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세요(눅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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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렇게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음에 참 감사한 밤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그리고 교회에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오늘 이 밤도 저의 입술을 통하여서 성삼위 하나님만이 드러나시며 온전히 영광과 높임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에게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또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이 어린이 날이었습니다. 어린이날 잘 보내셨나요? 부모님들은 자녀 분들을 잘 섬겨주셨습니까? 자녀분들과 부모님께서는 그 섬김을 잘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주 토요일인 5월 8일이 어버이날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 섬김을 받은 우리 어린이들은 받은 넘치는 사랑으로 부모님을 섬겨드리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공교롭게도 자녀와 부모님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혹시 초등학교 시절에 집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큰 마음을 먹고 가출을 단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이 나를 싫어하는데 내가 굳이 이 집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었던 모양입니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이라는 당찬 어린의 희망찬 발걸음도 잠시 저는 곧 광야에 내몰리게 됩니다. 배가 고팠고 돈은 없었습니다. 결국 나간 지 몇 시간이 안 되어 저는 집에 들어오고야 말았습니다. 그 때에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던 부모님께서는 제가 들어오자마자 씻고 밥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려 식사할 때에 그들을 정죄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 돈, 아들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돌아온 탕자’라고도 알려져 있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친숙한 이야기를 보며 나는 좀 덜 심한 가출을 했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쉰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한 아들이 가출을 단행하고 집을 나가 고생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안아주셨다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친숙하기에 발견하지 못했던 은혜들이 있지는 않을까요? 함께 말씀을 나누며 그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또 그 은혜로 함께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평안할 때일수록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눅 15:11-13)

특별히 저는 두 관점으로 나누어서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관점은 ‘아들'의 관점입니다. 이 아들은 두 아들 중에서 둘째입니다. 성경에 써 있지 않음으로 우리는 이 둘째 아들의 나이나 됨됨이를 알지는 못하지만 본문의 내용으로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청년이였을 것이며 말썽쟁이였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속을 썩이던 이 둘째 아들이 하루는 아버지께 작정하고 이런 요청을 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가지신 재산 중에서 제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내게 주소서.”
언뜻 읽으면 이해가 될 수도 있는 요청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좀 나누어 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 요청은 굉장히 무례하고도 자식으로서 하면 안 되는 요청이었습니다. 당시 문화를 반영해서 풀이해보면 이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가지신 재산 중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내가 상속받을 땅 있잖아요, 그거 좀 저한테 미리 주세요.”
그러니까 이 사고뭉치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받을 땅 그러니까, 유산을 미리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분깃은 땅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땅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땅을 분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땅은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직접 분배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 땅은 소유자가 죽은 뒤에야 그 기업을 잇는 자 즉 아들에게 상속되어졌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사유 이외에는 마음대로 사고 파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요구는 아버지가 죽었다 치고 자신에게 물려질 땅문서를 달라는 다소 황당한 요구인 것입니다. 논외로 아들은 땅을 얼마나 받았을까요? 신명기 21장 17절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들을 보면 그는 아마 아버지 재산의 1/3 정도를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무례한 행동에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놀랍게도 그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는 결정을 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어땠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나누어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이제 땅 문서를 받은 둘째 아들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해 보겠습니다. 땅 문서를 받은 둘째 아들은 그 땅 문서를 팔아 현금화를 한 것 같습니다. 이 일들은 며칠만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판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고 동시에 아버지 사후에 결정 가능한 문제였습니다. 그는 절차와 관습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팔아 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며칠이 안 되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잠깐이었지만 가출의 경험이 있는 저는 둘째 아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아마도 부모님의 그늘을 떠나서 내가 하고싶은대로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잔소리와 간섭을 떠나서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는 자유의 삶을 그는 갈망해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저와는 달리 경제적 능력까지 갖추어졌습니다.