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오면(호 2: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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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지극히 혼자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나요?
혹시 외로움을 타시는 분 있으신가요? 우리가 무인도에 갔을 때 무엇을 챙겨 갈거냐는 질문들을 받곤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챙겨가면 좋을까요? 그 어떤 곳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면 그곳은 천국으로 변하게 됩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광야는 은혜의 땅이 됩니다.

반갑습니다. 시험기간을 지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인데요, 지극히 혼자인 것 같죠? 외로운 싸움을 싸워나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말씀 살펴볼까요?
우리 저번 주에는 하나님께서 간음한 이스라엘을 황폐하게 하고 가진 것을 모두 도로 거두시며 벌을 주시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에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해야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14절부터 호세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거친 들이 어디일까요? 광야입니다. 광야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 곳으로 데리고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곳은 또한 하나님께서 거칠게 만드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있는 곳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여러분, 광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광야는 말 그대로 매마르고 넓은 땅 말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됩니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길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곧 목말라서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극히 혼자이고 지극히 아무것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러한 광야의 시간을 겪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혹은 내가 지금 광야에 있다고 느끼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이 광야. 어떻게 보이시나요? 굉장히 부정적이지요? 소망도 없고 빛도 없는 곳인 것 같습니다. 외롭고 고독한 곳. 배고프고 추운 곳. 맞습니다. 이 곳이 광야입니다. 하지만 14절에 등장하는 배경인 광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타일러서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제 광야에는 누가 있지요? 지극히 혼자이고 또 고독한 곳이어야 하는 광야이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단 둘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광야는 혼자 있을 때에는 굉장히 암울한 곳이지만 둘이 있을 때에는 서로만을 볼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거친 들 그러니까 광야로 나간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제 서로만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계속해서 화를 내실까요? 너 이거 잘못했잖아! 너 혼자 광야에 있어! 나 집에 갈거야! 하시는 분이실까요?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그곳으로 데리고 간 이유는 위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받는 위로. 어떤 느낌일까요? 여러분 특별히 하나님께서 ‘말'로 위로하십니다. 여러분 여러가지 위로의 방식이 있겠지만 서로를 ‘말'로 위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은 조금 다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만물을 창조하실까요? 맞습니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의 말로 이스라엘을 위로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말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광야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힘들어 하는 자들이 있나요? 그들을 말로 위로해주세요. 그 위로가 그들에게 닿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도 역사하여 그들에게 참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세상의 위로는 영혼이 없이 그저 ‘말’ 뿐인 위로입니다. 사람들은 말의 능력을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로 사람들을 위로합시다.
여러분, 광야가 이제는 풍성한 은혜의 땅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광야는 슬프고 삭막하고 외롭고 고독한 땅이 아닙니다. 그 곳은 이제 하나님과 단 둘이서 독대하는 로맨틱하고도 은혜로운 땅이 된 것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까? 나만 힘든 것 같고, 혼자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까? 하나님을 찾으시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혼자서 걷는 광야가 아니라 하나님과 걷는 로맨틱한 길을 만드십시오. 그리하여 광야 길 가운데에 깊은 은혜의 시간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이어서 계속해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비로소, 드디어,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준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포도원을 어떻게 한다고요? 맞습니다. 돌려 ‘주는 ‘ 것입니다. 돌려 ‘받는' 것이 아니지요. 왜 돌려 준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원래 이 포도원의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은 바알의 것도, 고멜의 것도, 이스라엘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었지요. 이는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가져가시는 것 같을 때에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억 나시나요? 우리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을 때에 우리의 것을 돌려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의 뜻이 참 어렵습니다. 아골 골짜기가 무엇일까요? 소망의 문은 또 무엇이고요? 여러분, 성경을 해석할 때에 언제나 그 답은 성경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아골 골짜기를 찾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펼쳐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 7장에 보시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휘 아래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7장은 그 첫번째로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두 번째로 아이성을 정복하는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함락시키시고 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것이 있습니다. 그 땅의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에 따라서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나서 그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만, 이 제물에 손을 대고 맙니다. 하나님꼐서 이 사실을 모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셨지만, 별 탈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성을 정복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냅니다. 아이성은 여리고 성에 비해서 규모가 굉장히 작은 성이었습니다. 때문에 손쉽게 정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 걸요? 이스라엘은 아이성 사람들에게 대패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번 전투에서 지고 나서 사기가 확 꺾이게 됩니다. 여호수아마저도 두려움에 휩싸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데요, 하나님께서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할 물건들을 자신의 집에 놓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제비를 뽑으니 아간의 집이 나왔고 아간은 하나님의 것을 가져간 죄로 말미암아 그 은과 외투, 금덩이, 아들들, 딸들, 소와 나귀 양들과 또 모든 것들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돌 무덤에 묻히게 되는데 이 곳이 바로 아골 골짜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잠깐 살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간이 범죄를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제물들을 보고 ‘탐심'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내가 이 땅을 정복했으니 내가 가져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탐심이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아골 골짜기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소망이 있을까요? 저는 여기에서 끔찍함과 두려움만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곳이 소망의 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쏟던 맹렬한 진노를 돌이키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다시금 희망을 얻어 아이성으로 진격합니다. 이것이 소망이지 않을까요?
