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주인 예수님만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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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참 좋으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 2.좋은 목사님을 만나는 것 3.좋은 성도를 만나는 것 4.좋은 교회 더 정확하게는 좋은 예배당과 만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4가지 기도제목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4가지 기도제목을 모두 가지시고 세상과 교회에서 주님의 선한 영향력으로 칭찬받는 여의도침례교회와 특별히 국명호 담임목사님께서 한없이 부족한 이 종을 초청해 주신 감사 또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수난일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이죠. 고난주간의 가장 극적인 날인 금요일. 카톨릭 교회에선 성금요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두렵고 떨립니다! 제게 복음을 전하는 담대한 능력과 힘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렇게 복되고 좋은 자리에서도 (저는) 떨리는데 스데반 집사님은 죽음 앞에서도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고 순교하셨습니다. 오늘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믿음의 주인 예수님만 바라보자”(히 12:2)란 주제로 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진리이고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55절 말씀을 보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행 6:8, 10)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고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습니다. 스데반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성격의 죄목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스데반의 죄목은 1.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데 “하나님을 본다”고 신성 모독했고 2. 예수는 메시아가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거 했기 때문에 죽일 죄인이었고 3.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다고 했기에 이 역시 신성모독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층인(70명) 공회는 율법적으로 스데반 집사에게 합리적인 반론을 펴지 못했습니다. 성경적으로도 문제점을 찾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 칭찬받은 초대교회 일곱 안수집사 가운데 한분인 스데반 집사를 죽였습니다. 당시 공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이죠. 공회는 범법하여 스데반을 죽이고 면피하려고 본문 58절처럼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훗날 바울이 된) 청년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사도행전 6~7장을 보면 공회에 잡혀온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행 6:15) 했습니다. 또 공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대제사장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돌에 맞아 순교하기 직전까지도 흔들림이 없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무엇이 이처럼 강건하고 담대하게 스데반 집사님을 만들었을까요? 남들보다 특출 나서요? 아니면 우리 속담에 삼세지습(三歲之習)이 지우팔십(之于八十)이라고-(이를 직역하면)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데-세 살 때 겁을 잃어서요?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보통 사람들의 성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만을 바라보았기에 날아오는 돌멩이에 집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방관한 사도 바울은 훗날 자신을 가리켜 복음에 빚진 자 사랑에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복음에 빚진 자이자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 예수님만을 붙잡고 기도하십시다. 나의 신앙적 열심만으로 하는 행동이 분쟁을 일으키거나 이웃에게 혼란을 준다면 당장 멈추시기를 부탁합니다. 특별히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들에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신앙은 내 몸의 금목걸이처럼 액세서리가 결코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오늘 나의 믿음은 안녕하십니까? 믿음을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가까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15년 전 쯤 침례신문사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기만 초대목사님과 어렵게 성사된 인터뷰를 할 때입니다.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 방한 때 여의도교회 예배와 관련한 에피소드와 아파트 전도이야기 두 가지가 기억에 남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이 여의도침례교회에서 예배드린 긴박했던 전후 사정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들려주시다가 갑자기 그 독특한 미소한 함께 딱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시는데… 여러분들은 그 느낌 아시죠? baptist침례교인 deacon집사이자 sundayschool teacher주일학교 교사로서 주일에는 백악관 근무 보다는 교회에 가서 봉사해야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카터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성도가) 찾아와 예배드린 이야기 말고 복음전도 이야기나 합시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초대목사님께서는 전도하면 되는데 전도하지 않은 채 목사들마다 왜 우리(내) 교회는 교회부흥이 되지 않는다고 고민하는지 모르겠다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지금은 신고나 민원이 들어올 수도 있는 아파트 전도이야기를 해 준 기억이 강렬하게 제 뇌리에 지금껏 남아있습니다.
주님은 마6:21에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 보물은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내로남불 식 사랑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오직 스데반 집사처럼 예수님 한분이십니까?
여의도침례교회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뜨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국명호 담임목사님처럼 선교사로 나가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의 물질과 마음을 다해 기도함으로 사도행전 29장은 예루살렘교회처럼 안디옥교회처럼 에베소교회처럼 여의도교회가 계속 복음의 역사를 이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진리이신 구주 예수님만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지금처럼 시대가 악할수록 성령 충만하기를 늘 기도하시고 영적 분별력을 기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 가짜 치유 목회자들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주만 바라보십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강도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성경을 한번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27장에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4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가복음 15장 32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누가복음 23장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주님과 강도에 대한 특별한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20장 18절에 그들이 거기서(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가 전부입니다.
4복음서에 나온 주님과 강도에 대한 기록을 보니 마태와 마가복음의 저자는 강도가 함께 예수님께 욕을 했다고 적었고 요한복음에는 강도에 대한 내용이 없고 누가복음에는 주님을 알아본 한 행악 자가 예수님께 직접 낙원에 초대받은 최초의 사람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오늘 나는 교회나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한다고 하면서 강도처럼 내 일이나 삶이 잘못되면 예수님 탓, 습관적으로 남의 탓을 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잘되면 내 노력의 결과이고 내 머리가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진리이고 본질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스데반 집사님처럼 우리는 성령 충만하고 또 예수님만을 붙잡을 때 한 행악 자처럼 우리는 낙원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사물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신문기사를 읽을 때도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특별히 언론에 종사하는 모든 수습기자들은 “팩트fact 또는 팩트 체크했어”란 말을 3년 정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장 많이 듣습니다. 이는 모든 언론 종사자들의 공통된 이야기입니다. 피가로지와 함께 프랑스 최고의 일간신문인 르le 몽드monde지 역시 팩트 체크와 관련해 기자교육 북 가이드에 잘 담아 교육하고 있다고 배웠습니다. 바로 팩트 체크시, 한 가지 사실인 한 조각 만으로써가 아니라 모자이크 그림처럼 수많은 조각을 맞춘 최종 그림을 알려주는 것 즉 사실의 완성인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 언론인의 올바른 태도라고 가르친다는 겁니다.
