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신자반(이재철) - 6장 기도란 무엇인가?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리스도인의 특권, 기도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임을 밝혀 주고 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언제 어디에서든 자신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또 응답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특권이다.
기도의 특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을 위해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고 아름답게 살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기도의 특권을 자기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진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돈을 구할 수도 있고 건강을 구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구하여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할 때 기도는 미신의 도구로 전락한다.
미신과 바른 신앙의 차이는 인간의 변화 유무에 달려 있다. 미신은 자신의 변화에는 관심 없이, 자신이 가진 것으로 신을 달래고 얼러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마음이다. 그래서 미신은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욕망만 배가시킨다. 반면에 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에 맞게 자기 자신이 변화되려는 의지이다. 그 결과로서 참된 신앙인에게는 언제나 변화가 따른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변화 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 자기 욕망만을 이루기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은 무당을 찾아가 푸닥거리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간이 기도의 특권을 계속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남용하고 오용한다면, 그는 끝내 그 특권을 주신 하나님의 외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정말 구해야 할 것
우리가 우리의 애절한 문제를 주님 앞에 아뢰고 응답받는 것은 아름다운 신앙 체험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참된 믿음의 증거일 수는 없다.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고 자기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설령 원하는 것을 얻었다 해도, 그것이 참된 믿음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그런 응답은 무당을 통해서도 얻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신앙도, 기도도, 그 출발점은 항상 우리 자신이다. 나를 위해 믿고, 내 자식과 내 사업을 내가 원하는 대로 가꾸기 위해 기도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기심은 신앙의 출발점으로 쓰여야지, 신앙의 종착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주님을 찾고 기도하기 시작했더라도, 우리의 신앙과 기도는 그다음 단계로 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의 신앙생활은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초등학생이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초등학생으로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본문 속의 마지막 인물은 베드로다. 그의 장모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당시의 의술은 열병을 다스리지 못했다. 생명이 위독한 셈이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장모의 회복을 위해 단 한 차례의 기도를 드린 적도 없었건만 주님께서 친히 그녀를 고쳐 주셨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베드로가 주님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주님께서 그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응답해 주신 것이다. 우리가 다다라야 할 마지막 단계가 바로 이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단계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
기도의 제목 -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3).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데 맞추어져야 한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한, 내가 구하기 전에 내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 넓고 더 깊고 더 높게 누리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의식주의 노예 된 삶으로부터 자유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닫힌 기도와 열린 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라고 기도를 마무리 지으셨다. 예수님의 기도는 진정 열린 기도였다. 예수님의 기도가 단지 당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닫힌 기도였다면, 예수님께서 결코 만인을 위한 그리스도가 되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버리시고서야 그리스도가 되셨다.
우리는 주님 앞에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닫힌 기도가 아니라 열린 기도여야 한다. 내 기도를 관철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언제든지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대로, 자신의 기도를 기꺼이 버릴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이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만약 누구든지 자신의 기도를 끝까지 고수하려 하기만 한다면,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오류에 빠진 사람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경은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심을 밝혀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한 선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 뜻과 계획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아니, 우리가 그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께서 성부하나님께 기도하시며 우리를 돕고 계신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고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버리기 위해 열린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 순간부터 우리의 기도는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하늘 저 높이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기 위해, 혹은 저 높은 곳의 하나님을 자신에게로 끌어내리기 위해 기도하려 하기에 기도가 힘들다. 그러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위해 간구하시면서 나의 기도를 도우시는 주님을 만나면, 나는 그분의 기도에 동참하기만 하면 된다. 전혀 힘들 것이 없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관점으로 나를 살피면 나의 기도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나의 기도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님의 빛으로 조명하면, 내 삶의 가장 은밀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과 거짓마저 보인다. 그래서 우리 기도의 내용이 자발적으로 바뀌고, 그 결과로 우리의 삶이 교정되기 시작한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을 만나 그 기도에 동참해 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님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나 사무실에서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릴 때에도, 마치 셀든Charles M. Sheldon의 소설 제목처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다시 말해 ‘주님께서 지금 내가 어떻게 하기를 기도하실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좇아 행동한다. 바로 그 자체가 곧 기도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자신을 위한 주님의 기도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면서도 주님의 기도에 동참할 수 있고, 자동차 안에서도 동참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자체가 온통 기도일 수 있다.
이 장의 서두에서 제기한 세 번째 질문이 있다. 과연 인간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가?
옷깃을 여미고 기도의 골방에서 무릎 꿇는 것만을 기도라 한다면, 인간이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불가능한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 삶이 주님의 기도에 동참함으로써, 나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주님께서 내 속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나는 주님의 기도와 말씀 안에 거함으로써 나의 삶 자체가 기도가 되는 것이다.
기도의 궁극적 목적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1–12).
본문에서 유의해야 할 단어는 ‘그러므로’이다. 이 장의 결론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내가 무엇을 구하든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알았다면, 그 좋은 것 속에는 내가 구하지도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무 염려 말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라는 말씀이시다. 그것은 ‘사람을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본문에서 ‘그러므로’이하를 좀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이 너희에게 하여 주기를 원하는 모든 일을 너희도 그렇게 그들에게 행하라 이것이 율법서와 예언서(성경)의 핵심이다
내가 사랑받고 싶고, 내가 높임 받고 싶고, 내가 위함 받고 싶은 그대로 먼저 상대를 사랑하고, 높이고, 위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람을 사랑하며, 사람을 위하며,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살아생전 이 땅에서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그대는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다. 기도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위하여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며 당신의 기도 내용을 바꾸시지 않았던가? 돈을 구해도 좋고 지위를 구해도 좋고 성공을 구해도 좋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그대가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실천해 갈 때, 그대가 구하지 아니해도 그대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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