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는 아마도 답답한 집을 떠나 자신을 공감해주고 함께해주는 집단과 함께 어울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이제 가슴부푼 꿈을 안고 바로 짐을 싸 먼 나라로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둘째 아들이 받고 팔 수 있었던 분깃 그러니까 땅 문서는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당연히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내 손에 들어왔으니 아버지의 것이 아닌 내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땅문서를 팔아 집을 떠날 생각에 자신을 걱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 불효자식을 마음 속으로 욕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저희 학생부 예배 시간에는 ‘호세아'라는 구약 성경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오늘날로 치면 목사님이니 ‘호세아 목사님의 사모님이 글쎄 바람둥이래. 참 불쌍하기도 하지.’라고 수군거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라.’ 하나님께서는 호세와와 고멜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세아와 고멜의 부부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마냥 이 불효자식을 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둘째 아들을 향하여 마음껏 혀를 차며 불효자식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말씀이 부담이 되어서 벗어나고 싶었던 적은 없으신가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었던 우리의 물질, 달란트, 시간 등을 가지고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내가 잘 해서, 내가 노력해서 얻게 된 것이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혹시,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던 것을 팔아 얻은 것으로 하나님의 품을 떠나 먼 나라를 향해 신나게 가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언가를 얻었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삶이 조금 평안해졌을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둘째 아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악함이 있습니다. 때문에 조금만 긴장을 늦추어도, 조금만 평안해져도 눈 앞의 즐거움을 좇아 그 즉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됩니까? 둘째 아들의 삶에서 볼 수 있듯 아버지와 그 가정의 사랑이 잔소리와 간섭처럼 느껴지고 집을 나가서 살고싶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면 내가 하고싶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이 때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서의 말씀처럼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것이며 내가 손에 쥔 것이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알 때에 우리는 비로소 헛된 생각을 버리고 그것을 은혜로 여기며 허랑방탕한 데에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또 하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세상 돈으로 환산하면, 그 기간이 얼마만큼일지는 모르겠지만 흥청망청 쓸 정도로 많은 것이었음을 봅니다. 아들에게는 딱 1/3 정도만 양도되었는데도 말이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능력 또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속의 아버지는 한정된 땅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그 한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그 능력을 감사함으로 받아 마음껏 누리되,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십니다.(눅 15:14-19)

이제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떠납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낭비해버립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나라에는 흉년이 들게 되지요.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가 궁핍해졌다는 설명에 비로소라는 말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치 그가 궁핍하기를 기다려온 것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처럼요.
두 주 전 일입니다. 아마도 SNS를 통해서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열심히 준비해 놓은 설교 파일이 통째로 지워져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으로 새벽 세네시까지 열을 올려서 썼던 설교원고였습니다. 설교를 써 놓고 저는 제 자신에게 고생했다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습니다. 주일에 지하철에서 설교 원고를 체크하려고 프로그램을 켰는데 갑자기 모든 기능이 멈추더니 내용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동저장이 되고 동기화까지 되어버리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저는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하나님 저를 왜 광야로 모시나이까.’ 그리고 낙망하고 무너지던 제게 단 하나의 생각이 스쳤습니다. 아, 내가 이 때에서야 하나님을 찾는구나. 비록 원고는 다 날아갔지만 그 때에 비로소 저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설교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광야로 내몰린 아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제가 그랬듯 아버지께로 돌아갔을까요? 물론 아들은 이 때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 번즈음 해 보았을 것입니다. 돈도 없고 흉년이 들어 먹을 것도 없으니 별다른 기술도 없는 이 둘째아들은 먼 타지에서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일거리를 찾아보자는 선택을 합니다. 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요? 첫 번째로는 무슨 낯짝으로 돌아갈 수 있겠냐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아직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는 직업을 구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그 직업은 ‘돼지치기’였습니다. 여러분, 돼지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짐승인지 아십니까?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 11장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들을 말씀해주시는데 이 중에 돼지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때문에 돼지를 키우지 않았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이었던 그가 돼지를 치는 돼지치기까지 했다는 것은 이미 처절하게 무너진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까지 버려가며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해서 그의 삶이 해결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저 잘 곳만 겨우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이었던 그가 부정한 동물인 돼지가 먹는 먹이까지도 먹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존엄성마저 잃은 그는 이제 절망합니다. 하지만 이 절망이 과연 절망이었을까요?