단언컨대 초대교회 당시 스데반 집사의 순교 보도기사는 저주받은 십자가 처형을 받은 이교도의 괴수인 예수의 잔당들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는 맹신도 스데반이라는 작자가 여전히 예수를 선전하다가 똑같은 신성 모독죄로 돌멩이 즉결처형을 당했다고 독자들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본문 59절에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7가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4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각각 3가지 말씀이 기록돼 있고 마태와 마가복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를 번역한즉)“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마 27:46, 막 15:34)의 공통된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스데반이 말한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는 말은 시편과 누가복음 등에 나옵니다. 시편과 누가복음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숨을 거두기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마지막 말씀을 전하신 뒤 숨지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은 보통 믿음의 조상들이 하던 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말하지 않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후, 처음 기도가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라는 기도였습니다.-“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눅 23:34)-십자가 아래서 희롱하고 야유하는 자들의 행동에 대한 아픔을 자신의 육신의 고통보다 더 아파하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집행한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정말 몰랐을까요? 아니오. 어찌 보면 충실한 법 집행자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대속의 사명을 끝까지 완성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7절에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본문 60절을 보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주님과 똑같은 의미로 스데반 집사님도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1서 2장 15장과 16절에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위드with 코로나19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도들의 영적성장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세상에 보여주지도 않았다고 지난 한 해 교회의 역할과 함께 평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삶에 얼마나 많은 우상 숭배와 세상 사랑과 자랑이 자리 잡고 있는지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잘들 아실 겁니다. 내 삶은 예수님보다는 서울에 아파트 집 한 채 마련하고 내 자식 공부와 출세, 그리고 결혼과 승진이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니 이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되든 말든 이 문제들이 지나가면 소망이 없는 삶을 다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예수님은 내 머리에만 존재하고 거룩한 부담이 아닌 마음에 부담만 안겨줄 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당장 변하고 변질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를 우리에게 순교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셋째,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날마다 부활의 소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60절 후반부에 보니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라고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죽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별세했다’ 등으로 쓰지 않고 ‘잔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서시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죽었다는 통상적인 표현이 ‘잔다’라고 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주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도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고통보다는 부활하신 영광된 삶을 꿈꾸며 삽니다. 사실 우리들은 날마다 부활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일 깨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누가 잠을 자려고 하겠습니까. 깨어날 수 있다는 당연한 믿음이 내 안에, 내 삶에 있기에 오늘 밤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단순히 잠에서 깨어나는 일상적인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간증 겸 예화> 국정원 간부이자 청와대 행정관(NSC 요원)으로 파견 근무도 했던 주 안에서 나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육신의 형 최재영 집사도 나의 어머니 박계순 권사님께 어머니 왜 이렇게 잠이 오는지 깊게 한숨자고 다시 깨겠다는 말을 남긴 뒤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2014년 형이 갑자기 죽기 몇 달 전인 초가을 쯤 제가 체코선교사로 있을 때 형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 동생… 최 목사님. (나 : 왜요?… 형.)
: 하나 물어볼게 있어. 성도들은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고… 목사님이 죽으면 심판도 있다고 하던데. 내가 무엇으로 판단 받는지 모르겠어.
: 죽지도 않을 건데 그런 거는 무엇 하러 물어봐. 그래도 말 나온 김에 이야기하자면 형이 세상에서 이룬 자랑거리, 형이 가진 재산, 일류대학 졸업장, 표창장 등 이런 거는 다 필요 없고 예수 이름 하나만 있으면 돼. 심판관에게 예수님만 증거 하면 되니 아무리 죽어서 정신이 없다 하더라도 예수님 이름만 대면 OK라고. 꼭 기억해~.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신 스데반 집사님처럼 우리 모두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전하되 천국 소망을 품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세계선교를 촉진시킨 위대한 첫 걸음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스데반 집사를 비롯해 대동강변에서 이슬로 사라진 토마스 선교사,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흘렸습니다. 침례교단도 1944년 5월 10일.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의해 교단이 해체됐고 재산을 몰수(이종근 감목) 당했습니다. 1945년에는 제5대 감목이신 이종근 목사님께서 만주에서 공산당에 의해 순교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복음이 얼마나 값지고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순교자의 정신으로 믿음을 지키며 살기로 결단해야 할 시간입니다. 목숨을 바쳐 믿음을 지키는 여의도침례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스데반의 죽음으로 지금은 사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내일부터는 주님의 부활을 기대하는 우리 모두에게 승리의 시간입니다. 올 한해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교회를 꿈꾸는 여의도교회와 새벽을 깨워 기도회에 참석하신 예배 자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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