여러분, 아간이, 이스라엘이 왜 범죄했고 간음을 했을까요? 왜 고멜이 호세아를 두고 바람을 피웠을까요? 다름아닌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의 이유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바알을 숭배하고 하나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그들이 절기를 지키며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들은 그저 바알을 섬기면 받을 수 있다는 보상이 탐이 났던 겁니다. 더 큰 풍요가 가지고 싶었던 거예요. 고멜은 왜 바람을 피웠을까요? 다른 남자들이 진짜 다른 남자들을 사랑해서 바람을 피웠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철저한 환상일 뿐입니다. 고멜은 그저 탐심 때문에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다른 남자들이 나에게 주는 것들이 좋고 더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우상들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 우상들을 가지게 된 동기. 그러니까 탐심은 무엇일까요?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들을 아골 골짜기에 내려놓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곳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내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스라엘은 과연 빈털터리 일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선포합니다.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러분 어렸을 때에 어떻게 합니까? 무엇을 할 수 있었나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 해 주나요? 부모님과 주변의 도움을 받습니다. 때문에 어렸을 적에는 오히려 다 부족하지만, 부족함이 없습니다. 채워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한 번 살펴볼까요?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불평도 하고 어긋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필요가 채워졌을까요 채워지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필요는 다 채워졌습니다. 오히려 넘치게 채워졌습니다. 심지어는 광야에서 고기를 먹기도 했으니까요.
우리가 탐심을 내려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힘과 여러분의 지혜로 무엇을 할 수 있던가요?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었습니까?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띄워 주신 것입니다. 두 발로 걸을 수 있었습니까? 그 또한 하나님께서 걷게 하지 못하시면 걷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침 밥을 먹었습니까? 이 또한 하나님께서 씹을 힘과 소화시킬 힘을 주지 않으셨다면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무언가를 성취하셨나요? 여러분의 힘과 여러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지혜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외에 다른 것을 탐내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하세요. 하지만, 그러면서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모든 일에 동기는 내가 높아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아골 골짜기는 탐심을 넘어 소망의 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부족하지만 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 소망의 문을 통해서 소망의 길을 걸어 가 봅시다.

그 날이 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날'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그 날은 어떤 날일까요? 희망의 날, 회복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을 향하여, 이스라엘을 향하여,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희망의 날, 소망의 날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함께 그 날들에 대해서 한 절 한 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절 그 날에는 네가 나를 어떻게 부른다고 하나요? 내 남편이라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 바알이라고 일컫지 아니한다고 하네요. 여기서 바알이라는 단어는 ‘나의 주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바알은 동음이의어로서 두 가지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관계적인 측면입니다. 내 바알이라는 뜻은 나의 주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주종관계 그 이상의 관계를 맺고싶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를 신부삼아 주십니다. 더 이상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 그러니까 부부관계를 맺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언뜻 들어서는 감이 오질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시면 이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짐작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인이 노예와 친구가 되는 것이 쉬울까요?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가족이 되는 것이 쉬울까요?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주변에 신이라고 하는 존재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신과 친구가 되는 경우가 있을까요? 결코 없습니다. 신은 숭배의 대상이고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입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틀을 깨어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섬겨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부 삼아주십니다. 그리하여서 자격없는 우리를 위해 그 아들까지 희생하십니다. 이런 신을 찾아보세요. 단연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관계를 우리와 맺으시는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신부로 부르신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맞습니까?
