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수를 원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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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고 진실하게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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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고 진실하게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여러분 바둑용어 잘 아시나요?
저희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중에도 바둑용어가 참 많더라구요.
먼저 ‘꼼수’는 상대의 실수를 노려 이득을 보려는 쩨쩨한 수단이나 방법을 말합니다.
‘무리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를 부리는 수를 말합니다.
‘묘수’는 수가 나지 않을 듯한 곳에서 나타나는 절묘한 수를 말합니다.
‘노림수’는 약점 또는 취약한 곳에 수단을 부릴 기회를 잡으려고 잔뜩 눈여겨보다가 두는 수를 말합니다.
이거 말고도 많은 ‘수’가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바둑을 우리 삶의 축소판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듯 인생에는 예측할 수 없는 경우의 수와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서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수’가 있습니다.
바로 ‘신의 한 수’입니다.
우리 기독교 용어로 바꿔보자면 ‘하나님의 한 수’입니다.
내가 둔 수인데 이게 마치 하나님이 두신 수라고 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때를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한 수는 도대체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본론]
먼저 1절을 보시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해서 해석하는 구절입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보통 내가 많은 것을 계획해도 그것이 성취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이 구절을 이해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목표로 삼더라도 결국 그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이 해석이 은혜롭긴 하지만 1절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1절에서 말하는 계획이란 사람의 생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생각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적절한 때에 말하는 것은 지혜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아무 생각이나 막 말한다면 그것은 지혜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절의 ‘결정’이란 때에 맞게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과 행동하는 지혜가 나한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을 다시 표현해보자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많은 말을 마음에 담고 있지만, 그것을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로 표현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거 많이 경험합니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이 잘못나온다거나, 나중에 이야기해야 하는데 괜히 그 때 이야기해서 문제를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도 우리가 자주 하는 실수를 꼬집습니다.
우리는 내 말과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여길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의 속마음도 다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 우리가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 /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해 뱉은 말과 행동들, 내 생각만 옳다고 여겨 남에게 상처줬던 말과 행동들, 모두 자신의 마음을 깊이 살펴보지 못해 일어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런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3절에서 그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들을 주님께 맡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맡긴다’는 단어의 히브리어 뜻은 ‘굴리다’입니다.
뭘 굴리라는 거죠?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굴려버리라는 것입니다.
맡겨놓으면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욕탕에 가면 붙어있는 팻말이 있습니다.
“귀중품은 카운터에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고 잃어버린 물건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맡기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지만, 맡겨놓고도 근심 걱정한다면 더 어리석은 일인거죠.
이렇듯 우리의 말과 행동을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주님 제가 지금 이 말을 해도 될까요? 주님 제가 지금 이렇게 행동해도 될까요?”
그러면 우리의 마음 속 동기까지 살피시는 주님이 적절하게 행동하도록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친구랑 감정이 상했는데 어떤 말을 해야할 지 주님께 여쭤보는 게 쉬울까요? 아니면 우선 화내고 보는 게 쉬울까요?
가족끼리는 더 어렵지 않을까요?
화가 나는데 제가 아내한테 대꾸하기 전에 주님께 여쭤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는 데 있어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흥적인 감정과 말을 함부로 뱉는 사람들에게 이런 지혜의 훈련은 매우 중요합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말을 잘못해서 또는 성급하게 행동해서 삶의 문제가 많이 일어난다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4절은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다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의인과 악인으로 미리 나눠놓으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인과응보, 즉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책임을 지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맞게 쓰일 것이고, 자기 내키는 대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말 / 하나님이 심판의 날에 그 죄값을 치루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5절은 그것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을 역겨워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질서인 지혜를 무시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6절은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에 대한 격려구절입니다.
‘어질고, 진실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성품은 원래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사람이 어질다는 말은 이웃에게 베풀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볼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정직하고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게 왜 죄를 용서받게 해줄까요?
왜냐하면 이런 삶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주님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칠 줄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경외하며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화목하게 만들어줍니다.
7절에서 말하는 ‘사람의 행실’이란 원래 ‘사람의 길’이란 말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길, 바른 길을 갈 때 결국 원수의 마음까지도 돌려놓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원수의 마음을 누가 돌려놓은 것일까요?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람은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원수의 마음일지라도 주님이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분명 일관된 선한 삶의 모습은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 친구중에 교회가자고 하면 그 앞에서 염불을 외우겠다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결국 예수님 믿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를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놀랍게도 밥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참 가난한 친구였는데 교회에서 그 친구에게 계속해서 공짜로 밥을 줬어요.
이 친구가 그것에 감동받아서 결국 교회를 오게 되더라구요.
이렇듯 일관된 선한 삶의 모습은 나중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이 내게 어떤 보상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적게 벌더라도 의롭게 사는 삶이 많이 벌려고 불의하게 사는 삶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럼 분명히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도 가난해 질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원래 잠언은 그렇게 살면 부유함을 가져다 준다고 말하거든요.
