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에서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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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8 토요새벽
찬송 363 내가 깊은 곳에서
본문 눅11:3-4 (신p.111)
사랑이 충만하신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복된 하루를 열어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루가 시작하는 이 시간에 단잠을 깨워주시고, 이렇게 영상으로 또한 예배당으로 나아온 성도들을 기억하사 오늘도 주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닮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 가운데 병약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굽어 살피시사 모든 연약함과 질병과 고통들을 치유하여 주옵소서. 모든 억눌리고 답답한 자들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형통케 되는 역사를 경험케 하여 주옵소서. 코로나 중에도 모든 주의 권속들을 지켜 주옵소서. 5월 가정의 달입니다. 분주한 중에도 가정을 돌아보게 하시고, 그 가정을 기억하며 기도하게 하시고, 그 가정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으로 세워가는 모든 주의 권속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던 것 같다. 이를 듣고 제자 중 하나가 주님께 요청하기를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한다. 이 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으로, 기도의 모범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다. 순서대로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라’ 라는 번역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원어에서는 ‘이렇게 말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한 시제로 보면 현재 명령형이다. 헬라어에서 현재 명령법 시제는 끊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어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 대신,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이신 이 기도대로 쉬지 않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 혹은 어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혹은 너무나도 답답한 마음에 기도조차 나오지 않을 때,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 의미에 완전히 젖어들어서 기도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습관적으로, 앵무새처럼 이 기도문을 읊조리는 것은 그저 주문을 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주기도문의 의미들이 무엇이고, 그것이 진정 자신의 고백으로 어우러져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3-4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여기에서 크게 2가지를 살펴볼 것이다. 첫째로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서 ‘주시옵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사람은 자기 먹을 양식을 땀을 흘려 구해야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밭을 경작하여 굳은 돌들을 걸러내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리며, 물을 주고 가꿔야만 한다. 그러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한다 해서 반드시 땅이 그만한 대가를 가져다 준다는 보장도 없다. 예를 들면 태풍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기후가 바뀌어버리면 모든 농작물들도 죽는다. 자연 앞에 무능한 존재이다.
또한 오늘날 사회는 열심히 땀 흘려 일해도 일용할 양식 얻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누구는 열심히 현장에서 일해도 일한 만큼 받질 못하고, 누구는 쉽게 많은 돈을 벌기도 한다. 그렇기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 우리가 힘써 일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마땅히 누릴 법한 일용할 양식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같이 육의 양식을 구하는 것도 내 노력과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닐진대 하물며 영의 양식은 어떠할까? 하나님께서는 물론 이 땅에서의 필요도 채우시는 분이시지만, 우리 영의 양식도 공급하신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일용할 양식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몸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 보자.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주시기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셔야만 우리가 살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양식을 공급해 주셔야만 우리가 살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영의 양식 또한 공급해 주셔야만 우리가 살 수 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으며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의 영에 일용할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 없이 선포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한 선포되는 말씀이 나의 영의 일용할 양식이 되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러분, 내일이면 또 주일이 찾아온다. 영혼의 일용할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바르게 선포될 수 있기를 기도하시는가? 또한 선포되는 말씀이 날마다 나의 영을 살찌우는 양식이 되기를 기도하시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말씀을 받아 먹어야 산다고 말씀하시는데, 과연 우리는 주일 예배의 자리와 여러 기도회의 자리에 찾아오면서 얼마나 말씀을 잘 받아 먹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준비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정녕 우리를 살게 하고, 그것이 우리를 살찌우게 하는 것이라면 이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두번째로 생각할 부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에 대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을 이와 같이 모두 용서하니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해달라는 요청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이는 우리의 공로가 구원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적인 발상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들을 사하셨으니, 우리 또한 마땅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우리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비유 가운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를 기억하실 것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셀 수 없는 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종은 마땅히 자신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베푸는 탕감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탕감의 은혜와 비교할 수 없다. 비교할 수 없을 지극히 작은 정도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고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독생하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다. 측량할 수 없는 사죄의 은혜를 받은 우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먼저 입은 은혜를 이제는 그들에게 죄 지은 자들을 향하여 흘려줄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죄를 계속해서 용서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용서란 무엇인가? 마음 한켠에 형제에 대한 서운함, 질투, 시기, 죄의 근원이 되는 악한 마음들을 계속해서 품고 있으면서 티나지 않게 친절한 척 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같이 용서하시지 않았다.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멀리 치우시고, 우리를 진노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우리를 맞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이 용서하시고 용납해 주시며 사랑하신 것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와 같은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받아야 할 금액은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600만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때로 형제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죄악들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고, 때로 아프고, 상처나고, 괴롭고, 슬플 때가 있다. 결코 가볍게 용서할만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을 계속해서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날마다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때로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형제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명령도 현재 명령형이다. 이 말씀을 받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계속적으로 지켜야 할 명령이라는 것이다.
이를 본문이 담고 있는 ‘주기도문’, ‘기도’ 라는 틀 안에서 생각해 보면, 계속해서 용서하기를 기도하라는 의미가 된다. 여러분 우리가 이 일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이다. 그 안에는 죄인들이 득실득실하다. 언제든 사람이 모이는 공동체이기에 마찰과 분쟁, 시기와 질투는 당연히 일어나게 되어 있다. 때로는 나를 향한 가시돋힌 말들, 나에게 서운하게 행동하는 것들, 나를 둘러싼 모함과 시기, 나에게 주는 피해 등으로 인하여 아픔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 주님께서도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셨으니 나도 그를 용서해 줘야지’ 하면서도 그 응어리가 해결이 안되어 계속해서 마음에 담아두다가 시험에 들어 넘어지는 자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기억하며, 그에 합당하게 우리도 형제를 완전히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말이다.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는다. 벌써 5월이다. 작년부터 다들 그러시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뭔가 시작하기도 애매하고 그만두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그런데 혹시 이런 상황을 핑계삼아 아예 신앙의 훈련과 경건생활을 중단하지는 않으셨는가? 혹 지난 5달동안 무엇을 두고 기도해 오셨고, 또한 남은 반년동안 무엇을 두고 기도하실 예정이신가? 오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되어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들이 여러분이 올려드리는 기도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길 바란다.
교회 가운데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잘 받아 먹어 나의 영이 강건해지고 살찌워져 갈 수 있기를 기도하자. 또한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나의 형제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듬고, 품어주며,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주님께서 이러한 기도를 멈추지 말고 계속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기도의 제목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되어 날마다 이 제목 붙들고 기도에 힘쓰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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