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Notes
Transcript
<맛을 추억하다>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지난주에 교회에서 나누어준 식사가 참 맛있었습니다.
맛칼럼리스트인 황교익은 가족끼리 식사를 할 때 어른 들이 즐기는 음식을 먹을 것을 추천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 음식은 우리 아버지가 혹은 어머니가 즐기시던 것이데...’ 하면서 회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 동의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저희 동네에 아리랑 식당이라고 있습니다. 이 식당은 탈북민이 운영하는 식당인데 메뉴 중에 [인조고기] 라는 메뉴가 있습니다. 이 인조고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콩고기 정도로 생각 할 수 있지만 콩고기와는 전혀 다른 음식입니다. 콩고기는 채식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콩으로 만든 고기이지만 인조고기는 사실상 콩을 가지고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입니다. 콩 10Kg을 가지고 기름을 짜면 2Kg정도가 기름으로 만들어지고 남은 찌꺼기가 바로 인조고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먹는 모양입니다. 얇은 쥐포 같은 모양에 식감도 고기보다는 쥐포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먹다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이 음식이 즐겨먹는 음식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즐겨 먹지 못한다 였습니다. 이유인즉슨 이 인조고기가 워낙 고가라서 이거 혼자 한 번 먹을 가격이면 온 식구가 다 먹고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에 살 때에는 잘 먹지 못하는 음식이었는데, 이제는 자유롭게 먹을 수 있어서 그때를 기억하면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서 많은 것을 회상하고 기억합니다. 음식에 담긴 추억을 떠올리고 그 음식을 먹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고상을 떨지만 결국 연약한 인간은 음식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 시킬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먹방이 유행하고,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고, 또 그런 것을 방송는 것은 그만큼 음식이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먹을 것으로 삶을 살다>
금욕주의 자들이나 다른 세상의 종교들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여겨서 단식이나 금식하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자랑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먹을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먼저 레위기를 보겠습니다.
레위기 11장 2절을 보면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라고 하면서 시작 합니다.
레위기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서 가르켜 주고 있습니다.
◎육지 잠승: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 하는 것 (소는 되고 돼지는 안 됨)
◎물에 있는 것: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미꾸라지 같은 것 못 먹음)
◎새들: 독수리, 솔개, 물수리
◎곤충: 기어다니는 곤충은 안됨, 땅에서 뛰는 곤충은 됨.
◎땅에서 기는 동물들은 안 됨.
먹거리에 대한 구분입니다. 성경에서는 구분하기를 부정하고 정한 것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가지는 궁금증은 성경에서 먹지 말라고 한 것들을 지금은 잘 먹는 다는 것입니다. 돼지고기도 잘 먹고, 추어탕도 오징어도 잘 먹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안 지키면서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에 와서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전체를 다 읽은 후에 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율법을 완성시켰다는 것을 항상 잊으면 안됩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의 집안이 복음을 받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 중에 처음으로 복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고넬료 라는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 베드로는 옥상에서 기도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환상에서는 보자기에 부정한 짐승들이 내려오는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것들을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베드로는 레위기에 나와 있는 데로 부정한 짐승은 먹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행 10:15)
이 환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기본적인 생각의 틀을 뒤집어 놓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깨트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짐승으로 비유되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고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직접적으로는 이것에 대한 본문이지만 간접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셨기 때문에 모든 먹는 것과 관련하여 신약 교회에서는 먹을 것에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율법의 진정한 의미>
이것은 마치 더 이상 성전이 필요하지 않게 됨과 같은 원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고 성전도 필요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레위기는 없어도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고 해서 레위기가 필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레위기에 나타난 영적인 의미를 우리는 생각 해야합니다. 레위기는 기본적으로 “거룩”을 가르치는 성경입니다. 즉 거룩하기 위하여 이렇게 살라고 가르치는 책입니다. 거룩은 ‘구별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먹을수 있는 동물들을 볼 때에 우리는 그 동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육지 짐승의 정결과 부정의 차이는 굽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차이였습니다. 굽이 있으면 땅에 발을 딛을 때에 발바닥으로 대는 것과는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땅이라는 세상과의 구별을 의미합니다.