이 절망의 순간, 그에게 비로소 떠오른 존재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 그에게 떠오른 존재는 바로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아버지 집에서 가장 낮은 대우를 받고있는 하인들이 생각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가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아들은 회개를 하고 돌이켜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려 합니다. 아들이 이 말을 총 두 번했습니다. 여러분, 첫 번째 그가 했던 말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로 시작합니다. 다분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향성을 찾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는 아버지 집으로 ‘아들'로써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에 ‘취업'을 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부자관계의 회복이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둘째 아들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는 어떤 때입니까? 설교가 완전하게 준비가 된 때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 평안하게 살 때일까요? 그러면 물론 참 좋겠지만 우리는 보통 우리가 가진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게 선택지가 하나라도 있을 때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말입니다. 아이는 처음에 어떻게든 혼자서 그 잘못을 바로잡아보려 노력합니다.분명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욱 더 나빠져 갈때에, 나를 도와줄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을 때에 아이는 어른을 찾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어른을 찾듯 우리도 그 때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에 둘째 아들이 그랬듯이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정작 주목해야 할 점은 눈 앞에 놓인 상황의 해결이 아닌 하나님과의 어그러진 관계인데도 말입니다. 아들은 지금 아버지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에 대하여 통곡을 하며 회개해야 마땅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이 때에 마저도 품꾼이 되어 자신의 상황을 해결하는데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아들이 해야 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진심어린 회개였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부자관계에 대한 회복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어쩌면, 품꾼이라도 되기 위해서 옮기는 발걸음조차 그에게는 큰 용기였을지도 모릅니다.
소망하기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물질과 능력을 잘 관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여 오히려 그것을 의지하고 낭비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랑으로 우리를 궁핍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고집 부리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죄책감에 내가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더욱 더 어려운 상황 가운데 빠지기 전에 우리 돌아갑시다. 하나님, 내가 품꾼이라도 되겠습니다.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임이었음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우리의 발걸음을 집을 향하여 옮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수치를 몸에 입은 아버지가 있습니다.(눅 15:20-24)

이제 그 시선을 아들에게서 떼어 아버지께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방탕하기로 유명한 아들이 땅문서를 요구하고 그 땅을 팔아 멀리 나간다는 말을 듣고서 아버지는 왜 말리지 않으셨을까요? 그만큼 아버지께서 생각이 없으셨을까요? 첫째 아들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아버지가 이 둘째 아들을 가만히 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둘째 아들의 발걸음을 막았다면 아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을까요? 과연 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막으시는구나. 감사하다. 하고 생각 하였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때문에 아버지는 기꺼이 자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나가는 아들을 바라볼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랑일까요? 사랑입니다. 어떤 사랑이냐면, 자신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속박으로 여긴다면 기꺼이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겁니다. 참 어려운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 어떻게 아들에게 작용하는지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전에 발걸음을 돌려 아버지께로 행하는 아들의 행색에 대해서 한 번 생각보겠습니다. 들에서 돼지나 치던 아들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그가 입고있었던 옷은 다 해어졌을 겁니다. 그가 신고 있었던 신발 또한 다 해져서 맨발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가 씻을 수나 있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돼지냄새를 비롯한 악취들이 났을 겁니다. 또 오랜 굶주림에 그의 눈은 생기를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의 몸은 어떨까요? 야위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 나락까지 떨어진 거지 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더 이상 예전의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떻게 합니까?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아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측은히 여겨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 더럽고 냄새나는 목을 안고 파리한 안색의 그의 얼굴에 키스 세례를 퍼붓습니다.
