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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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에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과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 중심에 에팔탑 건립이 계획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파리 시민들은 파리에 흉물스러운 철탑이 들어선다며 반발했습니다. 아름다운 도시 한복판에 큰 철탑을 세운다고 하니 반발이 심했던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에펠탑은 애초에 20년만 유지하기로 했던 터라 1909년에 해체될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무선 전신 전화의 안테나로 이용하기로 하면서 철거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 세워질 때 흉물이라고 여겨지던 에펠탑을 계속 보다가 보니 점차 매력을 느끼게 되고 결국 파리의 명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를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자이언스는 ‘에펠탑 효과’라고 명명했습니다. 처음에는 비호감이던 것이 자주 보게 되면서 점점 호감으로 변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 에펠탑 효과입니다.
이 효과를 보면서 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죄도 우리에게 이런 모습으로 다가와서 마치 자신이 죄가 아닌 것처럼 조용히 다가와 우리를 미혹합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죄라는 것을 인식하고 거부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이것이 점차 익숙해지면서 이전처럼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그런 문제가 생깁니다.
다른 문제가 아닌 죄의 문제에 있어서 에펠탑 효과는 너무 위험합니다. 사탄 마귀는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사소한 것부터 조금식 조금씩 우리를 이 효과로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에펠탑 효과로 인해 습관처럼 짓는 죄, 당연시 되는 죄의 모습들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런 죄의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아직도 죄 안에 있는 것이라고 요한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서 죄 문제에 대해 말을 끝맺지 않습니다. 8절 이후의 말씀을 보시면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아직 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죄 문제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구원 받았으면 죄가 없어야 할 것 같은데 본문은 여전히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죄는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의 문제를 확인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로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의 화평,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 곧 구원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대적이 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자녀이고, 거룩한 성도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지만,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깨끗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성도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면, 혼란이 오기 시작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을 가지는 단어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여전히 죄가 있고, 죄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니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됨의 본질은 믿음에 있지 거룩하고 흠없는 완전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의 본질은 믿음에 있지 완전에 있지 않습니다. 완전을 바라고 있고, 약속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을 향하여 나가고 소망하는 자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서신에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죄의 문제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죄는 공동체 내에서 성도끼리의 갈등과 싸움입니다.'모든 사람과 다 화목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다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증거요, 우리가 아직도 죄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니 겸손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고린도서나 다른 서신서 같이 성도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정확히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다룸으로써 성도들이 같은 신앙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성도들끼리 다투는 것을 죄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겸손할 줄도, 용서할 줄도 모르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과 다르기를 원합니다. 세상과 달리 완전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는 법이 없어도 되고, 어떤 상식이 없어도 되고, 아멘하면 모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가 기도 한번으로, 눈물 한번으로 다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 노력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협력해야만 완성의 과정으로 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라는 이름 하나로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솔직하게 돌아보면 교회의 이런 모습들, 우리 안에 있는 죄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구청구교회 공동체는 완전한 공동체 입니까? 우리 교회 공동체는 법도 필요 없고, 어떤 상식도 필요 없으며, 아멘하면 모든 문제가 없어지는 공동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신앙생활 할 때 우리 안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어떤 봉사의 영역에서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게 맞는데, 누군가 내 생각과 다르게 일할 때 답답하거나 짜증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저 집사님은 왜 저렇게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들 때가 솔직히 얼마나 많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 죄가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서로 노력하고, 또 위로하며, 협력함을 통해서만 완성의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기에 우리는 서로를 위함을 통해서만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완성된 교회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대구청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더 서로 사랑하기를 소망합니다. ‘저 성도는, 저 사람은 왜 저런식으로 밖에 못하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인이라 당연한 모습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만 교회는 교회다워질 수 있습니다. 죄인한테 왜 완전하지 않고 그렇게 죄인처럼 살아가냐 말하지 말고, 나도 죄인이고 저 사람도 죄인이니 우리가 서로 노력함으로, 또 협력함으로,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죄가 가지는 또다른 특징은 죄는 어떤 상태이고 경향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부흥회 때 윤치영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죄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웃과 화목하기를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 꼴보기가 싫은 것입니다. 용서하기도 싫고, 기다리기도 싫은 것입니다. ‘나는 저 꼴 못봐!’라는 마음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용납해 주셨는데, 모든 죄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셨고 품으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찾으신 방법을 나는 내 이웃에게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누릴 것 다 누리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그것을 적용하기 싫어하는 그 모습이 죄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교회는 더 많이 용서하는 곳이 되어야 하고, 더 많이 기다려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더 서슬 퍼렇게 행동합니다. 나에게는 그렇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완전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웃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뒤로 하더라도, 한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하는 믿음의 가족끼리도 좋은 표정 하나, 좋은 소리 하나 할 수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참으로 가난한 것이 됩니다.
