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힘 (101-105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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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오늘 본문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서론
서론
맹구 이야기
맹구 이야기
옛 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고 말입니다.
맹구는 온 동에네서 유명한 말썽꾸러기였어요.
어제는 새를 잡겠다고 돌을 던져 남의 집 장독을 깨더니, 오늘은 깨끗하게 빨아 놓은 빨래에 온통 흙칠을 해 놓았죠.
서당에서도 하루가 멀다고 장난을 치다 훈장님께 혼나는 게 일이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훈장님은 서당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맹구! 이녀석아!!!!”하고 호통을 쳤어요.
마루에는 훈장님이 아끼던 도자기가 산산조각이 난 채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죠.
“일부러 그런게 아닙니다. 도자기가 하필 거기에 있었어요!” 맹구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하며 쌩하고 달아났어요.
그리고는 서당 뒤뜰에 몰래 숨어서 훈장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어요.
“아함! 심심해, 뭐 재미있는 것 없나?”
맹구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말했어요.
그때 맹구 눈에 서당 담장에 주렁 주렁 달린 노랗게 잘 익은 호박이 보였어요.
맹구는 당장 나뭇가지를 들고 와서 호박을 푹 찔렀어요. 늙은 호박은 금방 구멍이 뻥 뚫렸어요.
맹구는 재미 삼아 이리저리 다니며, 이 호박, 저 호박을 찔러서 호박이라는 호박은 죄다 구멍을 뚫었어요.
아이들이 모두 다 집으로 돌아가고 난 저녁, 훈장님은 맹구가 저질러 놓은 일을 알게 되었어요. “아이구, 이 귀한 호박을...”
다음날, 맹구가 서당에 오는 길에 서당에서는 들썩 들썩 잔치가 열렸어요. 맹구는 “오늘은 책씻이가 있는 날도 아닌데, 웬 잔치지?”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서당으로 왔지요.
맹구가 서당에 도착했을 때, 서당에 있던 아이들은 호박이 들어간 달콤한 떡을 나눠 먹으며 조잘 조잘 떠들어 댔어요.
도자기에 이어 호박까지 망쳐 놓은 맹구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시덕거리며 실컷 떡을 먹었지요.
때마침 훈장님이 뒷짐을 진 채 맹구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어요.
맹구는 떡을 먹다 말고 눈치를 살살 살폈어요.
왜냐하면, 훈장님이 금방이라도 자기 머리통을 콕! 하고 쥐어박을 것만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훈장님 손에는 매가 아니라 따끈한 떡이 있었어요.
“네 덕분에 먹는 호박떡이니 이 떡 하나 더 먹거라"
맹구가 씩 웃으며 떡을 냉큼 받아 쥐었어요. 그리고 신이 나서 후다닥 마당으로 뛰어나갔어요.
그러자 주변에 있던 한 아이가 훈장님께 물었어요.
“훈장님 저런 말썽꾸러기는 회초리로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하는것 아닌가요? 왜 미운 놈에게 떡을 하다 더 주시나요?”라고 말이죠.
그러자 훈장님은 허허허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했어요.
“미운 놈이라고 혼내기만 하면 더 못되게 굴기 마련이란다. 미운 놈일수록 더 잘해줘야 나쁜 마음도 안 쌓이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 잘하게 되지 않겠니?”라고 말이죠.
훈장님은 그 후로도 좋은 것이 생길때 마다 맹구를 먼저 챙겨 주었어요. 그러자 정말 훈장님 말씀대로 맹구가 말썽을 부리는 일이 점점 줄어 들었어요.
이것이 바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의 힘입니다.
용서란?
용서란?
용서하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보통 우리는 용서하다라는 말의 의미로서
“잘 못한 사람이 그에 합당한 죗값을 치루었을 때 그 때 우리는 용서한다”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 것을 다르게 설명하면, 성혁 형제가 저에게 잘 못한 것이 있을 때, 우리는 성혁 형제가 저에게 사과하였을 때, 용서해줄게 라는 말로 사용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정적 용어로 넘어가면 내가 성혁형제의 폰을 만지다가 떨어뜨려서 고장 내었을 때, 그 폰을 원래의 상태로 고쳐주거나, 그 폰의 시세에 맞게 보상을 하였을 때, 성혁 형제로부터 용서 받을 수 있다라는 의미로 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말하는 용서라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알 고 있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국립국어원의 단어 사전, 그러니까 표준 국어 대 사전에 따르면, 용서하다라는 말은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주다"라고 정의합니다.
바로 용서란, 남이 나에게 잘 못했을 때, 그 잘못에 대해서 꾸짖거나, 혹은 책임을 물어 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덮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용서이다 라는 것이죠.
바로, 용서하다라는 것은 앞에서 살폈던 그 훈장님의 모습이 바로 용서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모습입니다.
본론
본론
성장의 비결!
성장의 비결!
