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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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 13장 21-30절 ‘하나님 사랑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은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어디에 있느냐?“며 그들을 찾으시자,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르시고 그들을 찾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신 이유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왜 숨었는지, 즉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위해서 였습니다.
가인은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동생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이 한 범죄를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시치미를 떼는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고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여리고성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께 바쳐야할 재물을 훔쳐서 숨겼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여리고성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아이성을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이같은 사건이 벌어졌다고 말씀하시면서,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제비를 뽑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지파의 우두머리가 모여 제비를 뽑자, 아간이 속한 유다 지파가 뽑혔습니다. 그 지파의 족속들을 모아 제비를 뽑자, 세라 족속이 뽑혔습니다. 세라 족속 중 집안의 가장을 모아 제비를 뽑자, 아간의 아버지 삽디가 뽑혔습니다. 삽디의 가족 중 남자들을 모아 제비를 뽑자 아간이 뽑혔습니다. 아간이 범죄했음을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간을 지목하지 않으시고 복잡하게 네 번에 걸쳐 제비를 뽑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아간에게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네 번이나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버렸습니다.
13장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후 성경은 주님을 배신할 인물로 가룟 유다를 지목했습니다(2). 죽음을 앞둔 주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발은 물론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는 베드로에게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를 향한 주님의 첫 번째 언질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겨주신 후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압살롬 반란 때 동참했던 충복들의 반역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한 다윗의 시편 41:9절 말씀을 인용하셔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18b)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를 향한 주님의 두 번째 언질이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가룟 유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괴로운 마음을 더 이상 억제하지 못하시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고 폭탄 발언을 하셨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를 향해 “지금이라도 돌이키라”는 주님의 직접적인 세 번째 말씀이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서로를 돌아보면서 예수께서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서 웅성거렸지만, 당사자인 가룟 유다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요한에게 “누구를 두고 하는 말씀이신지 물어보라”(24)고 고개 짓 했습니다. 요한이 묻자, 주님께서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면서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26). 세 번째까지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네 번째에는 가룟 유다에게 직접 떡을 떼어주셨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떡을 적셔 떼어주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셨을까요?
유다야! 제발 너의 잘못된 생각을 지금이라도 돌이키렴!
잊지 마십니다 !
주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어긴 아담과 하와 부부를 그리고 동생을 살해한 가인조차도 끝까지 사랑하셔서 그들과 영원히 변치 않는 소금언약을 하셨습니다. 자신을 팔아넘길 것을 계획하고 있는 가룟 유다도 조차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고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였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가룟 유다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네 번에 걸쳐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어떤 반응을 보였다고 본문은 증거합니까?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27a)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떡을 주셨기 때문에 유다에게 사탄이 임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이 갈등하고 있는 모습을 천사의 모습을 한 자신과 사탄의 모습을 한 자신이 서로 싸우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영화나 만화의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갈등 속에서 선택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선을 택하면 주님의 도구가 되지만, 악을 택하면 악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즉 가룟 유다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거절함으로 결국 사탄이 그를 지배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가룟 유다가 돈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았다고 합니다. 맞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대가로 받은 은30은 약 120 데나리온으로 당시 노동자의 넉 달 품삯이니 적지 않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유다가 돈궤를 맡았다”고 증거하는 것(29)으로 미루어 보면, 재정을 담당했던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의 액수는 손쉽게 착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제자들 중에 현실 감각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고백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받게 될 수난에 대해 몇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흘려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유월절 예루살렘 입성을 마치 앞으로 자신들이 꿈꾸고 있는 메시아의 세계가 도래할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에서 서로 영의정, 좌의정을 하겠다고 다투는 추태도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 일행을 반기는 무리들의 환호에 그들의 가슴에는 핑크빛 미래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미래가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꿈꾸었던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과거 찬란했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도래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인지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핵심 지도 세력들이 예수님을 살해하려고 작정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수난의 길이 펼쳐질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앞에서 갈등했을 것입니다. 베다니에서 있었던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어쩌면 그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지 모릅니다.
현실 감각이 뛰어났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전혀 들어내지 않고 숨기고 있었던 이중 인격자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돌이키지 않는 유다를 향해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b)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28-29)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제자들 중 아무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은 물론 자신들도 배신할 것이라고 짐작조차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속내를 철저하게 숨기고 살았는지 짐작이 갑니다. 겉으로는 동료들조차도 인정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선한 사람이었지만, 속으로는 계산적이며 스승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그였습니다. 그는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을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일 교회의 여러 가지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지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열심히 붙어있지 않는 사람”
주중에 그리스인답지 않게 사는 크리스천을 뜻하는, 즉 겉과 속이 다른 크리스천을 칭하는 용어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천 역시 본문의 가룟 유다가 다를 바가 없지 않나요?
