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지혜
Notes
Transcript
지혜로운 사람은 말도 잘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도 잘합니다.
5월 21일이 무슨 날이었는 지 아시나요?
아마 여러분들은 모르실 거에요.
바로 부부의 날이었습니다.
이 날 챙기는 사람이 아직까지는 많이 없긴 합니다.
아무튼 우리나라는 이혼율이 OECD국가중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이혼한 커플들이 많아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혼율 자체는 매년 비슷한데요.
이혼이 줄어서가 아니라 결혼하는 커플수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이걸 감안하면 이혼율은 매년 상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혼사유도 우리가 보면 항상 부동의 1위가 있죠.
바로 ‘성격차이’입니다.
도저히 저런 성격은 못 참겠다는 거죠.
아마 말로 상처받은 분들이 많을 거에요.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오늘 말씀이 주로‘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참을 인자 세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참을 인자 세개면 호구가 된다’고 하는데요.
그럼 과연 잠언은 어떻게 말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본론]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삶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그 기준이 되는 게 첫번째가 바로 ‘신중함’입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에게 사용된 단어가 신체기관중 ‘눈’입니다.
15절의 ‘옳다고 여기지만’이라는 말이 원래 히브리어를 보면 ‘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눈’은 사물을 보고 판단할 때 가장 먼저 작동하는 신체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주로 귀는 닫고 자기 눈으로 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눈만 믿고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에게 중요한 기관은 ‘눈’이 아니라 ‘귀’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겸손하게 남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평가할 때 우리는 눈으로 무엇인가를 성급하게 판단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잘 듣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사람인가요?
16절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 예를 설명해줍니다.
미련한 사람은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고 곧바로 분노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의 원래 히브리어의 의미가 ‘바보’입니다.
왜 ‘바보’일까요?
‘바보’는 그냥 자기 마음 속 생각을 여과없이 곧바로 드러내곤 하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사람이 바로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모욕을 참습니다.
여기서 ‘참는다’는 말의 원래 히브리어의 의미는 ‘감추다’입니다.
그러니까 슬기로운 사람이나 미련한 사람이나 화나는 건 똑같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화가 안나는 게 아닙니다.
화가 나는데 그 화를 그때 바로 분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화나는 상황인데도 참았다가 때에 맞게 분노를 드러낼 줄 아는 그런 신중한 사람이 바로 슬기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나는 참 어리석은 자에 속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자주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분출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분노를 참으면 너무 억울하고 내가 지는 거 같잖아요.
이 상황을 받아주면 그거 내게는 너무 모욕적이잖아요.
그래서 화를 낼 수 밖에 없는거죠.
오히려 크게 화를 내야 내가 옳은 것 같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이 화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거의 없죠.
저도 뭐 아내랑 다투면 매번 경험하는 바이구요.
더 안좋아지는 경우가 많은데 지혜로운 자는 그 위험을 피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요즘 현대사회에서는 참 중요한 지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절제력, 기다릴 줄 아는 힘이 부족하다고 하잖아요.
앞서 말한 이혼하는 커플이 많아 지는 것도 그렇고, 최근 발생하는 범죄가 많아지는 것도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층간 소음문제로 이웃끼리 다투는 문제가 사회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분노조절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중한 말이어서 두번째로 어떤 말이 중요한 지 보여주는 데요.
고대사회에서는 특히 말이 중요한 영역이 바로 재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종이로 뭔가 증거를 제시하기 힘들기 때문에 증인의 말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재판장에서 증인의 증언은 판결의 결과를 좌우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삶의 영역에서 가장 정직한 말을 해야할 곳이 어디일까 생각해보면 바로 재판입니다.
재판에서 누가 어떤 증언을 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운명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판정에서 증언하기 전에 선서도 시키고, 거짓말하면 처벌받게 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재판정에서 진실하듯, 지혜로운 사람은 평소 삶에서도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정직한 증거를 보인다고 합니다.
말이라는 게 그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첫번째 통로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실한 사람은 말이 한결같아서 신뢰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이렇게 말하고, 저럴 땐 저렇게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주로 하는 말은 정직한 말입니다.
반면 거짓말하는 사람은 재판정에서 진실을 덮으려듯 속임수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평소에도 자기 이익에 따라서 이리 말하기도 하고 저리 말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나요?
자기한테 이득이 되면 제대로 말하지만 이득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거짓말하는 사람있잖아요?
그런 종류의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잠언은 그런 사람이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할 점은 진실한 말이란 때론 타인을 배려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남을 배려하는 게 아닐 수도 있거든요.
아내와 누군가의 연주를 보러 갔는데 끝나고 나자 아내에게 연주한 사람이 묻습니다.
“언니, 나 오늘 연주 어땠어요?
응, 최악이었어.
계속 플랫되고, 목소리는 모기소리 같이 작았어.”
이게 진실한 말인가요?
이럴 때는 차라리 침묵하는 게 약이죠.
이런 말은 진실한 말이 아니라 사려깊지 못한 경솔한 말입니다.
18절이 말하는 것처럼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 아니라 남을 찌르는 비수가 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18-19절은 이런 말의 영향력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사려깊지 못한 경솔한 말은 찌르는 칼처럼 남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또는 얼렁뚱땅 거짓말해서 그 순간만 넘어가려는 사람은 결국 남의 마음을 비수로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의 말은 그 순간만 통할 뿐이고 결국 거짓말은 또다른 거짓말을 낳기 때문에 들통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신중하고 진실하기에 사람을 살리는 좋은 약과 같습니다.