서울에 있는 큰 교회에서는 주일에 교회 앞 공영 주차장에서 심심치 않게 싸움이 난다고 합니다. 차를 빨리 빼지 않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의 같은 교회 교인들끼리 싸움이 난다는 것입니다.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서로 감정을 마음대로 드러내다가, 나중에 누가 옆에서 아무개 집사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혼비백산해서 자리를 피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반응과 표정을 다 지어놓고, 나중에 서로 같은 교회 교인인 것을 알고 뒷 수습이 어려워 곤란했다는 그런 웃지못할 헤프닝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지 못하니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서울의 큰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까? 비단 우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이런 관계를 생각하니 어릴 적 부모님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종종 어떤 집사님에 대해서, 또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부모님이 이야기를 나누시곤 했습니다. 쉽게 말해 뒷담화를 하신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은 전혀 나지 않지만, 이런 저런 불평들을 쏟아내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저의 부모님 만의 모습입니까?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어떤 모양으로든 이웃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한 모습이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하고는 그닥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또 같은 곳에서 봉사하기 싫은 그런 사람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있지 않냐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는 우리가 이웃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해야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서로 지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신앙 공동체에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우리의 믿음의 모습은 믿음의 권속끼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를 받는 독자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한은 지금 ‘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가면서,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냐고 성도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마음에 불이 붙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조금 다릅니다. 어떤 초월적인 은사가 있고, 능력이 있고,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오래참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남포교회 원로목사님이신 박영선 목사님이 주례를 하실 때 “Love is long suffering”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신다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왜 사랑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까? 고통스럽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고통스럽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포기하면 결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오래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우리가 누구를 향해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대구청구교회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겪게 되는 가장 큰 시험은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보면 은혜가 없어지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보다 큰 시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혹여나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 생긴다면 여러분 스스로의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훈련시켜 나가야 합니다.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고통스러운 것이다’라는 말을 기억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려고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랑을 ‘믿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스스로 지금 수준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 다른 누구에 대해 불만스럽더라도 그 사람의 수준이 거기가 끝이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죄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해야하는 신앙적인 싸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악된 본성은 그렇게 하기 싫어하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저 사람에 대해 믿어주는 것,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죄는 관계를 깨뜨린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지게 만들고, 이웃과의 관계도 깨어지게 만듭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공동체로 묶으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문제는 사랑을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오래 참기도 싫고, 고통 당하기도 싫은 것이 죄악 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때로는 정말 원수 같이 느껴지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참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원수 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랑하셔서 고통 받으셨고, 온갖 조롱에도 오래 참으셨습니다. 오래 고통 당하시고, 오래 참으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도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렵습니다. 때론 내가 그냥 떠나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참고, 오래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저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 신앙이 자라가고 성숙해질 것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 부족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도들의 모습이 불만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수준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계속해서 단련시키셔서 신앙의 성숙을 이룰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부족한 나를 완전케 하실 하나님을 믿으시고, 우리 모두를 결국에는 완전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죄를 이기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 위해 먼저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