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지킬 수 없지만 지켜야 하는 십계명

출애굽기, 십계명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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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8 수요기도회
찬송 276 216
기도 최숙영 권사
본문 롬7:21-23 (신p.248)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서론

우리가 그동안 십계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십계명 설교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10개 밖에 되지 않는 아주 간단한 명령 같았던 십계명이 오히려 10개가 아니라 그 의미들을 생각하고 확대적용할 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우리가 설교를 통해 다룬 부분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십계명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이 방대한 의미들을 과연 우리가 다 기억하고 지킬 수 있을까?’ 라는 거룩한 부담감에 사로잡혀 결국 십계명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우리가 이런 결론으로 나아가면 안되겠다. 물론 십계명이 우리에게 거룩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고, 믿음의 선진들이 남긴 유산인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을 통해서 십계명에 대한 분량만을 보아도 우리가 이를 위해 공부해야 할 양이나 주제도 매우 방대하며, 이를 단지 학문적으로 공부해야 할 것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이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적용하려는 노력들이 있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민족과 시대와 장소와 혈통을 막론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거룩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계속해서 십계명을 공부해야 하고, 이를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십계명의 원리 : 사랑

십계명 설교 첫 시간에도 말씀드렸는데, 십계명은 크게 2가지로 요약정리할 수 있으니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 두가지는 서로 구분되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의 주제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이웃들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함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결국 십계명을 지키는 중요한 원리는 단 한가지, ‘사랑’이다. 즉, 사랑이 있다면 십계명을 지킬 수 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 가장 큰 계명을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롬13:10 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무신론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만 예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제대로 부른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날을 삶으로 구별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권위에 복종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배우자만으로 만족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다른 이들의 것을 빼앗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족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의 명예를 해치지 않는다. 결국 사랑이야말로 십계명을 지키는 최고의 원리이다. 만일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 사랑이 없어서 이겠다.

우리는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럴 수 없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롬3:10 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말씀하시고, 롬3:23 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오늘 본문인 롬7:21-23 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외에도 성경은 죄로 인하여 부패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상태였던 아담은 어땠을까? 사람이 부패하기 전에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그에게 있었다. 당시 아담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과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을 함께 갖고 있었다.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을 살펴보면서 이를 아담이 가졌던 ‘원시적인 의의 상태’ 라고말씀드렸다. 그는 죄를 지을 수도 있었지만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의 순종으로 의를 이루어가야 했다. 이를 행위언약이라고 한다.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능력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했다.
그러나 그는 죄를 선택했다. 죄로 타락하며 죄를 안 지을 수 있었던 능력을 상실하였고, 죄의 상태로 부패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구원에 이르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은 죄에 오염되어 사망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수준에 도달 할 수 없다.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죄의 몸을 입고있는 이상, 우리의 행위로 의를 이룰 수 없다. 이는 오직 우리가 영화의 상태가 되었을 때, 즉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한 선을 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그 불가능하다는 십계명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가? 어쩌피 지키려고 해봐야 실패할 것이 뻔하다면, 죄로 부패한 우리에게 순종할만한 능력이 없는데도 굳이 그 계명을 지키려고 애써야 할 필요가 있는가? 어쩌피 실패할 것이 뻔한데 도대체 하나님은 왜 십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인가. 여러분 생각해보라. 우리는 죄로 인하여 순종할 능력을 상실했지만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권리를 상실하지 않으셨다. 내가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권세의 하나님이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십계명을 요구하시는 것이 부당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본래 사람이 행할 수 있도록 그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로 불순종함으로서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도 하나님의 선물을 상실하게 되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상태로 지어졌다. 그러나 그가 고의로 죄에 자신을 내어준 것이다.