누군가의 진심어린 격려와 위로는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줍니다.
이런 진심어린 말들은 사람 마음 속 깊이 남아서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살면서 곤욕스러운 상황에 처하면 거짓말해서 이 상황만 넘기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럴 경우 나중에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저도 살면서 그 순간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더 큰 문제가 일어나더라구요.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문제가 일어나서 다행이더라구요.
안 그랬으면 더 문제될뻔 했어요.
하나님은 제가 거짓말했을 때 그 대가를 치루게 하셔서 제가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럼 과연 이런 진실한 말과 거짓말은 어디서부터 시작한 것일까요?
이제 20절부터는 말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악을 꾀하는 사람의 마음과 평화를 꾀하는 사람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속임수와 기쁨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악을 꾀하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며 속임수와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관계를 깨뜨리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의 말 속에는 과장, 거짓말, 속임수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습니다.
반면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말이 진실하고 그 사람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럼 나는 과연 어떤 사람에 속하나요?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말하고 다니며 관계를 깨뜨리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며 서로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사람인가요?
누가 과연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결국 그들이 가는 길은 완전히 갈라집니다.
한쪽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지만 한쪽은 재앙의 연속입니다.
22절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악인은 거짓말하는 입술을 가졌기 때문에 주님이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길은 재난의 연속이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 의인은 진실을 말하는 입술을 가졌기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재난가운데서도 부르짖으면 그를 보호해주시고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진실한 사람은 사랑하시지만 거짓된 사람은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23절은 16절과 관련이 있는데요.
슬기로운 사람은 절제할 줄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물론 무조건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지 않는게 좋은 건 아닙니다.
꼭 말을 해야하는 상황인데도 비겁하게 숨일 수도 있는 거니깐요.
다만 슬기로운 사람은 적절한 때와 상황에 맞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반면 미련한 사람은 절제할 줄 모르고 자신의 무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자꾸 경솔한 말을 합니다.
이런 모습이 마치 자신의 어리석음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이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란 말을 해야 할 때와 하지 않을 때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24-27절은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4절에서 부지런한 사람은 자신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남도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자기 자신도 잘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남 밑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게으른 사람은 게을러서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오히려 남의 밑에서 하기 싫은 일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 훌륭한 지도자중에 게으른 사람 본적 있으신가요?
부지런한 것은 훌륭한 지도자의 기본적인 자질에 속합니다.
왜 그럴까요?
단지 부지런함 자체에 지도자의 미덕이 있다기 보다는 부지런한 사람은 분명 자기 관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고, 그렇다면 남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를 뽑을 때 이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인지 아닌지 보면 잘 판단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부지런한 지도자는 자기관리 능력도 뛰어납니다.
그런데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은 사용하는 말도 다릅니다.
25절부터 그것을 소개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주로 좋은 말을 사용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죠.
자신에게 부지런하기 때문에 남을 생각하는 마음도 부지런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말 한마디조차도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세워준다는 것입니다.
반면, 게으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근심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마음에 근심이 더 많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행동만 게으른 게 아니라 생각과 마음도 게으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심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근심 걱정이 또다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한 생각도 게으른 사람이 남을 생각해줄까요?
게으른 사람 곁에 있으면 이득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은 이웃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26절을 보면 잠언은 부지런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하는데 그는 이웃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반면 잠언에서 게으른 사람은 악인으로서 이웃을 나쁜 길로 인도합니다.
부지런함도, 게으름도 모두 전염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자기관리도 잘하고 남을 생각하는 마음도 부지런합니다.
반면 게으른 사람은 자기관리도 못하고 남을 생각하는 마음도 게으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지런한 사람과 같이 살면 나도 같이 부지런해지고, 게으른 사람과 같이 살면 나도 같이 게을러지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어쩌면 여러분 스스로 게을러졌다고 생각된다면 주변 사람들이 게으른 사람이 많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지런 해지고 싶으시면 부지런한 사람과 함께 하십시오.
27절에서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의 대조되는 모습이 사냥에서 드러납니다.
게으른 사람은 사냥을 한 것조차도 불에 굽지 않을 정도로 게으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줄 모르는 것입니다.
부가가치란 원재료를 더 큰 가치가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죠.
반면, 부지런한 사람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귀한 재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식의 활용능력이 떨어진 것도 게으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1을 가르쳐주면 10을 알지만, 게으른 사람은 1을 가르쳐주면 1만 압니다.
생각이 게을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지면 공동체, 더 나아가 나라가 가난해집니다.
우리나라가 예전 70,80년대 했던 운동이 새마을운동입니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세,,, 열심히 일하는 게 나라 전체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런 경제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결론]
마지막 28절은 위에서 다룬 모든 말씀에 대한 정리, 요약입니다.
의로운 사람의 길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지금까지 말했던 ‘말을 신중하게 할 줄 아는 사람’,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부지런한 사람’이며 이들을 다른 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미련한 사람이란 자제력이 없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 거짓말하고 속이는 사람, 게으른 사람이며 이들을 다른 말로 악인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 여기서는 우리가 걷는 ‘길’을 보시고 우리를 의인과 악인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길 밖에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인이 가는 생명의 길, 악인이 가는 죽음의 길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가는 생명의 길, 어리석은 자가 가는 죽음의 길입니다.
이렇게 두가지 길만 제시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둘 중 한가지 길로 가도록 유도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어리석은 자의 길이라면 지금 방향을 틀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