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마태복음 강해 36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69 views비판하지 마라에 담긴 주님의 뜻,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에 담긴 주님의 뜻, 대접한다에 담긴 주님의 뜻
Notes
Transcript
마태복음 강해 36
마태복음 7:1-12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에 담으세요.
---------------------------------------
*** 다음주 기도는 김기숙 사모입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김춘기 집사(2일), 장인순집사(6일)
오늘은 마태복음 7:1-12을 본문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에 담으세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루기 전에 마태복음 5장에서 6장까지를 간략하게 다루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열(십계명)이라는 율법을 넷으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살인하지 말라, 둘째는 간음하지 말라, 셋째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넷째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였습니다. 그리고 그 넷을 사랑으로 결론지으셨습니다. 그 아가페, 사랑이란, 열(십계명)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진리)’로 깨달아, 먼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자신이 알고 그 ‘하나’를 이웃들에게 전해주어 그 하나이신 생명의 주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마태복음 5장의 결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하나이신 생명의 주인을 전해 줄 때에 주의해야 할 것들을 나열해 주신 것이 6장입니다. 그래서 6장의 첫 단어가 ‘주의하라’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엇을 주의하라 하셨습니까? 구제를 할 때에 왼 편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오른 편의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내적인 것으로 구제를 하라 하셨습니다. 왼 편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 말씀입니다.
구제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긍휼이나 자비’를 가리킵니다. 그것을 올바로 깨달아 마음으로 가지면 ‘마태복음 6장에서 말하는 구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적극적인 긍휼과 자비를 올바로 깨달은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 전해 주어 하나님을 알게 하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구제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기도의 문제였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 사람이 그 하늘의 뜻대로 아버지를 마음으로 영접하여, 그 아버지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가는 생명의 존재가 되어 그 아버지의 뜻이 ‘옳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그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웃들에게 흘려주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기도입니다.
따라서 그 기도라는 것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은밀한 것으로 해야 하는 것이고, 성전의 골방 안으로 들어가 말씀으로 드려야 되는 것이며, 중언부언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올바른 기도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 버리는 힘이 있는 것이요, 죄를 사함받고, 악에 빠지지 않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번째가 금식의 문제입니다. 금식이란, 밥을 굶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천국에 가면 반드시 먹어야 할 것은 먹고 그때 안먹는 것을 잠시 내려놓는, 그래서 천국 백성으로 반드시 먹어야 할 것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절대 먹지 않는 양식을 먹지 않으면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이 금식입니다. 주님은 올바른 금식을 하기 위해서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머리에 무스를 바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장례 지낸다는 것이고,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말씀의 표피를 잘 닦아서 그 안의 내용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먹어야 할 것을 먹을 수 있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먹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웃에게 그 양식을 구제(엘레에모수네)로 넘겨줄 때에 올바른 양식으로 넘겨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하늘의 보물과 땅의 보물의 문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올바로 깨달아 먼저 하늘들이 되고 그 안에 그 말씀을 담아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땅 적 차원으로 말씀을 이해하여 땅의 행위와 땅으로서의 사람들의 가치 자랑에 그 말씀을 이용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땅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의 보물로 그 안에 담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하늘의 보물인 것입니다, 그 말씀을 땅의 것으로 그 안에 담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땅의 배설물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눈이 성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새 눈을 주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육신적인 필요에 말씀을 당겨다 쓰면 그게 나쁜 눈인 것입니다. 눈이 성한 자는 그 마음에 빛이 들어와 있는 자요, 온 몸이 어두운 자는 어두움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눈이 성한 분들이 한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요, 그들은 이 땅이 염려거리로 가득 차 있지만 마음이 나누이지 않고 오직 하늘 아버지만 바라보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염려 문제 하나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염려를 해결하는 방법을 기도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염려하고 나서 기도를 하면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 염려를 해결하는데 만약 은행가서 해결할 문제라면 기도안하고 은행갑니다. 기도안하고 병원갑니다. 기도안하고 친구찾아 갑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게 기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많은 방편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려도 안하고 기도도 안하고 사는 방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린아이들처럼 부모님을 믿으니까, 전혀 걱정없이 사는 것처럼 그런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5-6장의 흐름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1-12절의 본문에는 크게 세 가지 주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시면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그러므로 초점이 비판하지 말라가 아니라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그리고 두 번째 주제가 7절부터 나오는데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즉 기도에 관한 것이 두 번째 주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12절인데 함께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2절은 내용이 대접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세가지 주제는 비판, 둘째, 기도, 세 번째는 대접에 관한 주제입니다. 이 세 주제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를 할 수 있는데까지 나누어 이 주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가 이 세 주제는 언뜻 보면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주님은 이 세 가지 주제를 통해 우리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첫 번째로 비판의 문제입니다. 우선 1절을 봅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비판은 건전하고 건강한 분별력 있는 비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비판은 괜찮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아굴라 브리스길라부부가 나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고 아볼로가 에베소 교회 목사로 사역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그러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살며시 들어가서 아볼로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볼로가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비판은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비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거만한 태도로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 사랑의 관심없이 정죄하는 것을 뜻합니다.
