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3 더리버 새벽예배 (왕하25:27-30)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
본문
서론
ㅇ 본문과 관련있는 예화 혹은 성경이야기
요시야의 죽음 이후 유다가 애굽과 바벨론의 간섭과 침략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멸망해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① 여호아하스(왕하 23:31–35)
여호아하스는 23세에 유다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불과 3개월을 다스렸다(왕하 23:31). 요시야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역대상 3:15에 보면 “요시야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하난과 둘째 여호야김과 셋째 시드기야와 넷째 살룸이요”라고 했다. 그런데 요시야가 죽자 넷째 살룸이 왕이 되었다(렘 22:11). 이 살룸이 여호아하스이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을 당시에 애굽의 느고가 유프라테스로 진격하여 앗수르와 연합하여 하란을 공격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바로 느고는 당시 리블라에 임시 본부를 설치하고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에서 자신의 지위를 굳게 하기 시작했다. 그 조치의 하나로 느고는 불과 3개월 통치한 여호아하스를 수리아 리블라(Riblah)에 자리잡은 임시 본부로 소환하여 왕위를 박탈하고 애굽으로 끌고 갔다. 여호아하스는 거기에서 죽었다(왕하 23:31–35; 참조. 렘 22:10–12).
② 여호야김(왕하 23:36–24:7)
여호야김은 25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1년간 다스렸다(왕하 23:36). 애굽의 바로 느고는 여호야김을 세워 애굽의 봉신으로 세우고, 은 100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공물로 바치게 했다. 그래서 여호야김은 느고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 세금을 많이 부과했다(왕하 23:33, 35). 게다가 그는 지금까지의 궁전에 만족하지 않고 많은 재물을 소비하고 백성들에게 부역을 강요하여 궁전을 크게 지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압제하여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왕하 24:4; 렘 22:13–19). 그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여호야김의 행동을 책망하며 심판을 예언하였다(렘 22:18). 그래도 여호야김은 선지자 우리야를 죽였다(렘 26:20–23). 그는 또 예레미야도 죽이려고 하였으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로 살았다(렘 26:24; 36:26). 이뿐만 아니라 여호야김은 예레미야가 받은 계시의 두루마리를 빼앗아 찢어 불사르기도 했다(렘 36:23).
여호야김의 통치 아래에서 요시야 시대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이 수포로 돌아갔다. 브라이트(Bright 1981, 326)가 지적한 것처럼 요시야의 비극적인 죽음과 거기에 뒤이은 유다의 고통과 굴욕은 개혁 뒤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언약의 말씀을 부정하는 쪽으로 갔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언약의 말씀대로 회개하고 개혁했는데도 약속된 말씀대로 재앙을 막아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방의 관습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렘 7:16–18; 11:9–13). 윤리도 타락했다(렘 5:26–29; 7:1–15). 다윗과 맺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 성전과 도시와 나라는 안전할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기도 했다(렘 5:12; 7:4; 14:13 등). 여기에는 당시 거짓 선지자들도 큰 역할을 했다.
갈그미스 전쟁 이후 느부갓네살은 핫티 전 지역을 장악했다. 이때에 여호야김은 바벨론의 봉신이 되어 3년을 섬겼다(왕하 24:1). 그러나 여호야김은 주전 601년경에 바벨론에게 조공을 거부하고 다시 느부갓네살에게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 이후에 느부갓네살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이듬해 한 해를 군대를 재조직하는 일로 보냈다. 이로 보아 이때 바벨론이 승리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 이에 고무된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은 그의 치명적인 과오였다(Bright 1981, 327).
이 일이 유다에 임하게 된 것에 대하여 저자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유다를 물리치시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므낫세의 지은 죄와 그가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려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왕하 24:3–4; 참조. 왕하 21:12–16).
(5) 여호야긴(왕하 24:8–17)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라 불과 3개월 10일 동안 왕위에 있었다(왕하 24:8; 대하 36:9). 왜냐하면 이듬해 주전 597년 3월 16일에 느부갓네살이 침공해 와서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왕과 모후, 고관들, 지도층 인사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왕하 24:10–17). 이때에 선지자 에스겔도 포로로 끌려갔다(겔 1:1–3).