그런데 세상이 죄로 인해 왜곡되어 있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내게 이렇게 보상받지도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잠언은 우리에게 이런 삶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런 삶 자체가 하나님의 질서이자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의롭게 사는 것이 불의하게 얻은 물질적 부유함이나 내 성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물질이나 성공여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얻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과주의, 성공주의에 몰두한 인생이 지혜로운 게 아니라 의롭게 사는 것이 인생의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에서 자신의 성공과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삶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지혜인 ‘정의’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잠언이 말하는 미련한 악인의 삶이고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습니까?
세상을 살다보면 조금만 불의한 일과 타협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이 유혹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한번만 눈 감으면 될 거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많이 갈등하게 됩니다.
잠언은 그럴 때조차 하나님의 지혜인 의로운 선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4학년 2학기때 취업준비하느라 수업시간 발표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취업하고 나면 이 과목은 점수만 받으면 되니까 괜찮을 줄 알고 한번만 넘어가자고 생각해서 인터넷에서 베껴서 발표를 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가 치룬 대가는 엄청났습니다.
F맞아서 졸업을 못할 뻔했고, 교수님께 비굴하게 싹싹 빌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취업도 결국 2학기때 못했고, 그 과목은 내 생애 처음으로 D-를 받아서 평균학점은 추락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이게 똑똑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제게 재앙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말과 행동을 주님께 의지하고 있습니까?
9절은 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 길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많은 계획을 세울 수 있지만 결국 그 생각이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길을 인도해주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제가 세상을 살아보니 이 말이 참 진리라는 것을 많이 깨닫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내 생각과 계획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이 제 삶을 인도하셨더라구요.
10절부터는 갑자기‘왕’이 등장해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도대체 앞의 내용과 무슨 관련이 있길래 왕이 등장한 것일까요?
이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고대 왕은 여러가지 업무를 해야 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 제일 중요한 영역이 재판과 경제부분입니다.
지금 세상도 그렇습니다.
‘왕’에 대한 잠언은 우리 사회 지도자에 대한 지혜를 다루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지도자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앞으로 지도자를 뽑아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년에 우리나라도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잖아요.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할까요?
과연 내가 지도자가 된다면 우리는 어떤 지도자가 되어야 할까요?
먼저,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지도자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절대 돈이나 지위, 권력에 따라 불공정한 판결을 내리면 안됩니다.
그럴 때 가장 피해보는 사람은 없는 자, 가난한 자들, 사회의 소외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중에 나는 평생 재판하고는 아무 상관없을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어떤 일이나 사건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삶에 있어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우리는 다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 사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는 재판이 얼마나 공정한 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지도자는 공정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11절은 경제정의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그 당시에도 지금에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저울과 천평’이란 그냥 저울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옛날에는 저울을 조작해 남을 속이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울이 경제정의로서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저울을 조작한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자면 불공정한 거래를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 공정거래위원회가 있잖아요.
속임수, 사기, 불법, 편법을 써서 불공정한 거래를 한 경우 그것을 잡아내는 것이죠.
가만 놔두면 가장 피해보는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이 되거든요.
그래서 왕이 이렇게 경제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시장을 감독하고 어긴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사회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잡아가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저울과 저울추가 주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공정과 정의는 모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질서이자 지혜입니다.
지도자는 이런 경제정의를 잘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공의가 중요한 이유를 또다시 12절에서도 설명합니다.
왕이 이런 사회질서를 잘 유지해야 왕의 권위가 제대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린다면 왕 또한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왕위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왕은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우대하고, 악한 신하들은 처벌할 줄 알아야 합니다.
13절은 그것을 보여줍니다.
왕은 공의로운 말을 하는 자, 올바른 말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고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매번 자신의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신하라면 오히려 싫어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왕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자들을 향해서 진노를 보여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왕의 얼굴빛이 밝다’는 것은 왕의 인자함을 의미합니다.
14절에서 왕은 악한 신하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왕에게 단호한 모습만 있어서는 안되고, 인자하고 긍휼한 모습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강직함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부드러움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런 지도자의 마음은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관심을 갖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도자의 긍휼한 마음,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마치 봄비를 품고 있는 구름과 같다는 것입니다.
봄비가 어떤가요?
봄비는 식물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렇듯 지도자의 이런 마음이 백성들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질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이자 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질서를 사회가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 바로 왕,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 분께 맡겨드릴 때 이런 삶을 인도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맡길 때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귀중품을 맡아주는 목욕탕주인보다 수천배 믿고 신뢰할 만한 분이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꼼수, 묘수, 무리수를 두면서 살아가는데 우리는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야 하나요?
그러나 여러분 아시나요?
묘수 세번이면 바둑에서 필패한다는 사실을요.
묘수만 찾으려 하다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평범하고 좋은 수를 두다보면 어느 순간 ‘신의 한 수’가 보이는 법입니다.
평범하고 좋은 수가 바로 어질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모두 하루 하루 이런 평범하고 좋은 수를 두는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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