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한 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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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2 토요일 새벽기도회
찬송 : 288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본문 : 엡5:18-21(신p.315)
하나님,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내 뜻과 내 힘과 내 의지로 단 하루도 살아낼 수 없고무엇 하나 이룰 수 없는 무능한 우리에게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하심이 오직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를 붙드시고, 마침내 영원한 천국에까지 이르게 하실 삼위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하여 찬송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경배합니다. 영광을 받아 주옵소서. 놀라운 구세주 되시는 주님, 주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이와 같이 크고 놀라운데, 여전히 연약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며 마주하는 작은 고통과 고난, 어려움과 질병으로 인해 허덕이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주실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것들이나, 연약한 우리는 이 마져도 제대로 인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래서 우리를 억누르고 있고, 우리를 답답하게 만들며, 우리를 고통으로 이끌고, 우리의 발을 수렁텅이로 잡아 끌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들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옵소서. 회복시켜 주옵소서. 이 새벽의 시간에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우리에게 주실 말씀을 듣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만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을 보면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성령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갈 것에 대한 여러 말씀들을 발견하게 된다. 빌3:3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라고 말씀하시고, 유1:20을 보면 ‘…성령으로 기도하며’ 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행6:10을 보면 스데반 집사도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눅10:21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라고 기록하였다. 즉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의 힘과 능력으로 신앙생활해야 한다.
이를 두고 ‘성령 충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충만’이라는 말은 ‘채울 충’에 ‘찰 만’을 써서 국어사전의 의미를 보니까 한껏 차서 가득찬 상태를 가리킨다.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내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방금 읽은 18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술로 가득채워진 상태와 성령으로 가득채워진 상태 둘을 비교하고 있다. 술 취한 것은 술로 그 사람이 충만해져서 술에 지배당하는 상태이다. 반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상태이다.
특별히 18절 말미에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라는 이 구절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면, 5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장 처음에 ‘오직’ 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다른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오직 이라는 것은 유일한 것이다. 단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는 성령 외에 다른 무엇으로 충만해져서는 안된다. 성령 외에 다른 무언가가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해서는 안된다. 오직 성령이다. 두번째로는 ‘받으라’ 라고 말한다. 이는 ‘이렇게 하는게 좋지 않을까?’ ‘이러면 어떨까?’ 하는 식의 권유가 아니다. ‘네가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 하는 추천이나 권면도 아니다. 명령이다. 신자들에게 이러한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은 불순종의 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번째 생각해볼 것은 ‘받으라’에 대한 부분인데, 이 ‘받으라’ 라는 부분은 성령충만을 이루는 것이 내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의 상태가 지속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받으라’는 시제가 미래시제도 아니고 과거 시제도 아닌 현재형이다. 이 일을 구해야 할 것이 내일도 아니고 언제인지 알 수 없을 머나먼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이다. 그리고 헬라어의 현재형은 반복을 의미하는데,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바라고, 구하며, 원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성령 충만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이에 대해 3가지로 말씀드린다. 첫번째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는 것이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화답’하는 것이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즉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을 안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인가?
상상해보라. 덜컹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큰 물통에 물을 한 가득 담아서 타는데, 뚜껑을 닫질 않았다. 그래서 차가 흔들릴 때마다 그 안에 가득 담긴 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만일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이 매실액기스였다면, 흔들릴 때마다 매실액기스가 쏟아졌을 것이고, 또한 만일 오물이 담겨 있었다면 흔들릴 때마다 오물이 쏟아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만이 가득하고 원망이 가득하면 그 마음에 든 것이 고스란히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쁨이 충만하고 감사가 충만한 사람은 그 안에 충만한 것이 고스란히 전해질 수 밖에 없다.
