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가정
골로새서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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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과 인사
환영과 인사
예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우리 좌우에 계신 분들에게 ‘평안하세요’하고 인사 나눕시다.
네 감사합니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얼어붙게 한 듯 보이는 오늘날이지만, 세월이 흘러 벌써 가정의 달 5월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진리임에 분명합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성년의 날 등등 5월은 많은 날들을 통해 우리의 삶에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5월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고 예배와 교육, 성경적 삶의 요람으로서의 가정이 건강한 지를 점검하는 그런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주제
성경의 주제
오늘은 특별히 어린이 주일입니다. 계획대로라면 오늘 예배를 어린이들과 함께 드리고자 했습니다만 현재 상황은 아이들 주일학교조차 교회당에서 편하게 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내년에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래서 요나 묵상을 조금 뒤로하고 이번 주와 다음 주에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대해, 그리고 부모 공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함께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성경은 가정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라고 알려 줍니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결혼 곧 부부에게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건강한 부부를 통해 건강한 자녀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자녀들을 건강하게 양육하는 가정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성경 여러 곳에서 부부의 관계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강조들을 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이 가정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중요한 교훈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건강한 가정의 출발이 되는 부부, 곧 결혼에 대해서, 그리고 자녀를 향한 부모의 소명에 대해 함께 묵상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부모를 향한 자녀의 태도는 다음 주일에 교리 문답을 통해 함께 확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언급하기 이전에 먼저 부부의 관계를 가르칩니다.
사도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언급하기 이전에 먼저 부부의 관계를 가르칩니다.
가정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 이전에는 성도를 향해 구원의 은혜를 보이신 아버지의 사랑을 언급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새 자녀가 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연약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한 자녀가 된 성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는 이단들도 교회 안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일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를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 안에서 교회의 하나 됨의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 원리가 가정에서도 풍성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교회와 가정은 하나 됨의 원리 안에 세워진 기관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됨의 원리는 그 자체로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하나 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내려놓음이 한 쪽만 계속해서 내려놓고 다른 쪽은 계속해서 자신을 주장하게 되면 병든 공동체가 됩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는 특별히 부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양자 모두가 돌아가면서 자신을 죽이는 비결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부부 관계의 메시지를 먼저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 18, 19절입니다.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여기에서 사도는 아내와 남편 모두에게 교훈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말에 순종해야 하고, 동시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결혼 관계의 키워드들입니다. 만약 이 말씀을 가지고 남편이 아내에게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쟎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이야’라고 말하려면, 자신이 먼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가파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마음,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피크라노’라는 말인데 이것은 ‘쓴 맛을 안겨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쓴 맛을 갖지 않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아내에게 내 말을 잘 들으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 나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남편의 말에 내가 잘 순종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여성들의 눈에 남자가 항상 철이 없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나이는 들어가는데 남편은 여전히 철없는 아이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남편을 존경하면서 그 말을 존중해 줄 때 남편이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내 뜻을 계속 관철시켜 버리면 그 남편은 더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남편이 나와 잘 대화하고 내가 남편의 말을 잘 경청하는지, 아니면 말 들을 때마다 가르치고 있는지 잘 분별하시고, 말의 습관과 태도를 새롭게 하셔서 좋은 부부의 관계, 건강한 결혼 관계를 잘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부부 관계, 곧 건강한 결혼에 대해 왜 사도가 이렇게 강조합니까? 