◎물에 사는 물고기는 비늘이 있느냐 업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즉 주변으로부터 비늘을 통해서 보호 받을 수 있는 물고기만 정한 짐승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새들 중에는 시체에 앉는 새와 아닌 새로 구별합니다.
◎곤충들은 땅에 기어다니는 것과 메뚜기처럼 뛰어서 땅과 간격을 유지하면서 다니는 곤충을 구분했습니다. 이처럼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땅 혹은 물과 접촉하는가 접촉하지 않는가 하는 구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먹을 것을 먹을 때 그냥 먹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생활 속에서 구별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면서 살았습니다.
<유월절을 기억하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에 그들은 그들이 출애굽한 그 날을 기억하면서 어린 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을 함께 먹었습니다. 애굽에서 마지막 재앙인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급하게 그 잡은 양을 먹고 발효되지 않은 빵 무교병을 먹고, 쓴나물을 먹어야 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그들은 떠낭 했기 때문에 급하게 먹고 발효되지도 않은 빵을 먹었고, 쓴나물도 먹었는데 노예생활의 고통을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양고기와 쓴나물 무교병을 먹고,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회상하고 기억해야 했습니다.
출애굽 해서 광야 생활을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얗고 진주같은 꿀섞은 과자맛이 나는 이 만나는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 이슬처럼 땅에 내렸고, 가나안에 정착하여 첫 추수하기 이전까지 내렸습니다. 언약궤에 십계명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함께 금항아리에 보관되어 들어가 있었고 후대에 계속하여 이 만나가 그들의 광야 생활에 공급되었고 하나님이 먹이셨음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을 먹을 때에 그냥 먹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신앙과 관련되어야 했습니다. 삶이 신앙이고 신앙이 삶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는 척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기 전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제사를 드려도 드리는 척만했고, 율법을 지켜도 지키는 모양만 내면서도 마치 지킨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도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문자대로만 따랐고 율법이 주는 진정한 의도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식사자리에서>
신약에서도 음식으로 먹으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을 가르쳐 주는 부분이 나옵니다. 유월절 식사 자리에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예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말씀하시면서 음식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오늘날 성찬식으로 우리가 지키고 있지만 예수님이 제일 처음 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셨던 이 자리는 식사 자리 였습니다. 즉 아주 자연스러운 밥먹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가마솥에서 주걱으로 밥 퍼주시면서 말씀하시는 그런 느낌인 것입니다. 왜그렇게 표현 하셨을까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중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육체적이고 일시적인 생명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태어날 때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생명은 천상적이고 영적인 생명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날 때에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이 유지시켜 나가게 하기 위해서 떡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음식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반면에 택함을 입은 자녀들이 영적이고 천상적인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떡인 예수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먹을 때,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영적으로 취할 때 예수그리스도 께서는 신자들의 영적 생명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자양분을 주어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늘에 속한 영적인 떡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볼수 있게 그리스도의 몸을 떡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포도주로 정하시고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받아들고 우리가 실제로 입으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로 우리의 몸이 영양을 공급 받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의 영양을 공급하는 것은 참된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 라는 것을 시청각 자료로 볼 수 있게 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타내고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공로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먹을 때에도 우리는 그냥 먹지 않습니다. 성찬식을 할 때에 분명하게 이것이 나타나 지지만 우리가 언제 어디서 음식을 먹을 때에라도 나의 천상의 생명을 채우는 음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주의 백성들은 그들의 미세한 삶 하나 하나 마저도 주를 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한 동작 한 동작에도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행동에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영광스러워 지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홀로 위대하시고 영화로우신 주님 이십니다. 주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거울이 빛을 반사하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영광의 모든 것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그저 “한 끼 때우지 뭐” 이것이 아닙니다. 내가 먹는 음식에서 우리가 영양을 공급 받듯이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떠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 없음은 없어야 합니다. 천상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라면 모든 행동에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