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8주일예배_계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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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에게 배우라

요한계시록 2:1–7 NKRV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시록 2장과 3장은 교회에 대해 말씀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 2장과 3장에서 현실문제 즉 신자가 이 세상에서 교회 생활하는 비결을 말씀하고, 4장에서부터는 종말에 대하여 즉 세상 종말이 가까울 때 될 일들과 모든 징조에 대해 말씀합니다.
오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에베소는 지금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도시입니다. 거기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남짓 머물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 일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여기 사자는 교역자를 말합니다. 사자에게 누가 편지합니까? 그리스도께서 편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도 요한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언제 보냈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살아 승천하신 후 지금 밧모에 있는 사도 요한을 영적으로 감화 감동시키시고 말씀해 주신 것이 편지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했는데, 이것은 비유입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았다는 것은 바로 힘 있는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하신다는 말이에요. 1장 20절에서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1차 대상은 교회를 담당하던 목회자를 말합니다. 2차 대상은 교회를 함께 섬기는 성도들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을 손에 붙잡고 일하십니다. 오른손에 붙잡았으니 힘 있게 붙잡은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먼저 주께서 붙드시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신뢰가 없으면 이 세상에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2:2)
먼저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잘한 것을 칭찬합니다. 첫번째는 “행위”를 칭찬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이신칭의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여서 행위에 대해 가볍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삶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자 답게 행하는 삶을 주님께서 칭찬하십니다. 믿음을 강조한다고 행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수고'를 칭찬합니다. 신앙생활, 특히 교회에 속해 지낸다는 것은 수고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평안과 편안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안은 어떠한 상황에든 상관없이 누리는 것이지만, 편안은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평안의 삶이지 편안의 삶이 아닙니다. 편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하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할 희생이나 수고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또 다른 죄를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이 땅에서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진실하게 믿는 증거입니다. 특별히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은 목회자가 하는게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한맘으로 노력해서 일해야 합니다.
교역자는 가르치고 회중은 가르침 받은대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역자는 잘못가르치면 혼나고, 회중은 배운대로 살지 못하면 혼나는 것입니다. 이런 상호 작용 속에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세번째는 ‘인내'입니다. 배교의 시대에 복음을 붙들고 끝까지 애쓰면서 살아갔던 성도들을 칭찬합니다. 열매맺는 삶은 인내에서 비롯됩니다. 씨를 뿌려두기만 한다고 열매가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확실한 신뢰가 없이는 인내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확고한 믿음으로 배교의 시대에 복음으로 인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네번째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 입니다. 악한 자들은 행위의 악함도 있고, 가르침 받은대로 살지 않아 다른 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이들을 말합니다. 이들을 용납할 수 없는 이유는 썩은 과일 하나가 바구니에 생기면 다 썩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다섯번째는 ‘자칭 사도들을 시험해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말씀에 대한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교회요 성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거짓 가르침인지를 분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용히 숨어 활동하는 거짓된 자들을 시험해 거짓된 것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자칭 사도, 거짓된 스승들의 특징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 스승1: 말씀을 잘못 가르침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에베소 교회는 자칭 사도라 하지만 사도 아닌 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3절을 보면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곧 이 말을 했다는 것은 교훈을 틀리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훈 즉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바로 믿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딴 소리하는 사람들이 교회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알기 쉬운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알기 쉬운 말씀이라 해도 잘 생각해 보면 사실 알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실천해 봐야 합니다. 말씀을 행하면 그때 깊은 뜻이 나옵니다. 쉬운 말씀이라고 해서 다 알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말씀대로 실천해 봤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디 선생이 영국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전에 왔을 때 전했던 본문을 가지고 똑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친구들이 지난 번에 했던 설교가 아닙니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무디 선생은 그대로 다 실천했습니까, 하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그대로 실천하며 살라고 전했는데, 그대로 실천하며 살지 않았으면 다시 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 쉬워 보일 때도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이 말씀대로 실천했나, 실천하지 못했다면 참 재미는 못 봤다, 이 말씀 가운데 꿀 같은 단것이 있는데 내가 아직 그 맛은 못 봤다,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시 19:10).
성경에는 모르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많이 연구해야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를 보면 종종 하나님 말씀을 잘못 깨닫고 가르치던 사람들이 결국 이단이 되고 교회에 해를 끼치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가 혼란해지기도 하고 기독교가 약해지기도 하며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따르지 아니하면.” 옳은 교훈을 따르지 않고 다른 교훈을 전하는 사람은 멀리해야 합니다.
세상 지식이 많다고 반드시 성경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잘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고 은혜로 되는 것이지 사람의 지혜로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고, 가르치고, 자기를 주장하니까 그는 교만한 자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인 것입니다. 자기가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서야만 순조롭습니다. 자기를 내세우려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난 사람이 되고 하나님 말씀도 잘못 알게 됩니다.
거짓 스승2: 예수님보다 자기 사랑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을 맡길 때 무엇을 물어보셨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그것을 물어보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양을 맡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자된 삶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일이면 한다, 이렇게 돼야 하는데, 이것으로 내가 무슨 유익을 보나 할 것 같으면 이것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의 제자로 성도로 살아가면서 이 일이 내게 유익이 되나 안되나를 계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자는 범사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함께해 주시고 주님이 그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계속 형통합니다. 주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해도 된다고 가르치고,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거짓 가르침입니다. 주님보다 자기의 만족을 더 채우기 위해 살아가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거짓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대하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 스승을 멀리하라 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 1:10–11)
거짓 스승, 거짓 가르침에 함께하는 것은 곧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0절에서는 거짓 스승을 “집에 들이지도 말”라고 했는데 여기 집은 교회를 말합니다. 초대 교회는 개인들의 집에서 교회로 모였으니까, 집 곧 교회에 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여기 들인다는 것은 가르쳐 달라고 들이는 것입니다. 배울 수 있는,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멀리하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정도의 거짓 스승입니까? 요한이서 1장 7절에 보면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영혼과 몸을 참으로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구원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몸과 영혼을 취하셨습니다. 몸만 아니고 영혼까지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의 몸과 영혼을 취하신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데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직접 접촉하십니다. 우리와 똑같으신 주님이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 거짓 스승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집에 들이지도 말고 가르쳐 달라고 데려오지도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사도 하지 말고 멀리하라고 해요.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거짓 스승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칭찬받았습니다.