그것이 바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부모의 최고의 선물이고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온갖 좋은 것을 주려고 노력을 합니다. 보기에 귀하고 적절한 일입니다. 자녀를 위해 희생하면서 좋은 학교 보내 주려고 애쓰고, 좋은 교육만이 아니라 좋은 환경에서 자라려고 자기 방도 마련해 주고 환경도 잘 꾸며 주려고 합니다. 2017년 자녀 양육비 산정표를 보면 부부 합해서 600만원 정도 수입 가정에 초등학생 1명, 중학생 1명 자녀를 두었을 때, 자녀 양육비가 269만원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비율로 보면 거의 45% 정도가 아이에게 드는 돈이에요. 물론 교육비만 아니라 주택이나 차량 운영이나 등등을 생각해 보면 자녀에게 이 보다 더 많은 비용을 사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에게 엄청난 양을 쏟아 붓고 있는 2021년 한국사회의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사랑하는 부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 가난한 분들은 이런 기준표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월수입이 200만원 이하인 가정에서는 동일한 조건에서 자녀 양육비가 150만원이 조금 넘습니다. 여기는 거의 75%가 자녀 양육비에 사용된다고 해요. 돈 버는 대로 다 아이 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좀 나은 사람들보다는 훨씬 부족한 금액을 아이에게 쓸 수밖에 없쟎아요. 그렇다면 우리 아이가 불행해지는가?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것을 이기는 최고의 비결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녀는 사랑하는 부부 안에서 건강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전제로 사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자녀에게 먼저 요청을 합니다. 우리 20, 21절 말씀을 같이 봅시다.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는 자녀들에게 부모를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음 주일에 좀 더 깊이 묵상하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만 오늘은 우리 자녀들이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순종을 가정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부모님들도 자녀들에게 순종을 가르쳐야 하고,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우리 자녀들이 헌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너무 무례하고 버릇도 없고 자기만 생각하는 경향이 깊어지는 데는 이런 가정 교육의 부재가 큰 원인입니다. 오늘날 학교는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학교는 기술과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긴 하지만 도덕과 윤리를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합니다. 학교가 공적 기관이 됨으로써 하나의 도덕과 윤리를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고, 고작 철학 교육 정도가 가능한데 그것도 제대로 안되고, 역사 교육은 더더구나 학교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역사 해석과 인식의 차이를 공공 기관이 아무렇게나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제부터는 참된 교육의 장인 가정이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의 세대가 했던 것처럼 좋은 학교에 연결해 주는 것이 아이가 잘 되는 길이 아닙니다. 좋은 학교란 부모의 가치관과 신앙관을 공유하며 그 자녀가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기관이지, 서울대학교에 몇 명 보냈느냐는 것으로 판단하는 학교가 좋은 학교가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가정이 제일 좋은 학교이고, 부부가 아이들에게 제일 좋은 선생님입니다. 앞으로 교회를 통해 좋은 부모로 양육 받으셔서 참된 가정을 이루시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환경과 교육인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를 가르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환경과 교육인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를 가르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21절을 한번 더 읽어 봅시다.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오늘 이 말씀에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정서적인 문제로서 분노와 낙심과의 관계입니다. 사도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것은 부모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분노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분노는 무엇일까요? 흔히들 분노는 나쁜 것이냐 좋은 것이냐를 따지긴 하지만 사실 분노는 정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의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분노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분노하냐고 따집니다. 하나님은 감정을 잘 다루시고 감정을 절대로 표현하지 않는 완전히 이성적인 분이어야지 왜 하나님이 ‘기’에 눌려서 화를 내냐며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분노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분노라는 것은 경계선을 넘어 들어 왔을 때 그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분노가 없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경계선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내 것을 가지고 가는 데도 화를 안내고 그냥 보고만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는 셈입니다.