로마서 2장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2:1-3입니다.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방금 읽은 로마서 2:1-3절 말씀이 무슨 뜻인가하면 당시에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지도자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은 무죄, 다른 사람들은 유죄라는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지적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자기들은 자기들이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놓고 바울은 너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절대로 피할 수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정죄하고, 거만한 태도로 내려보는 것이 곧 비판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왜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사람들이 왜 그럴까요?
이들은 자기들의 인생의 주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비판하지 마라에 참 진의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전한 비판, 건강한 분별을 하지 마라는 것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서, 우월한 자리에서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평가하고, 지적하는 것을 금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6장에서 배운대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을 마태는 이방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방인의 반대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들입니다. 이분들은 자기들의 인생과 삶을 아버지가 책임진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있기에 절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1절에 비판한다라는 것은 줄자로 재어 본다는 뜻이구요, 2절을 보시면 헤아림이 나오는데 그 말은 저울에 달아본다는 뜻입니다. 왜 교회에서 다른 사람의 행위와 삶을 저울에 달아보고, 자로 재보는 가요? 마태복음 5장 말미에 나온대로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묵상해 보세요.
예수님은 3년을 공생애로 보내시면서 한 번도 사람들의 신분에 따라 재보거나 달아본 적이 없습니다. 시몬의 집에 가서도 죄많은 여인이 향수를 부을 때도, 배를 타고 건너면서도 누룩이 없다는 말씀을 하실 때에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데려가 놓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돌로 치려 할 때도 주님은 사랑으로 덮어주셨지, 자로 재거나 저울에 다는 행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3-4절을 보세요.
3절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내로남불’입니다. 여기 들보는 집을 지을 때 대들보를 말하구요, 티는 나무를 대패로 깍아 낼 때 일어나는 작은 나무 조각, 부스러기 등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30살 이전까지 아버지의 직업을 도와서 목수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3절에 형제가 나옵니다. 형제와 나는 사랑으로 묶여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되어요? 다른 사람에게 있는 작은 결점은 엄중하게 검열하면서 자기에게 있는 큰 결점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작은 어려움을 고치려 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큰 문제를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
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외식이 뭐지요? 다른 성경을 보면 위선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6장 전반부를 배울 때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외식한다라는 것은 가면을 쓰고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겉은 그리스도인, 속은 세상 사람이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외식은 모든 삶의 기초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맞추어 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가치와 사람들의 시선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과잉이 나오고, 과열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보는 시선이 아주 중요합니다.