2장 3절부터 다시 봅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3)
주님의 이름을 견디고 게으르지 않게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칭찬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게으르게 살아갈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답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면서 주님의 이름에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2:4)
4절에 와서 에베소 교회의 현재 잘못을 지적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는 사랑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신자들끼리도 사랑이 많았고 교역자와 신자들 간에도 사랑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처음에는 다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중대한 결점이 있는데 유종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끝을, 마지막을, 결말을 잘 맺는 아름다움이 없어요. 그것은 필사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시작이 좋은게 좋은게 아닙니다. 끝이 좋아야 진짜 다 좋은겁니다. 우리네 인생도 시작이나 중간도 중요하지만 그 끝이 어떤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끝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좋은 일인 줄 알고 시작하여 합심하여 열심히 목표를 이루어 가고 있었는데 도중에 낙심한다든지, 열심이 식는다든지, 원망이나 불평으로 넘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패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잘해야 하는데 도중에 잘못되면 해 놓은 것조차 썩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시작은 했는데 끝을 맺지 못하니까 그러한 부패가 생긴 것입니다. 음식물이 썩은 것을 처리하는 것은 쉽지만, 사람이 썩은 것은 처리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성도는 늘 유종의미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리고 부패하고 타락하면 빨리 회개하고 곧장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썩어져서 결국 그 교회가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했습니다. 촛대는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촛대와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깨닫게 해줍니다. 이 교회가 바로 가야만 개인적으로는 모든 교인이 바로 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단체적으로는 하나님을 알려 주는 빛이 됩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촛대를 옮기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옛날에 교회가 많았습니다. 아프리카 말로 번역된 콥트어 성경이 지금까지도 있습니다. 콥트 방언은 헬라어 알파벳으로 표현된 고대 이집트 말인데 콥트어로 번역된 성경이 있을 만큼 옛날에는 그 지방에 교회가 많았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왕의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도중에 빌립의 전도를 받고 아프리카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처음 믿은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일찍이 복음이 전해져, 옛날에 교회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근대에는 아프리카에 교회가 없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있다 없어지는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부패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없애 버립니다.
모르기 때문에 더 믿는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2:6)
여기 “니골라”는 당시 있었던 이단의 이름이고 “니골라 당”은 “니골라”라는 이단자가 중심 인물이 되어서 만든 무리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2:7)
여기서 “이기는 그”는 회개한 자입니다. 죄 문제를 말하자면 죄 없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회개하고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지 나는 회개할 것이 없다, 나는 예수 안 믿고도 구원받는다, 그렇게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다 보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습니다만 그것은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겉으로 보기에는 먼지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태양빛에 비추어 보면 실제로는 먼지가 많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비추어 보면 잘못이 너무나 많습니다. 죄는 큰 죄도 죄요 작은 죄도 죄입니다. 다 멸망받을 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를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낙원”이 어디입니까? 낙원이란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장차 들어갈 내세 즉 오는 세상을 말합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들어가는 복된 곳입니다. 그래서 낙원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무슨 열매입니까? 우리는 그 열매의 이름을 모릅니다. 어떻게 먹습니까?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태중에 있는 아기가 바깥세상 일을 알 수가 있습니까? 태아는 어머니의 피를 통해 자동적으로 영양을 공급받는 것이지 태아가 입으로 씹어서 무엇을 먹습니까? 태아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내세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구약 모든 성경 말씀이 이것을 증거하고 이것을 초점으로 가르칩니다. 모든 말씀이 구원을 초점으로 해서 가르칩니다. 어떤 말씀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궁극적으로 구원과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가르쳐 주는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낙원을 보여 줍니다. 장차 들어갈 무궁한 안식 세계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낙원에 들어가서 살 것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거기에서 경험할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먹는지 잘 몰라요. 그러면 모르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습니까?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겁니다. 안다고 하면 아는 거지 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신용한다 할 적에 그 사람 속까지 다 들여다보고 신용합니까? 아닙니다. 얼마 함께 지내보고 사람이 진실하다 싶으면 앞으로의 일도 믿고 맡깁니다.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도 이렇게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말씀은 어떻겠습니까?
신구약성경을 볼 때 참으로 놀랄 만한 사실은 우리가 당시 이해하지 못한 것도 나중에 이해하고 보면 오묘하게도 진실한 말씀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만큼 알았으니 성경 말씀이 초점으로 가르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모른다고 해도 믿어야 합니다. 모르면서도 믿는 것을 하나님이 특별히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잘 모르고도 믿는구나, 하나님이 그런 신앙을 기뻐하십니다.
아주 자세하게 물어 볼 필요가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어떤 종류의 열매입니까,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합니다. 먹는다고 했으니 어떤 방법으로 먹습니까, 물어보면 그것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으면 성경 말씀이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내세를 믿고도 남습니다. 다같이 한 번 외쳐 봅시다. “믿고 남는다!” “모르기 때문에 더 믿는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믿는자 답게 살며, 수고하고 열심히 삽시다.
둘째, 거짓 가르침들에 타협하지 맙시다.
셋째, 주님의 이름으로 참고 견디며 유종의미를 이루기 위해 노력합시다.
넷째,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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