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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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행1:1-3절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저자인 누가가 이미 누가복음에서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의 말에 만 의존해야 하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러한 사실이 구약의 말씀 곧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성취는 마치 돋보기가 빛을 모으듯 한 점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곧 이 땅에 오심입니다.
먼저 우리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왜 일까요? 우리 말에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상황은 매우 급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초기에는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오기만 하면 모든 언론은 앞다투어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물론 방역 수칙을 어기면서 방해적 요소가 있는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공격은 우리의 예배를 위축 시켰습니다. 전통적으로 모여서 예배하며 교제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와 교제를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성전과 율법에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했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주후 70년에 있었던 성전이 파괴되는 사건과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이런 코로나 상황은 곧 정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는 잠시 겪는 일이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1년을 보내고 다양한 학자 그룹 등 많은 관계자들을 통해 코로나 전후의 시대로 나뉠 것이라는 전망을 접했습니다. 기독교계 역시 다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단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변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예배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주일 예배는 빠지면 안된다는 사고가 있었으며 목회자는 주일예배 성수에 대해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역 지침에 따른 모임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방역 지침을 무시하는 교회 속에서 성도 각자가 예배를 선택하게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부분에서 목회자의 공통된 신학적 배경이 뒷바침 되지 못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배의 주도권을 갖게 되자 자신의 형식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흘러 간다는 것입니다. 대면, 비대면, 온라인을 이용한 방식, 본 교회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그 시간에 다양한 매체의 설교를 찾아 다니는 그러니 올바른 예배의 모범을 따른 온전한 예배가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 선택해서 듣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제 이런 방식은 하나의 형태가 되어 인터넷 교회의 등장과 새로운 형태의 교제 곧 온라인을 활용하고 대면 모임은 월 1회와 같은 방식이 도입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성찬을 미리 보내어 주고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이런 방식의 장점도 있습니다. 주일에 집중되던 성경공부나 다양한 모임이 분산되고 평일에도 교육을 한다거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것은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시대는 어떠했을까요?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읽은 말씀에는 사도들과 예루살렘 산헤드린과의 2차 충돌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충돌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넓게 살펴보겠습니다. 행 1:6-14절에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기다림 그리고 15절부터 26절까지 사도 맛디아를 선출하게 됩니다. 2장에서 성령의 강림과 그 결과가 나오는 시점에서 1차 충돌이 일어난 부분을 사도행전 4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박해에 사도들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도행전 5장에 이어서 2차 충돌이 일어나고 다시 일곱 지도자를 선출한 후 6장 8절부터 3차 충돌은 스데반의 순교로 곧 박해로 이어지는 과정이 점진적 확대, 확장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충돌과 박해에는 당시 종교 지도자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6절에서 예수님의 심문 장면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사도행전에서는 5:21절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모았다고 말합니다. 그때 등장하는 인물이 가말리엘 입니다. 가말리엘의 이름이 등장하는 장면을 볼 때 대제사장 가야바와 맞먹는 권위와 영향이 있거나 당시의 상황에서 주도적인 역활을 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다양한 종교 지도자라는 분들이 자신이 말하는 것이 맞다고 말하는 상황과 비교해 볼 만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말이 다 옳은 것일까요?
지금 우리는 누가가 말한 그것 바로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들 , 우리 중에 성취된 사실 ‘ 바로 가르침에 주목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어떠합니까?