두 번째로 17절과 관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알들의 이름 그러니까 여러 우상들의 이름을 입에서 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고 하십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보게 만든다고 하시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소망하기는 저 또한 이 땅에 그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너무나 악합니다. 많은 우상들이 세워지고 그 우상들에 절을 하는 자들이 많아졌어요. 항상 TV나 각종 매체들을 통하여서 소식들을 접하면 끔찍하고도 슬픈 소식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돈 때문에 혹은 인간관계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 탐심을 좇아서 입에 담을 수 없는 행동들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그 모든 우상들이 제하여지는 날에는 어떨까요? 저는 그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저와 여러분들의 입에서 또한 우상들의 이름이 제하여져서 오직 하나님만 말하고 하나님만 노래하는 입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8절입니다. 이번에는 그 날에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피조물들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로 함께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이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고 하시는 것을 창세기 그 때의 언약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언약'을 맺어주신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는다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군사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전쟁을 없앨 것이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에 누우십니까? 위험한 곳에서 누울 수 있을까요? 온라인클래스 중에 누울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지요.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때에 우리는 누워서 휴식을 취합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그 날은 이러한 날입니다.
19절에 하나님께서는 16절의 관계적인 측면을 한번 더 강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히 산다고 하십니다. 이제 2장의 전반부에서 느꼈던 이혼의 위협, 긴장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너와 사랑할 것이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그렇게 하실까요?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입니다. 그리고 20절에 보시면, 진실함으로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조금 더 나아져서 이전과는 달라져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시 결혼한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여겨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말'로 위로해주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공의로워요? 아닙니다. 정의로워요? 아닙니다. 은총과 긍휼을 받을만 한가요? 더더욱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다 여김을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렇게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프로포즈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알려고 백날 노력해도, 성경을 공부해도 말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공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습니다. 물론 성경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은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아는 사람들일까요? 저와 여러분이 성경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또 믿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이름들의 회복

21절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에 응답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하늘은 땅에 응답합니다. 또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가진 뜻이 무엇일까요?
하늘은 비를 내리고 그 비는 땅을 적셔서 식물들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식물들은 열매를 맺어 씨를 뿌리게 됩니다. 여러분 확인할 수 있는 친숙한 이름이 나왔습니다. 어떤 이름이지요? 맞습니다. 이스르엘입니다. 첫째 아들이었지요. 이 아들의 뜻은 무엇이라고 하였는지 기억나시나요? 지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뜻은 예후의 집에 갚을 피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씨를 뿌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르엘의 이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제 두 번째 이름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23절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를 이 땅에 심는다고 합니다. 땅에 심기는 것은 식물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 가운데 사람들을 심으십니다. 저와 여러분들 또한 이 땅에 심기운 하나님의 씨앗들입니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쑥쑥 자라 언젠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심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심었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이유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고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남은 두 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딸들도 기억하십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했던 자 로루하마를 이제 긍휼이 여긴다고 하십니다.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 로암미에 대해서는 이제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로암미도 암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의 대답이 있어야겠습니다. 이들은 뭐라고 말하고 있나요?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고 또 그들의 하나님이 되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또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의 때를 명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능력의 말로 위로하십니다. 이 때에 광야는 황폐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 둘만 있는 아름다운 데이트의 장소로 변하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의 말을 통해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포도원을 돌려주시며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우리 안에 탐심을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채우심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 날이 선포됩니다. 우리가 소망의 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그 날들은 실로 찬란한 날들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환난 중에도, 광야 가운데 있을 때에라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싸움이 끝나고 그 날이 올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라 부르시고 우리도 그분을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이전과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남편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아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복되고 행복한 한 주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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