오늘 본문은 결과를 나타내는 본문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즉,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먼저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간다라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져 간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부흥의 모습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부흥 말이죠.
비록 부흥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그 개념적 의미에서는 동일합니다.
이 문장을 교회의 용어를 제외하고 세상에서도 쓰일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나의 일터가 큰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국가에서 나의 사업에 대한 순탄한 정책으로 인하여 나는 국가에 만족하며, 나를 응원해주는 가정의 응원으로 인하여 나의 사업은 점점 더 확장하여 간다.
이렇게 자신의 영역이 점점 더 넓혀져 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장사를 하는데, 내 가게가 평생 매월 100만원만 버는 가게로 남고 싶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것이죠.
매월 100만원, 200만원, 600만원, 1000만원과 같이 점점 더 커져가기를 원하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비법 전수!
비법 전수!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비법이 오늘 본문 앞부분인 행 9:26-30 에 나옵니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오늘 본문에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날로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교인이 더 많아진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교회가 사울을 공동체로 받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왜?
왜?
왜 사울을 받아들여 준 것이 부흥의 비결일까요?
행 9:26 을 보면, 사울과 이스라엘 교회의 사이는 사실 썩 좋지 않은 관계였습니다.
왜냐하면,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울이 다메색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을 행 9:26 은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180도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사울과 이스라엘 교회가 서로 얼굴을 맞대려는 찰나에 사울은 이스라엘 교회를 감옥으로 보내어 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였던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교회는 사울이 왔을 때, “두려워” 했던 것이죠.
자신들을 감옥에 보내려 했던 사울,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사울에 의해 죽임당하고, 고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행 9:28-30 을 보면,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사울이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 교회는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그 사울을 돕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단지, 행 9:27 에 나오는 바나바의 진술 하나만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그리고 사도행전 9:27 을 통해서 바나바가 했던 진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수님께서 사울 그를 직접 만나시고 그를 용서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교회는 이 “바나바의 증언"하나만을 가지고 그동안 자신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죽이며,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괴롭혔던 그 사울을 이 “바나바의 증언"하나를 가지고 아무런 죗값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었다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켰는지, 아니면 자신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위장한 것인지를 시험하고, 검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자신들의 공동체에 받아 들여 주었다라는 것이죠.
이해가 가시나요?
앞에서 미운 맹구에게 떡 하나 더 주었던 그 훈장님의 행동을 서당의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사울이 용서를 구하려면 이스라엘 교회에 와서 그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행동들에 대한 죗값 그러니까 정당한 보상을 하고 나서 이스라엘 교회에 나를 구성원으로 받아 주십시오 라고 해도 모자랄 판국에 지금 이스라엘 교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나바의 증언"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울을 용서하셨다 라는 그 증언 하나만을 가지고 이 사울을 용서했다라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렇게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 중에 십계명을 완벽하게 지키신 분이 있으신가요?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100% 없다라는 것이 우리의 대답일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무엇이나면, 우리가 십계명을 완벽하기 지키지 못했다, 못한다, 못할 것이다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죗값을 지불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 계신 여러분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지불되어야 할 그 보상, 우리가 십계명을 어기면서 지은 그 죄에 대한 마땅한 값을 지불하고 지금 이 자리에 여러분들이 앉아 계신가?라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라는 것은 제가 앞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라고는 단 1도 없습니다.
아니, 0.00000001도 없습니다.
100%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 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모든 것들에 대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것을 하나님 자신이 지불하시고 그 지불하신 것을 우리가 지불한 것으로 여겨 주셨다라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신의 영역에서 그 신의 가치를 측량할 수도 설령 측량한다 하여도 지불 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이신 하나님의 가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년이상 사실 수 있는 분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은 바로 용서의 힘,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보상하시고, 자신의 것으로 우리를 위해 죗값을 치르셨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용서의 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미운 자에게 떡 하나 더 주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이죠.
결론
결론
지난 주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협동조합을 이루게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협동조합을 통하여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음을 보았죠.
그리고 이 협동조합의 가장 큰 힘, 이 협동조합이 오늘 본문과 같이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받은 이 용서의 힘이 있고 없고에 의해서 결정된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들의 손에 하나님의 나라가 달려 있고, 여러분들의 손에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된 협동 조합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이고, 여러분들의 손에 이 교회의 운명이 달려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용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진행되었고, 하나님의 것으로 인하여 용서받은 그 용서가 여러분들의 삶에 담겨 있다면, 여러분들이 “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원수와 같던 우리를 용서하신 그 용서의 힘을 따라 누군가를 용서하실 수 있다면,
우리의 협동조합인 교회 공동체는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갈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용서함 속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 주님을 경외하며, 그 주님이 보내어 주신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는 날마다 위로를 받고, 끝까지 참고 인내 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격려하심 속에 새 힘을 얻어 날마다 날마다 그 수가 더하여 질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들 속에서 날마다 버티고 인내함으로 끝까지 용서하시는 용서의 힘을 드러내시는 귀한 인생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