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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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을 붙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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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요한계시록 2장 8-11절
제목 :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론
오늘 우리가 살펴볼 편지는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요. 서머나 교회가 위치한 서머나는 화창한 날씨와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로마인들은 휴양지로 서머나를 즐겨 찾기도 했죠. 오늘 날로 표현하자면 ‘몰디브’, ‘하와이’ 정도를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이처럼 아름다운 환경을 가진 덕분에 서머나는 당시 관광 산업이 굉장히 발달했어요. 그로 인해 서머나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벌었어요.
서머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어요. 소아시아 수많은 도시 중에 서머나는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은 도시로 소문난 곳이었어요. 당시 황제 숭배 신전을 유치하기 위해 15개의 도시가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그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서머나가 당당하게 황제 숭배 신전을 유치했어요. 그뿐만 아니에요. 추운 겨울에 로마 군인들이 서머나 근처에서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서머나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겨울옷을 수거해서 로마군인들을 도와줬어요. 이처럼 서머나는 로마에 절대적인 충성을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로마가 보기에 서머나가 얼마나 예뻐 보였겠어요? 그래서 로마는 막대한 경제적인 혜택을 서머나에 주었죠. 그로 인해 서머나 시민들은 부요한 삶을 살았죠.
하지만 모든 서머나 시민들이 부요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서머나에 살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삶을 살았어요. 그 사실이 9절에 나와 있어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왜 기독교인들은 환난과 궁핍의 삶을 살았을까요?
먼저 환난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죠. 여러분 여기서 환난은 헬라어로 “들립시스”라는 말이에요. 이 말의 의미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 아래 짓눌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 말의 뜻대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리는 삶을 살고 있었어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서머나는 소아시아 지역에 그 어떤 도시보다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도시에요. 대부분의 시민들이 로마 황제를 절대적인 신으로 믿고 섬겼다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길 수가 없었어요. 그런 기독교인들이 서머나 시민들에게 얼마나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겠어요? 그래서 서머나 시민들은 ‘로마 제국에 가장 충성된 도시’라는 타이틀을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기독교인들을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발견하는 즉시 당국에 밀고했어요. 그렇게 해서 색출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재산은 몰수되었죠. 그 당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삶을 생각해보세요. 마치 수십, 수백만대의 CCTV 앞에서 감시 받는 삶을 사는 것 같지 않았겠어요? 오늘 본문은 24시간 내내 감시 받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삶을 ‘감당할 수 없는 무게 아래 짓눌리다’라는 뜻을 가진 환난이란 단어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뿐인가요?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궁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에 쓰인 ‘궁핍’이라는 단어는 극단적인 극빈의 상태를 의미해요. 서머나 시민들은 장사를 하며 대부분 생계를 유지했는데요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인협동조합인 ‘길드’에 가입했어만 했어요. 그런데 이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바로 로마 황제를 “내 주여”라고 고백해야만 했다는 거예요. 일단 길드에 가입하고 나면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큰 경제적인 혜택을 받았어요. 반면에 길드원이 되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었죠. 이처럼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 것 하나 때문에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하루하루 고된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사도 요한의 편지의 내용이 들려와요. 이 편지에서 예수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의 모습으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찾아가셨어요.
“처음이요 나중이요”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역사의 시작부터 마지막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허락 없이는 공중에 나는 새 하나도 떨어질 수 없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예수님의 허락 아래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예요. 이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서머나 교회 교인들에게 한없는 위로를 주었을 것이 분명해요.
왜요?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로마 황제가 역사의 주관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길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의 막강한 권세 앞에 손쓸 수 없어서 자신들이 환난과 궁핍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에게 잠시 자신들을 맡기셨을 뿐이라는 거예요.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처음과 나중이시며 예수님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들의 운명이 악한 로마 황제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 믿음이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었을까요? 이 믿음이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잖아요. 이 믿음이 예수님을 더욱 간절히 붙잡게 만들잖아요. 이 믿음이 예수님을 누리게 만들잖아요.
(적용)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살다보면 꼭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아요. 예상치 않은 불행과 힘든 일들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불행이 예수님도 손 쓸 수 없는 우연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주권 아래 일어났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것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큰 위로를 얻게 될까요? 고통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주권자 예수님께 나아가게 만들잖아요. 예수님을 더욱 붙잡게 만들잖아요.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선하신 성품을 소유하고 누리게 만들잖아요.
내게 일어난 불행이, 아픔이, 슬픔이, 고난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가지 않아요. 그저 아픔과 고통을 시간에 맡기며 아물기를 기다릴 뿐이라는 거예요. 세상 친구들은 고통을 잊기 위해 게임해요. 술 먹어요. 담배를 펴요. 하지만 우리는 달라요. 내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이 예수님께로부터 온 일을 믿는 친구들은 주권자 예수님께 나간다는 거예요.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려 이 고통을, 이 아픔의 의미를 예수님께 묻는다는 거예요. 예수님 왜 제게 친구 관계의 고통을 허락하십니까? 예수님 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아픔을 허락하십니까? 여러분 고통의 시간 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고통을 토로할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이며 힘이에요? 그것뿐만 아니라 고통을 통해 예수님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에요.