제가 상담을 했던 목회자 자녀 중에는 이런 사연을 가진 친구가 있어요. 조금 각색을 했습니다만 대부분 사실이에요. 초등학생 시절이었습니다. 어린이 날 학교에서 나누어 주는 색연필 12색 다발을 집에 가지고 왔어요. 너무 기뻐서 그것을 책상에 잘 보관하고 가족들에게도 자랑을 했어요. 내 색연필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 기뻤어요. 그런데 주일날 우리 아빠가 목사님이니까 동네에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어린이 날 선물을 준다면서 내 색연필, 처음 내 것이 되어서 아직 한 번도 안 써본 그것을 들고 가서는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 줘 버린 거예요. 나는 너무 화가 났지만 아빠가 농촌의 목사로서 수고하는 줄 알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날 종일 마음 상해하면서 보낸 거예요. 이 아이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자기가 좋아 하는 것을 가질 수 없고, 그렇게 하면 나쁘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은 항상 안 좋은 것을 선택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항상 마음이 낙심이 심하고 우울증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담을 통해 이런 마음의 고통이 있는 것을 찾아내고, 화 내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너의 것을 지키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해 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분노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지나치게 때를 쓸 때, 혹은 자신의 것을 양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강제적으로 그것을 빼앗아서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일에 사용해 버리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연히 차근차근 아이가 동의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어야 하고, 안되면 내가 해야 하는 좋은 일을 포기해야 합니다. 아이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좋은 일을 하게 가르쳐야지 하면 아이는 크게 낙심을 하게 됩니다. 사도는 자녀들이 크게 낙심하지 않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아이의 목소리도 들려지게 하고, 그 아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들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런 삶을 자녀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야 하는 방향이 강제적으로 아이에게 시행되지 않도록 자녀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말씀을 통해 그것들을 스스로 이루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분노하게 되고, 그 결과는 낙심의 길로 젖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격려하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교훈에 대해 사도는 다른 말로 에베소서에서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을 봅시다.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골로새서에서 사도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중심으로 교훈을 했지만, 에베소서에서는 해야 할 것을 중심으로 가르칩니다. 여기에서도 사도는 먼저는 자녀들이 분노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칩니다. 대신에 자녀들에게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교양과 훈계라는 말은 ‘파이데이아’와 ‘누떼시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KJV는 ‘파이데이아’ 즉 교양을 nurture로 번역합니다. 즉 영양분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건강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영양분을 말합니다. ‘누떼시아’는 훈계, 영어로 말하면 ‘instruction’ 혹은 ‘admonishment’를 말합니다. 가르침입니다. 사도는 특별히 이 두 가지 교양과 훈계가 모두가 예수님의 것이라고 제한을 합니다. 즉, 자녀를 양육할 때 부모는 주님이 주셨던 그 영적 양분을 가지고, 주님의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그 훈계들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녀를 방치하면 안 됩니다. 자녀의 교육을 다른 사람에게만 위탁해서도 안 됩니다. 자녀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직접 양육해야 합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정말 많은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에게 말씀을 직접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다른 집 아이들 가르치느라고 제 아이들을 제대로 못 가르쳤어요. 그래서 올 해는 휴가를 하면서 저녁 시간에는 성경 개론 강론을 하려고 합니다. 휴가 가서 공부한다고 하면 짜증들을 내긴 하겠지만, 그래도 저녁 시간에 맛있는 것 좀 사주고 용돈도 좀 주고 해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등에 대해서 같이 공부하는 시간을 좀 가지려고 해요. 방법이야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 성도들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녀들을 가르치되 노엽게 하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과 훈계로서 자녀들을 잘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함부로 하는 것에 대해 결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누가복음 18장 15-17절을 같이 보십시다.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른들은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의 대화에 끼이는 것에 대해 무례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이 데려온 이들은 어린 아기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범위를 좀 더 확대하셔서 어린 아이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아이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아이들을 어른들의 모임에 참여시키지 않는 것만이 아이를 잘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견딜 수 있는 시간만큼은 말씀을 듣게 하고, 주님과 가까이에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겸손히 받을 때 천국이 그런 사람의 것이 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부모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면서 그 아이가 가진 그런 순수한 마음들을 다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마음과 그런 순종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하나님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는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도는 성경을 믿고 가르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디모데 후서 3장 14, 15절을 봅시다.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렇죠. 부모가 자녀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은 곧 내가 내 영혼을 위해 하는 바로 그 일입니다. 성경을 통해 배운 그 내용을 마음에 믿음으로 확신을 갖고 붙잡고 자녀에게 그 은혜를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자녀에게 성경을 이야기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사들을 포함하여 모든 부모님들이 다 9월부터 시작하는 2학기에 더 많이 지원하셔서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번 2학기에 지원하시는 분들이 많으면 교사 아닌 분들은 제가 직접 가르치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사분들은 우리 최승래 목사님이 지도를 하실 것이구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게 좋은 부모였던 내 부모님을 내가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보내신 아들 예수님을 내 마음의 구주로 내가 깊이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사랑은 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내 자녀를 나를 위해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그 아이를 향한 소망을 따라 양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5월 가정의 달을 주님을 더 깊이 만나고 그래서 참으로 자녀들을 선히 양육하는 귀한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559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