본문을 그림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1495년 다빈치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당시 수도원의 요청을 받고 대식당 벽에 최후의 만찬 벽화를 템페라(Tempera) 형식으로 2년 9개월 동안 작업을 해서 완성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의 주제는 ‘배신’입니다. 그런데 다빈치가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도, 동시대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같은 주제로 많은 화가들이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유명한 것은 그의 예술성 때문입니다.
그가 최후의 만찬 벽화를 그리면서 사용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구도와 기술적인 기법도 대단하지만, 예수님의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폭탄발언에 대해 반응하는 제자들의 각기 다른 표정이 압권입니다. 제자들의 심적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다빈치가 사전에 그린 습작의 양도 상당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예술성은 단순히 구도, 원근법, 색채 등과 같은 기술적인 기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입니다. 사건을 어떤 관점으로 해석했고, 그 해석을 화폭에 어떻게 묘사했는가를 통해 작가의 예술성이 드러납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작품들 대부분은 배신자 유다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배치했습니다. 예를 들면 유다를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식탁의 반대편에 따로 배치시키거나, 예수님과 제자들 머리 주변에는 이콘(icon)을 그렸지만 유다의 머리 주변에는 이콘이 없는 것으로 차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주제를 다룬 작품들 중에는 배신자 유다를 주 화면에서 아예 제외시키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빈치는 유다를 따로 배치하지 않고, 제자들 사이에 섞여있게 그렸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 어쩌면 성경을 안다고 해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가 가룟 유다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림 속에서 유다는 제자들 사이에서 등을 구부린 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의 논쟁을 태연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좌측에서 다섯 번째 인물의 오른손은 주머니를 쥐고 있는데 바로 그가 유다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주머니를 쥐고 있는 유다의 오른 팔 앞에는 넘어진 통이 하나 있습니다. 그 통은 소금이 들어있는 소금 통입니다.
유다 좌측에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려고 예수님 쪽을 향해 일어서면서 유다를 밀었고, 밀린 유다는 앞에 있던 소금 통을 팔로 쳐서 소금 통이 엎어졌습니다. 다빈치는 유다의 손에 쥐고 있는 주머니와 유다의 팔에 걸려 식탁에 쏟아진 소금을 유다의 배신을 알리는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주머니는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30을 넣은 동전주머니이니 배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식탁에 쏟아진 소금은 배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히 변치 않는 소금 언약으로 묘사됩니다.
역대하 13장은 남 유다 2대왕인 아비야 때,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과 전투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남 유다의 군사는 40만 명으로 북이스라엘 병력 80만 명에 비해 열세였고, 전술상으로도 적군에게 후방이 포위되는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열세에 몰렸지만, 남 유다 아비야 왕은 북이스라엘 진영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소금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에 소금 언약은 부패하거나 침식되지 않은 언약, 즉 영원불변한 언약을 의미합니다. 다빈치는 가룟 유다의 팔 앞에 쓰러진 소금통과 쏟아진 소금을 그려서 그가 예수님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다빈치는 유다가 겉으로는 태연하게 제자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미 예수님을 배신해서 팔아넘길 것이라는 사실을 손에 움켜쥔 돈 주머니와 쓰러져있는 소금 통을 통해 묘사했습니다.
앞서 최후의 만찬의 주제는 ‘배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서 자신을 향해 네 번에 걸쳐 마음을 돌이킬 것을 말씀하고 계신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거부하고 끝까지 태연하게 무리 속에 섞여서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가룟 유다가 가증스럽기 보다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그림에 그려진 것처럼 예수님을 배신한 대가로 은30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손에 들게 되지만,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소금 언약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영원히 저버렸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현실을 택한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과 차이점이 있나요?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두려움에 휩싸여 도망쳤습니다. 심지어 자신만은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다 못해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그들 모두 똑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결코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제자들이야 말로 주님을 두 번 배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 가룟 유다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끝까지 자신을 사랑하신 주님과의 영원한 소금 언약을 저버렸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주님과 눈이 마주쳤고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즉 베드로는 주님의 눈을 통해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는 통곡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잊지 마십시다 !
우리의 잘못된 선택은 우리를 하루아침에 사탄의 도구가 되버린 가룟 유다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지닌 이상과 지식과 경륜도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점은 오직 주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인으로 내려놓아야 될 것을 내려놓지 않거나,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가 가룟 유다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잊지 마십시다 !
하나님께서는 악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룟 유다를 지배한 사탄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십자가에 죽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뜻이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사망 권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잊지 마십니다 !
주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어긴 아담과 하와 부부를 그리고 동생을 살해한 가인조차도 끝까지 사랑하셔서 그들과 영원히 변치 않는 소금언약을 하셨습니다. 자신을 팔아넘길 것을 계획하고 있는 가룟 유다도 조차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고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였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이 새벽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가룟 유다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우리 역시 주님은 모르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내 속 깊숙이에 나만의 가룟 유다를 키우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과 이상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나날들로 점철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음으로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에 합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