누구죠? 율법교사들,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이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자기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 율법의 잣대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일을 밥먹듯 하는 이방인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비판이란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창세기 50장에 보면 이런 말을 요셉이 합니다. 요셉은 인생자체가 혼란자체 였습니다. 그런데 어제까지 히브리 노예요, 죄수였는데 오늘은 갑자기 바로와 방불한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에 무시무시한 기근이 들고 그 기근이 고향땅까지 기근이 들어 형들이 대제국 바로 앞까지 양식을 구하러 옵니다. 그런 형들을 보고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50:19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이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었던 인생사를 겪으면서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라고 형들을 위로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비판이란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는 겁니다. 아주 무서운 죄입니다. 특별히 지도자들, 안다는 사람들이 이런 죄를 잘 범합니다. 절대로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면 안됩니다. 그런 자들을 6절에서는 개, 돼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개 돼지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면서 여전히 말씀을 자기들의 검으로 생각하고 휘두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겸손합시다. 겸손은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에 앉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개와 돼지와 우리는 속성이 다릅니다. 다만 겉모양은 같습니다. 그래서 개, 돼지는 귀중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복음의 가치를 모를 뿐만 아니라 복음을 더럽게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험에 빠트리고,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들을 향하여 사귀지 말고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고하십니다(마 10:14).
노아시대를 보시고, 롯의 시대를 보세요.
아무렴 노아시대 의인이 하나이겠습니까?
그러나 한 명 있기 때문에 한 명만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롯의 시대를 보세요. 그러니 딱 롯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지닌 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곧 밭에 감추인 보화 발견하는 심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백부장을 만나서 감탄을 하신 것입니다.겸손하시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는 복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큰 두 번째 기도의 문제입니다. 7-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그를)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성경에서 가장 오해받는 구절 중 하나가 바로 방금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는 딱 봐도 방금 읽은 본문은 기도에 관한 구절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을 읽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를 내 방식대로 생각해서 기도란 끈질김이다라고 해석을 해 버립니다. 물론 기도에서 끈질김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절대로 기도의 열심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로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구원보다 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구원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구원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일부의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것 보다도 구원을 가치있고, 귀하게 여깁니다.
바로 이들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구하면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찾으면 찾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두드리면 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하나님과 일대 일의 관계, 개인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사람들, 이들에게만 특별은총이 제공될 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복음 7:7이하에서 이들을 ‘너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구하라고 되어 있지만 그러나 원어로 보면 ‘너희는 구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는 너희입니다. 너희는 왼편에 속한 자들이 모르는 오른편의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는 자들인데 너희라면 구하고, 너희라면 찾고, 너희라면 두드려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기도의 교훈 속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얻어질때까지, 찾아질때까지, 열릴때까지에 강조점이 있지 않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너희는 아들이요, 하나님은 너희들의 아버지라는 겁니다.
보세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목적어를 없애버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문을 두드립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좋은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9-10절에서 너희들이 악한 자라고 하더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들이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당연히 주시지 않겠느냐고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주님은 아들인 자들에게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좋은 것만 구하지만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 더 좋은 것, 진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며, 나를 향하여 큰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보면 이 더 좋은 것을 성령님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처음 받게 되는 성령님이 아니라 은사와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이십니다.
9-10절을 보세요,
어떤 부모도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지 않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하였지만 참 부모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우리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광야에서 먹을 것을 달라는 자녀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고기를 먹게 해달라는 자녀들에게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이 좋은 아버지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 목표는 아들과 땅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것에 대한 동경이 잇었고, 그리움이 있었고 흔들림이 잇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의 불가능한 나이에 그는 얻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정착할만한 땅에 정착을 했고, 당당히 이삭을 얻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사람, 어려서부터 장자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내가 왜 뱃속에서 조금 일찍 나오지 못했던가? 나는 왜 형의 발목을 잡고 나와서 동생이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는가? 아버지도 어머니는 모르는 형과 거래를 했습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장자의 명분이 사실화 되었고, 장자의 호적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열두 아들이 나왔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꿈이 있었습니다.
모든 형들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그에게 절을 할 것이라는 뚱딴지 같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꿈이 현실화 되었습니다.