최근 각 교단은 노회를 했습니다. 어느 노회의 가장 큰 이슈는 장로를 노회에 참여하는 문제였다고 합니다. 오히려 코로나 시대에 우리의 가르침은 어떠해야 하는가 였다면 어떠했을까요? 로마의 제국 아래 종교 지도자들은 협조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기 시작하신 모든 것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편승해 서로를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를 ‘정치의 종교화’로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이런 상황을 무시했을까요? 결론적으로 누가는 외부를 향해서는 기독교가 그렇지 않음을 변증했으며 내부적으로 가르침과 복음에 더욱 집중했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충돌과 박해라는 상황 속에서도 ‘성장’. 곧 ‘믿는 무리가 더’ 해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그런 교회의 모델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양면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바로 누가는 권위 있는 데오빌로에게 그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전달함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변증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변증에도 누가처럼 해야 합니다. 누가는 특별히 그의 권위에 맞먹는 가말리엘을 등장시켜 가말리엘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전하는 사도 그리고 사도의 복음 전파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호의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호의를 이끌어 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개혁의 시기에 있었던 전염병을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례는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비록 당시에 교회로 몰려온 많은 환자를 수용하고 이들을 위해 죽음까지 기꺼이 내어준 사랑은 분명하게 본 받을 만한 사실이지만 시대를 뛰어 넘어 오늘도 사용 가능한 예인가 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염병의 핵심은 전염력이고 전염의 기본은 사람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자들이 교회로 찾아온 상황에 그들이 모인 곳은 오히려 전염의 온상이 되는 것이 합리적 해석입니다. 따라서 그때의 시각은 찾아온 그들을 맞아주고 목숨과 맞 바꾸어 생명을 돌본 행위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안타깝게도 더 많은 사람에게 전염을 시켰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우리의 입장만 요구하는 것이 아닌 가말리엘의 입을 통해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가말리엘의 눈에 보였던 것처럼 교회는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 그 가르침을 받고 행한 교회 공동체는 내부적인 수가 더하는 성장 뿐만아니라 외부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대표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물건을 통용하는 공동체는 결코 예상했던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바로 ‘에클레시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로마 주권자에게 받은 놀라운 은혜를 에클레시아를 통해 누리고 있지 않는가? 여기의 주인은 로마의 황제가 아닌가? 우리에게도 주 ‘퀴리오스'가 있고 주님 아래에 있는 우리는 함께 물건을 통용하는 에클레시아를 누리고 있다. ‘ 로마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 에클레시아 그러나 누가는 더 나은 에클레시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누가는 ‘에클레시아'를 사도행전에서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 저자와 비교해보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누가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마태의 경우도 16:18, 18:17절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바로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에클레시아'를 신학적 용어로 차용하되 당시의 ‘일반적인 모임'을 가져옴으로써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변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공동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도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뿐만아니라 다양한 인터넷 상에서 ‘카페'와 같은 ‘동호회'라는 개념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임은 모임의 특성을 서로 공유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죠. 저의 경우 자전거 동호회에 소속이 되어 있는데 참여에 대한 규정, 운영 규정 및 실제 라이딩의 안전을 위한 참석 규정등은 매우 까다롭게 지켜지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 공동구매를 할 때도 있는데 특정한 제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 목적에 맞게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질문해보겠습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가입한 어느 동호회보다 더 높은 영향을 나타내는가? 아니면 동호회의 운영에 비해서 월등하게 그러면서도 투명하게 운영되는가? 이렇게 비교해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어떻게 그런 것(세상적인 것과 신성한 일)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요? 하면서 대단히 부정적으로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과감하게 당시의 ‘에클레시아'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더 나은 에클레시아를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에클레시아의 특별성과 보편성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미 살펴보았듯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 그리고 ‘가르침대로 행하는 곳'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잘 나타난 부분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입니다. 또 하나 특별한 것은 유대인들을 담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연속성 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전거 동호회는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 목적에 맞게 운영될 뿐입니다. 그러나 윤리적인 면은 오히려 교회보다 더 높은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대단히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특별성 만을 강조한 나머지 이런 사회의 높은 윤리의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대단히 안타까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이런 장면은 로마의 에클레시아에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보여주는 에클레시아에는 있었습니다.
최근 어느 치킨 집 사장님이 아이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시간이 지나 아이가 고마움을 본사에 편지를 보내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매를 대행해 결제를 해주는 ‘돈쭐내주자'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 사장님은 다시 이런 돈을 모아서 선행을 계속 이어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많은 양을 구매해서 지역 이웃을 도우려 하자 사장님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양이라 주변 동종 업체에 부탁해서 함께 참여하도록하는 말 그대로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온 백성의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칭찬 받아본 역사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코로나 전에 절기 헌금 전액을 이웃을 돕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랬더니 동사무소에서 교회를 홍보해주었습니다. 이런 수고와 공동체의 모습은 계속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누가는 에클레시아가 이런 보편성과 특수성을 갖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내부적으로 정체성은 구심력으로 외부를 향하는 보편성을 갖는 원심력으로 나타나 이 둘의 균형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점진적으로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백성 (헤 에클레시아 투 데우)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에클레시아는 예수를 주(퀴리오스)로 고백하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서로 물건을 통용한데'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내부적인 정체성을 구심력으로 본다면 외부적 곧 선교와 적극적인 변증을 원심력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그런 의도하에 기록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먼저 가말리엘을 특정함으로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변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면 당시의 상황은 오늘에도 분명 영향과 적용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는 로마 제국 하에서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아직 기독교라고 할 수 없는 초기 기독교의 상황 그런 가운데서 유대교 그것도 바리새적인 유대교가 로마의 주류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황으로 연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라는 종파 안에 다양한 교단이 그리고 교단 안에서도 지역별 노회들은 어쩌면 코로나 19로 인한 위기에 공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여러 일련의 행동이나 말들이 ‘기독교의 선교, 전도를 문닫게 한다'는 말로 설명하면 더 쉬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분명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그리고 다시 땅 끝까지 복음이 확정되어 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 묻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모든 환경이 ‘복음 확장'을 저해하는 요인인가? 아니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확장'되어 ‘믿는 무리가 더'할 것인가?