바벨론 서판은 느부갓네살이 제7년 기슬래월에 핫티 땅을 향하여 출발했다고 말한다(주전 598년 12월 18일–597년 1월 15일).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주전 597년 아달월 2일(3월 16일 토요일)에 함락시켰다. 예루살렘 왕은 포로로 끌려가고 새로운 왕을 세웠다.
여기서 사로잡힌 왕은 여호야긴을 말하고, 느부갓네살이 선택한 왕은 여호야긴의 숙부이며 요시야의 아들인 시드기야다.
(6) 시드기야(왕하 24:18–25:21)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삼촌이었고 본래의 이름은 ‘맛다니야’(Mattaniah)였다. 느부갓네살은 그를 왕으로 삼아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쳤다(왕하 24:17). 그는 21세에 유다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1년간 다스렸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이 되어 그의 봉신이 되었는데도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었다(왕하 24:20; 대하 36:13). 그가 왜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예루살렘에 반(反)바벨론파들이 지배하였던 것 같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처음에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일시적으로 철수한 듯하다(렘 37:3–5).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반바벨론파들이 힘을 얻어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고, 실제로 당시 에돔과 모압과 베니게의 여러 나라들이 반바벨론 동맹을 형성하려고 했다(렘 27:1–3; 겔 21:18–23).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와 여러 차례 협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렘 37:3–10, 17; 38:14–23). 예레미야는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왕이 살게 될 것이라고 권고했다(렘 38:17–18).
그런데도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은 반드시 예루살렘을 지키실 것이고 바벨론에 잡혀간 동포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는 두 해가 가기 전에 하나님이 꺾어 버리실 것이라고 했다(렘 28:1–12). 그들은 ‘평안하다’라고 외치며 여호와께서 그의 성전을 반드시 지키신다고 했다(렘 7:4). 이 상황에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말을 거부하고 반바벨론파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바벨론을 배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그가 봉신(vassal)으로 세운 시드기야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시드기야 9년 10월 10일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왕하 25:1; 렘 39:1; 52:4). 이때는, 곧 주전 588년 1월 15일이 된다(틸레 1990, 265–266).
이듬해(주전 587년) 예레미야는 유다 왕 궁중의 시위대 뜰에 있는 옥에 갇혔다(렘 32:1–2). 이때는 시드기야 10년이며, 느부갓네살 18년이다(렘 32:1). 시드기야는 항복하고 싶었지만(렘 38:14–23) 그렇게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주전 587년 7월에(왕하 25:2f.; 렘 52:5f.) 도성의 식량이 바닥나자 바벨론군은 성벽을 뚫고 들어왔다. 시드기야는 군사들과 함께 밤중에 아라바 길로 도망갔지만 여리고 부근에서 붙잡혀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 끌려갔다. 시드기야는 자기의 아들들이 처형되는 것을 목격해야 했고, 자신의 눈알도 뽑혀 앞을 보지 못한 채로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거기에서 죽었다(왕하 25:3–7; 렘 52:7–11).
본론
ㅇ 주제와 관련 있는 문제제기 (원인과 결과)
ㅇ 해결방법
그런데 열왕기서 저자는 마지막으로 바벨론으로 옮겨진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37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 즉위 원년에 여호야긴을 옥에서 나오게 하고,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벗다’(쉬나, שִׁנּא֩)는 ‘바꾼다’라는 의미로 시편 127:2에 ‘잠’이라는 용어와 같다. 이 단어는 신분을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이것은 저자가 열왕기서를 희망적으로 끝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집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삼하 7:14–16). 이러한 이유에서 마지막 기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말씀을 배반하여 심판을 받아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어도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이행하시기 위하여 역사 가운데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빛이다.
유다의 멸망의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버리므로 바벨론 포로라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다 멸망과 관련된 주변의 나라들인 애굽이나 바벨론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계하여 바르게 세우기 위해 역사 가운데 잠시 사용하신 도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역사 중심에 언약 백성이 있고, 신약 시대에는 교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서 저자는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면서 구약 시대 언약 백성이나 신약 시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제사장 나라로 사는 길은 언약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