 이루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넘치는 놀라운 사귐으로 공허를 채워 주셨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마음속에서도 모든 것은 주인으로 정착하시고 안주하시기를 바랍니다.(로버트 멍어)”
지금 내 안에 그리스도의 집이 있습니까? 그분이 나와 살고 계시며, 나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믿게끔 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안에서 나에게 무한히 베풀어지고 있음을 확신하게 하십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위해 살든, 의식주를 추구하든,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내 안에 거하소서. 나와 사시며 나의 마음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이 늘 거하시기에 합당한 성도로 살게 하소서!”
이러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요, 우선순위가 바로 된 예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성도들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누리도록 선함 자체인 그분 자신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죽으시고 살아 계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게 하신 목적은 그가 우리에게 잃어버린 보석, 곧 예배의 보석을 되찾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창조한 것을 배울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의 아름다움 속에서 주님을 경배하고, 우리의 시간을 멋지게 보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그것을 느끼고 표현하며, 그것이 우리의 노고에 들어가게 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A. W. 토저)”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참된 집입니다. 이 땅의 집이 없어도 괴롭지만, 하늘 본향의 집이 내 안에 지금 없다면 우리는 괴롭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감동이 없고, 하나님을 만남이 없으면 영혼이 어둡습니다. 그러니, 나 자신을 먼저 그리스도의 집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채우시고, 기도함으로 그분의 성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영혼의 집을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하든 만족하게 이 땅에서 거주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마련해야 할 집, 그리스도의 집을 마음 안에 짓기 위해 오늘도 전심으로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을 찾고 그분 안에서 평강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