여러분, 이 대목 참 은혜롭지요? 하지만 이 때 당시의 문화를 살펴보면 알게되는 두 가지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이 때 당시의 사회에서는 케차차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케차차라는 의식은 밭을 이방인에 판 사람 혹은 가문에 수치가 되는 사람들을 공동체에서 끊어내는 의식이었습니다. 질그릇 항아리에 태운 콩과 옥수수를 채워서 그 사람에 앞에서 깨뜨립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가 백성들 가운데서 끊어졌다라고 선포하면 그는 더 이상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게 되는 의식입니다. 여러분, 집으로 돌아가는 둘째 아들은 그럼 언제 마을에 들어섰을까요? 그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아마 사람들이 자고 있는 시간이나 모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들어가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아버지가 매일같이 탕자를 기다렸다고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 말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럼 왜 아버지가 그렇게 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을까요? 다름이 아니라 만약 아들이 돌아온다면 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새벽이고 저녁이고 나가서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것을 알고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 아들을 잘 알았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가장 잘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수치를 당하고 백성 가운데 끊어지는 것을 결코 원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들이 아버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제 멋대로 살 때에 아버지는 노심초사하며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흉년 가운데에 돼지를 칠 때에도 아버지는 노심초사하며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돌아가 아버지 밑에서 품꾼으로 생활하면서라도 살아야겠다 생각할 때 아버지는 노심초사하며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사랑한 것은 언제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큰 은혜는 아버지가 측은히 여겨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반가운 아들을 보면 당연히 뛰어서 달려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만, 당시 사회에서 명망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발을 보이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고 합니다. 때문에 항상 자신의 발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뛰지 않았습니다. 마치 조선시대의 양반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적 관습에서 금지된 수치스러운 행동을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합니다. 기꺼이 아들을 위해서는 체통없고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서 대신 그 수치를 담당합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아들을 안아야만 했습니다. 그 아들을 안고 아버지는 내 아들을 구했다는 기쁨에 아들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그 냄새나고 더러운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수치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가장 먼저 안으셨습니다. 어떻게든 저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세상에서 뒹굴고 더럽고 냄새나는 우리를 안으셨습니다. 또 그것에서 모자라 더 나아가 뽀뽀까지 해 주십니다.
아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준비했던 멘트를 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을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여러분, 아버지를 만나기 전 아들이 준비한 말과 아버지의 품에 안겨 뽀뽀세례를 받으며 하들이 하는 말은 같은 말일까요? 단어는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다를 것입니다. 이전에는 살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죄송함과 죄책감과 몸둘 바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오는 진심의 말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을 붙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그 말을 하도록 두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의 입을 막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해어진 옷은 제일 좋은 옷으로, 해어진 신발은 새 신으로, 그리고 손에는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반지까지 끼우라고 말입니다. 제 생각이지만 당연히 목욕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배가 고픈 아들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파티를 열어줍니다. 누가 봐도 거지였던 아들의 외관은 이제 둘째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찾았노라고 선포합니다.
여러분, 탕자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들이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들이 돌아와도 아버지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아들이 백성 가운데 끊김받고 죽음을 맞는 비극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할 필요가 없는데도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아들이 자신의 가슴에 못을 박아도 그를 사랑하고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고 망하는 길을 가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왔을 때도 자신이 당할 수치를 무릅쓰며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다시금 그리스도인의 신분, 하나님의 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돌아온 탕자이야기 속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땅으로 가출합니다. 그는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재산이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의 소유가 아님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삶이 평안할수록 그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아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들은, 철저하게 빈털털이가 된 후에야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품꾼이라도 되기 위하여 돌아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지했던 것들이 무너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은혜입니다. 그 때에 지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희생으로 아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아들이 그러하였듯,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용서받을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백성 가운데 끊김을 받고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예수님을 대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수치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세리와 죄인들도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평생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삶을 살다보면 우리는 끝없이 탕자가 되고싶은 유혹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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