모세라는 사람, 비록 한때는 열렬한 해방의 뜨거운 열정이 잇었지만 인간적으로 실패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거의 인생을 마무리 할 때 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지팡이처럼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지팡이 같이 쓰임을 받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방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어려서부터 가나안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에게는 이스라엘 왕국이라는 당당한 나라의 꿈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 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구하고, 찾을 때 하나님은 구하게 해주셨고, 찾게 해 주셨습니다. 그 꿈이 그들에게는 전부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었고, 그 믿음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이 전부였고,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품을 수 있는 최대의 꿈이었습니다. 불가능의 요소가 얼마든지 산재해 있지만 그 요소는 하나님의 거침돌에 불과했습니다. 그 거침돌을 다 뛰어 넘어 그 꿈을 일구어 내었습니다.
찾으라 얻을 것이요, 무엇을 찾던지 간에 그 시대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그 꿈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노아에게는 방주였고, 아브라함에게는 땅과 아들이고, 야곱에게는 이스라엘 민족이고, 모세에게는 출애굽이고,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땅 정복이고, 사무엘에게는 이스라엘 왕국이었지만 그들에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구체적인 하나님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소박한 하나님의 나라, 너무 허황된 꿈이 아니라 내 손에 잡을 수 있는 내가 품을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누가복음에서는 성령님이라고말씀하십니다. 야고보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믿으십니까?
비록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 구하니까 실망하고, 답답하고 , 그러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정말 더 좋은 것을 성령님을 통해 주십니다. 이것을 다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대접입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의 내용을 이어서 결론을 내려주는 접속사입니다.
그래서 12절은 앞의 기도의 내용을 결론지어 설명을 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12절 말씀이 좀 복잡합니다. 여러분 12절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기도응답을 빨리 받으려면 남에게 대접을 잘해야 된다 그런 말인가요? 아닙니다.
12절을 정확하게 해석을 해야 합니다.
12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든지’입니다.
이 무엇이든지를 원어로 바꾸어서 신약에서 검색을 해보면 24회가 나왔습니다. 몇 구절만 간략하게 말씀드립니다.
마태복음 13:44절에서는 무엇이든지가 모든 것들로 나옵니다.
마태복음 28:20절을 보면 주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로 나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4:29절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여기서 모든 일이 바로 무엇이든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7:7을 보시면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여기서 다가 바로 무엇이든지입니다.
그러므로 12절의 무엇이든지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엇이든지로 바꾸어 번역을 해 놓으니까 돈도 되고, 떡도 되고, 이것 저것 사람들이 원하는 것으로 다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한다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 구주로 대접을 하는 분, 영접하는 분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요? 과연 그리스도 예수를 그분으로 대접하고 있는지요?
창세기 18장에 보면 세 천사가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칠려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강권하여 그들을 시원한 나무 그늘로 데려다가 귀한 음식을 대접합니다. 지금 그 말씀이 생각나서 마 7:12을 이렇게 해석했지만 대접이라기 보다는 그정성과 그 간절함을 상대방이 받아서 그 마음만큼, 그 자세만큼, 그 수용력 만큼, 그 믿음만큼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세 천사가 와서 무엇을 합니까?
첫째로 명년 이 맘때쯤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만 하고 가셔도 되는데 아브라함이 너무도 극진히 대접을 하니까 안해도 될 사실을 말씀을 하십니다. 소돔성에 대해서...사실상 아브라함에게 아들 약속을 꼭 해주셔야 될 말씀이지만 소돔성에 대한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세가 어떠냐에 따라서 말씀이 내용과 양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몸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왜 하나님이 저렇게 애달프게 우리에게 사정을 하십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답답해서요,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말씀이 내게 오면 목숨을 내 걸고 내게 적용을 해야 합니다. 말씀은 내게 있지만 생활 속에서는 이성을 적용합니다. 말씀은 내 속에 있고, 실제 현실 속에서는 타협을 합니다. 즉 이성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화가 안됩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영육간에 계산을 해보아서 수지맞는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영적인 삶이 수율적으로 더 이익이라는 것을 체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신 분들이 바로 믿음의 선조들입니다.
찬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