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262 views
Notes
Transcript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명하시며 계시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어제 묵상때도 제가 잠깐 나누었던 본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어제 나누었던 묵상과 비슷하니 조금 더 이해가
쉬우시길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한가지 사실을 함께 알아보고 자 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아직 살아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상반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에스겔 16:6 상반절)
여기서 말하는 화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하는 장면입니다.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의 진심을 이야기 하십니다.
현대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성된 공동번역 성경을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 하고 말하였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버둥거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를 흘리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큰 움직임을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못합니다. 죽기 직전의 사람의 움직임은 자다가 움찔하는 것보다도
작은 움직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움직임을 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제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묵상에서 다들 공통된 어려움 중의 하나는
우리의 신앙의 환경 입니다.
우리가 코로나라고 하는 전 세계적 어려움을 통해 영적인 힘이 빠져가고 있습니다.
당뇨병 환자들이 근육이 말라가듯이 우리의 영적인 근력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탱해주던 수련회는 사라졌고
옆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던 친구들 또한 사라지고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물론 우리교회는 대면예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차 대유행이 예고된 이 시점에서 다시 비대면 예배가 시행될 수 있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아요.
신학교라고 무엇이 다를까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전달할까 고민하지만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수님의 대부분이 목사이고 학생의 대부분이 전도사인
신학대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저희는 말씀 전하며 사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내 생명을 사용하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야겠다 생각하고 살지만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포기하고 계시겠습니까?
어제 묵상에서 하나의 예화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예화를 짦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2층 주택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4살된 막내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빠져 나가다가 무서워서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자신의 방이 있는 2층 집으로 올라갔대요.
나와서 아이가 없어진 것을 안 부모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2층을 보니 아이가 연기 때문에 콜록거리며 창문 밖에 고개를 내밀고
“아빠 살려줘” 하고 울고 있습니다.
그냥 우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곧 졸도 할 것처럼 악을 쓰고 울어요.
아빠가 2층을 가고 싶겠죠.. 그치만 갈 수 없어요 그래서 아이에게 소리칩니다.
얘야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아빠가 안을게! 이렇게 소리를 질러봅니다.
아이가 울다가 아빠의 말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빠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뛰어내려… 무서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때 아빠가 소리 칩니다.
“그래 알아! 아빠도 알아 그래서 괜찮아!”
오늘 우리의 영적인 상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 무서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냥 여기 앉아 있을래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사랑하는 내 아들, 딸아 나도 안다! 그렇지만 거기에 그대로 있으면
너무 위험해 뛰어내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뛰어내릴 버둥거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버둥거림은 살아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9:27 NKRV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는 두가지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첫번째는 생물학적인 육체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두번째는 영적인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것은 두번째 죽음인 영적인 죽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점점 영적인 상태가 말라가고 가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산돌교회 청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편하게 교회만 왔다갔다 해서는 신앙을 지킬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버둥거려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버둥거리는 사람에게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버둥거림은 정말 다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 기도하는 것, 찬양하는 것, 양육받는데 힘쓰는 것 등의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것들을 삶에서 실행하시길 소망합니다.
추가적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하는 것은 공예배를 통해
은혜를 사모하시길 권면드립니다.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대예배, 청년예배를 드릴 수 있길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방법을 통해 한번이라도 더 하나님과 대면하는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시길 소망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