아마 서머나 교회 성도들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악한 로마 황제의 권세를 속히 물리쳐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거예요. 그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위로하심과 선하신 성품을 마음껏 누렸을 거예요. 그런데 그들을 짓누르고 찢는 환난과 궁핍이 여전한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바뀌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님의 선하신 성품을 삶에서 누리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삶의 환난과 궁핍이 압박해 와요. 이런 상황을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요? 실제로 배고픔 때문에 견디다 못해 굶어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을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예배 모습이 어떠했겠어요? 배고픔 때문에 굶어 죽은 어린 자녀를 품에 안고 울며 예배하는 성도들, 가족을 잃고, 형제를 잃고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예배하는 그들을 무엇이라고 위로할 수 있겠어요?
그때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의 모습으로 다가가셨어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모습으로 다가가신 거예요. 성도들은 요한의 편지를 통해 부활의 영광을 봤어요. 죽으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의 부활이 되는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 부활의 영광이 핵폭탄처럼 펑하고 터지는 순간, 그들은 찰나의 불과한 시간에 당하는 환난과 궁핍의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었어요. 장차 그들에게 주어질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는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을 다시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어요. 비참한 죽음, 개죽음이 아니라 소망이 있는 죽음,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되는 죽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거예요.
(적용) 여러분 기독교의 강함은 하늘의 소망에서 나와요. 하늘의 영광이 이전보다 내 안에 크게 경험되어 핵폭탄처럼 터질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기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과 고난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돼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하늘의 힘을 공급 받게 된다는 거예요.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 이 힘으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거예요. 목사님도 장차 주어질 하늘의 영광을 마음에 품으며 설교 준비하고, 심방하는 거예요. 찬양팀도 이 소망을 마음에 품고 바쁜 와중에 찬양으로 섬기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학교에서 이 힘으로 친구를 사랑하고 섬기는 거예요.
(칭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셨어요. 9절이에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 대뿐만 아니라 자기 자녀의 대까지 곡식을 창고에 쌓아 놓은 서머나 시민들을 부요한 자가 부르지 않으시고 하루하루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살아가는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셨어요. 왜요? 히브리서 10장 34절이에요.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줄 앎이라”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찰나의 불과한 이 땅의 곡식 창고를 쌓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곡식창고를 쌓았기 때문이에요.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이 예수님의 칭찬을 들으면서 하루하루 힘겨운 삶이지만 “실상은 너희들이 부요한 자야” 이 칭찬을 들으면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살아내고 있는 삶의 방식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계속 그대로 살아내겠다고 다짐했다는 거예요.
예화) 목사님은 고등부를 담당하기 전에 유년부만 8년 동안 담당했어요. 처음으로 고등부를 담당하게 될 때 두려움이 앞섰죠. 유년부 아이들은 다가가서 몸으로 놀아주면 됐어요. 같이 뒹굴고, 뛰놀면 됐죠. 그런데 고등학생들과는 어떻게 친해질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러다 생각난 것이 PC방이었어요. 그래서 집에 비어 있는 방에 PC방을 만들었어요. 당시 배틀그라운드가 돌아갈 정도의 사양을 갖춘 컴퓨터와 모니터 4대씩, 게이밍 마우스와 키보드 4대 분량을 구입했어요. 덕분에 남자 학생들이랑 굉장히 많이 친해졌어요. 당시 고1 학생들의 소원이 목사님 집에 한 번 오는 것이 될 정도로 친해졌어요. 그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랑 PC방도 가고, 볼링장도 가고, 노래방도 갔어요. 하여튼 애들이 가는 곳은 다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운전하면서 집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현타가 온 거예요.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목사가 성경은 가르치고 맨날 같이 게임하고, 노래방가고, 볼링 치는 것이 맞나?” 정체성이 흔들리니깐 마음이 너무 힘들더라구요. 그런데 그때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강한 감동이 밀려왔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마음의 감동으로 개인적으로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한 목사 잘하고 있어! 내가 동탄 지역에서 청소년들과 놀아주는 사역자 찾고 있었어! 고마워!” 이 예수님의 칭찬이 마음속에 감동으로 확 밀려오는데 그 순간 안도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하나님 제가 잘 하고 있는 거네요. 깨닫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아이들하고 정말 열심히 놀겠습니다” 이 날 이후로 목사님은 정말 더욱더 열심히 놀았어요.
목사님은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도 목사님과 같은 감정과 확신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냥 황제를 향해 “주여”라고 한 마디 외칠 걸 그랬나?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나?”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겠어요? 그런데 그때 예수님의 칭찬 한 마디는 그들 마음속에 있는 질문과 의심을 몰아내고 더욱더 믿음의 삶에 정진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적용) 교회를 오래 다닌 친구들은 알겠지만 교회는 “칭찬”을 강조하기보다는 주로 “죄”, “죄인”, “심판”을 강조해서 “죄책감”을 주로 심어줘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칭찬에 인색하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 보낸 편지만 봐도 그래요. 일곱 교회 중에 칭찬을 받지 못한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 한 교회 밖에 없어요. 그런데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는 오늘 우리가 나눈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두 곳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하시기보다 칭찬하신다는 거예요. 우리를 향한 기본적인 마음은 책망보다 칭찬이 더 크시다는 거예요.
꼭 목사님처럼 마음의 감동으로 음성을 듣지 않아도 돼요. 성경에 비추어 보았을 때 여러분의 삶이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세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잘하고 있다! 고맙다” 이 예수님의 인정과 칭찬을 날마다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의 삶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으로써 점점 더 선명해져 가게 되는 거예요. 바라기는 이 예수님의 칭찬을 날마다 말씀 안에서 듣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더욱더 정진하는 우리 고등부 친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1)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
2) 부활을 소망하는 삶.
3) 예수님의 칭찬을 날마다 듣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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