본문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무엇을 화답한다고 말씀하는가? 그 마음에 충만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이다. 우리는 왠지 성령 충만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기를, 왠지 방언을 유창하게 할 것 같고, 신유의 은사가 일어나며, 예언을 하는 외적 은사들을 연상할 수 있는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나온다고 말씀한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그 사람 속에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성령충만의 사람, 그래서 방언도 하고, 신유의 은사도 있고, 예언도 하는 것 같던 그런 사람들이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차 있고, 은혜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의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고, 직분자들을 시기하며 질투하는 말들이 쏟아지며, 내 가정, 내 이웃에 대한 원망의 말들을 늘어놓는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은사는 받았을지 모르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아니다. 성령충만한 자는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침묵이 금이라 하여 아예 입을 닫아버린 자가 아니라 말을 하되 아름다운 말을 하는 사람이다. 기쁨과 즐거움, 은혜와 감사, 시와 찬미, 신령한 노래와 같은 말이다. 듣는 자들이 그로 말미암아 은혜를 누린다.
두번째 특징은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감사한다는 것이다. 20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인데, 여기서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범사에’ 와 ‘항상’이다. 모든 종류에 대해서 언제나 늘 감사하는 것이다. 내가 형통할 때에나, 내가 성공할 때에나, 내가 잘 나갈 때이나, 내가 부할 때나, 내가 일할 때나, 내가 먹을 때나, 내가 높아질 때 뿐만 아니라 앞길이 꽉 막힐 때나, 내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나, 내가 쓰러질 때나, 내가 가난할 때나, 내가 실직했을 때나, 내가 굶주릴 때나, 내가 낮아질 때도 감사하는 것이다.
말이 쉽지, 잘 되고 형통할 때 감사하는 것은 쉽지만, 내가 실패하고 넘어지고 고통 중에 있고, 내가 뭔가를 상실했을 때에도 어찌 감사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우리는 부단히 기도해야 한다. 저희 가정의 기도제목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부하게 하시거나, 높이시거나, 뭔가를 얻게 하시거나, 형통하게 하실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게 하실 때에도 감사하고, 낮아지게 하실 때에도 감사하고, 뭔가를 상실케 하실 때나, 실패하게 하실 때 조차도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진실한 성도는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다. 믿음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소망이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니 그 기쁨들이 우리 밖으로 밀려나오는 것이다. 내가 감추고 억누르려고 해도 그 소망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 기쁨과 소망은 감출 수 없다. 잠시 잠깐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고통을 겪고, 실패와 역경을 당하여도, 그것들은 성령 안에서 충만하게 누리는 기쁨과 소망을 막을 수 없다.
마지막 특징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한다는 것이다. 21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여기서의 복종은 일방적인 복종이 아니다. ‘당신 왜 내 뜻과 내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가?’ 라고 따질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복종은 한 방향으로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차 복종하라’ 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가능하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복종하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복종하며, 스승과 제자가 서로에게 복종하고, 직분자들끼리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자들의 마지막 특징은 복종이다. 복종은 오로지 자신을 낮출 때에 가능하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에 가능하다. 교만한 자가 복종할 수 있는가? 없다. 자기를 과시하는 자가 남의 말에 순종할 수 있는가? 없다. 성령 충만한 자들은 내가 작아지고, 내가 섬기는 자가 되고, 내가 돕는 자가 되고, 내가 남을 세워주는 자가 된다. 벧전5:6의 말씀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말씀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저와 여러분들을 영광 중에 높이실 그 날을 믿음으로 바라보자. 사랑하는 신랑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우릴 존귀한 주의 신부로서 높이실 그 순간을 소망하자. 그래서 그 믿음과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우리의 지체된 자들에게 복종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들을 사랑하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하자. 이것이 성령 충만한 자들의 모습이다.
말씀을 맺는다. 성령 충만한 자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한다. 범사에 항상 감사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한다. 바울은 이와 같은 성령 충만의 모습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하였다. 방향제나 향수는 흔들릴수록 그 향이 더욱 진하게 뿜어나온다. 비록 이 세대가 복음과는 거리가 멀고 점점 더 죄악을 향하여 달려가는 가운데 교회를 향한 믿음의 도전들을 주고, 때로 교회를 억압하며 교회를 흔들려고 할 때, 우리의 교회가 이와 같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그 기쁨과 감사와 소망은 더 이상 감출 수 없이 우리 안에 충만하다 못해 이제는 세상을 향하여 흘러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이 먼저는 내 안에, 그리고 우리의 모임 가운데, 우리의 교회 가운데 충만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하겠다. 이 일이 내가 뭔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지는 일이라 하셨으니 끊임없이 우리의 공동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러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길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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