그럼에도 십계명을 남겨두신 이유

그렇다면 이제 죄로 넘어진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 편에서 성취하기 불가능한 십계명을 이제 그만 거두셔도 되지 않는가? 어쩌피 불가능한 것을 이왕 우리를 배려하시는 김에 그냥 폐기하시면 안되었을까? 이왕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거 아예 십계명을 없던 것으로 하셨으면 안되셨을까? 여러분, 이런 생각이야말로 얼마나 교만하고 패악한 것인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한 죄인들이다. 그분을 떠나 죄를 선택한 반역자들이요 원수들이다. 지금처럼 하나님을 절대로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철천지 원수였다. 전능하시고 강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를 심판하셔도 우리는 아무런 할말이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아셨기 때문에 영원 전부터 복음을 작정하시고, 이 복음을 아담과 하와에게 원시복음으로서 친히 계시하시며, 이후 족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선포하게 하시고, 제사와 율법의 다른 의식들을 통해 예표하셨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을 통하여 완성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오래 참아주시고 긍휼히 여기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거늘 어찌 그런 패역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기억하기에 앞서 먼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속성은 바로 공의로우심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에 대하여 최고의 형벌인 몸과 영혼에 내리는 영원한 형벌로 처벌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순서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준엄하신 명령 앞에 도저히 그 명령을 지키지 못하여 지극히 공의로우신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 책망과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철저한 죄인이던 우리의 상태와 처지를 먼저 생각하라. 우리는 모든 순서들을 건너 뛰어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그리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구원도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율법을 남겨두신 그 첫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밝히 보여주고, 그에 비추어 우리의 죄악들을 깨닫게 한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우리의 무능함과 죄악된 본성들을 낱낱이 비춘다. 내가 부단히 노력하고 이루려 하지만 죄의 본성 때문에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나의 연약함, 나의 패역한 본성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서 두려워 떨게 만든다. 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을 만족시킬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두번째 목적은 죄를 억제시키는 용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왜 주셨는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기준으로 주셨다. 그래서 십계명을 다른 말로 도덕법이라고도 부른다. 십계명은 모든 세대, 모든 지역, 모든 민족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지켜야 할 영원한 도덕법이다. 여기에는 신자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포함된다. 누구라도 지켜야 할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부류의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먼저 불신자들에게 율법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죄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저들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죄악된 생각들을 감히 실행하지 못하고, 정욕대로 노골적으로 행하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단지 율법이 그들을 막지만 않는다면 어디서 무슨 일을 다 저지를 수 있을 상태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장차 임할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죄성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를 두고, ‘마치 굴레가 씌워져서 손을 움직여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되고 제멋대로 방자하게 활개를 치던 그들의 부패성이 속으로 가두어졌다’ 라고 설명했다.
율법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억제시키는 용도도 있지만 신자들에게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갈3:24 를 보면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한다. 율법이 초등교사가 되는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번째 종류는 앞서 말했던 세상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달아 그리스도께 나아옴이 일어나지 않는다. 재림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내버려두심을 당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회심이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두번째 종류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와 같은 신자들이다.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신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하여 죄인된 우리의 무능함과 그 어느 의 조차도 내 안에 없음을 깨닫고 우리의 중보자, 우리의 구원자를 바라보게 만든다.
아담 안에서 죄로 부패한 우리는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신 유일한 분이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분명 완전한 사람이셨다. 그래서 때로는 갈증을 느끼시기도 했고 주리시기도 했으며 슬픔을 느끼시고 긍휼히 여기셨으며 울기도 하셨다. 그런데 우리와 동일한 그분을 성경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말씀한다. 히4:15 말씀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 보통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데, 본문에 근거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단지 2천년 전에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믿으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셨고 율법의 모든 의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얻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전가받으니 오직 무엇으로 인해서인가? 엡2:8 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무엇인가? 우리를 위하여 의를 얻으신 그 분을 믿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에 감사하며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참된 신자들의 믿음과 삶이다.
세번째 목적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권고하기 위함이다. 이를 율법의 교훈적 용도라고도 하는데, 거듭난 저와 여러분들에게 아주 중요한 기능이니 잘 들으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에게 내버려두신 이유는, 우리에게도 율법이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율법이 신자들의 마음에 기록되고 새겨져 있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새로워져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상태에 있지만, 그럼에도 율법이 주는 유익이 있으니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권고하신다는 점이다.
특별히 신약과 구약에 기록된 율법은 신자들을 성화로 인도하기 위하여 풍부한 해설들을 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거듭난 신자는 성화 속에서 칭의의 열매들, 곧 감사와 순종의 행위들을 발견하게 되며, 십계명 율법이 사랑이라는 큰 주제로 묶여있었던 것처럼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까지도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19:7-8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라며 율법의 기능을 찬양하는 것이다.

결론

그렇기에 우리는 율법을,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계속해서 살펴야 한다. 듣고 배우며 익히고 삶으로 살아내어야 한다. 이것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할 수만 있거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선조들은 매주 공예배 중에 십계명을 낭독하며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믿음의 선진들은 십계명을 통하여 나의 죄인됨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고,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형벌이 있음을 기억하며,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고, 이 땅에서 십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일들이 성도들의 심령가운데 일으킬 수 있도록 계속해서 이 십계명을 신자들에게 설교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던 것이다. 왜? 십계명에 그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얼마나 가까이 하며 살고 있는가? 시편 119편의 말씀을 읽어드리며 말씀을 마치려 한다. 시119편은 대표적인 율법시로서, 시에 등장하는 율법, 율례, 법도, 증거 전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들을 가리킨다. 총 176절로 이루어진 긴 시이기 때문에 다 읽어드릴 수는 없으니 기도회가 마친 후 집에 가셔서 개인적으로 119편 전체를 묵상해 보시길 바란다. 이 시간 낭독할 구절은 시119:12-16 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을 기억하며, 그 율법을 힘써 지킬 수 있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한다.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들을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아멘.
율법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공의와 나의 죄를 깨닫게 하사 겸손하게 하여 주시길
나를 위하여 율법을 완성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믿는 믿음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길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답게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며 그 말씀이 날마다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 되게 하여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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