누가의 고민의 흔적은 특별히 예루살렘을 자주 언급하는 부분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의 139회 중 무려 90회나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59회나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특이한 지점 입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에서 말씀이 흘러 나오는 곳으로 선언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로마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로마라는 지명과 로마 사람을 의미하는 내용은 바울서신과 함께 22회나 사용되는데 누가는 그중 17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예루살렘과 로마를 통해 복음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땅 끝까지 이르게 되는지를 관심있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구약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성취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서 그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을 나타내시고 고난 받으신 후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고 땅 끝까지 이르는 복음의 사역을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 가신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런 신학적 용어를 우리 일상의 용어로 바꾼다면 예루살렘의 특수한 상징이 로마의 보편적인 상징으로 인식되어 구심력이 원심력으로 나타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흘러 나는 곳은 예루살렘이라는 특수성이 실현되고 나타나는 현장은 로마라는 오늘에 보편적 에클레시아로 나타났습니다. 누가는 끊임없이 원심력으로(선교) 나타나길 원했습니다. 그러하기에 더 강한 구심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을 경험한 사도들을 통해 다시 사도의 복음이 더 강력하게 전해지길 바란 것입니다.
요즘 허물어진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 때문에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드려지는 예배 그리고 주 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교제했던 수많은 모임들이 사라진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행한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래서 누가의 글을 통해 보편적 곧 원심력을 보면서도 실제 구심력에 집중하는 방식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누가는 선교를 방해하려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적대적인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14, 17,19, 20장에서 이들은 ‘주의 말씀'을 들으려는 무리를 보고 시기하여 비방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여기에 시기는 구심력 곧 우리의 정체성을 더 굳게하여 원심력 곧 선교와 믿는 무리를 더 하게하는 방식을 무뎌지게 합니다. 내부적으로는 구심력을 무너뜨립니다. 마치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팽이의 중심축은 굳건하게 보입니다. 외부의 충격에도 잠시의 흔들거림을 극복하고 다시 자리를 잡는 힘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힘을 일게 하는 것입니다. 외부적으로는 어떻습니까? 누가의 변증에도 불구하고 이런 충돌은 점차 박해로 변해갑니다. 로마의 정치적 힘을 이용하려는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키너라는 학자는 고위직에 있던 이들이 도시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서 유대교공동체를 대변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도시를 운영하는 자들과 함께 좇아내려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시기심은 구체화 된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초반부의 충돌은 이제 시기심을 먹고 자라나 외부 세력과 손을 잡고 박해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런 박해를 견디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구심력입니다. 그리고 그 구심력을 다시 돌아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들 우리 중에 성취된 사실 ‘ 그리고 ‘사도가 전한 복음'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런 복음은 에클레시아의 정체성이 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것이 바로 교회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입니다.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이제 적용해 보겠습니다.
분명 코로나 19로 인해 어려운 상황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과 성취된 것,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우리를 굳게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도와야 할 분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도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가게가 어려워진 형제와 이웃을 돌아보아야 하고 교회 차원에서 교회가 속한 지역에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규모가 적고 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일하는 목회자라는 커뮤니티에서는 서로가 품삯이 되어 일을 해주는 경우도 자신에게 잉여되는 물건을 통용하는 일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19가 빨리 해결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수고와 헌신이 선교로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은 충돌로 인해 시기와 박해가 더 심해졌지만 기독교가 자리를 잡는 긴 시간 동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신다는 기도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