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인도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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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설교 / 2021.04.28
본문 : 출애굽기 13장 1-22절
제목 : 기억해야 할 인도하심
설교자 : 윤영준 목사
주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인도해가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초태생 규례)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는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무교절 규례)
3)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전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을 인도해가실 것입니다.
[도입]
8월 15일은 어떤 날일까요? 194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기억해야 할 광복절입니다.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라디오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35년의 길고 길었던 대한민국의 일제강점기는 막을 내렸습니다. 한반도의 모든 국민들이 독립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광복절’의 ‘광복’은 빼앗긴 주권을 다시 찾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광복절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날임과 동시에 빼앗겼던 우리의 주권을 다시 되찾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최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을 기점으로 해서 430년간의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월절은 단순히 애굽으로의 해방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절은 이야기합니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유월절 사건이 일어난 달이 히브리력으로 7월이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7월을 곧 해의 첫 달, 1월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나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애굽의 종으로서 애굽 사람들에 맞추어가면서 살았다면, 이제 거기서 벗어나 하나님의 역사와 시간표 안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본문은 고센 땅에서 출애굽한 백성들이 하루이틀 길을 걸어 숙곳에서 받은 말씀인대요. 13장 말씀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 후의 삶의 규례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본문1- 초태생 규레 : 너희는 내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너희는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시작됩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모세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지난 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밤 애굽 땅은 큰 재앙이 있었습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애굽의 장자들이 모두 죽은 것입니다. 바로의 첫째 아들로부터 감옥에 있었던 사람의 아들, 심지어 애굽인들의 가축의 처음 난 새끼들까지도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모세와 이스라엘은 애굽 바로 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라암셋에서 걸어서 하룻길인 숙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들린 말씀이 바로 ‘이스라엘의 장자들’에 대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첫째 아들들로는 부족하셔서 이스라엘 장자들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니시겠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것들을 원하시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게서 건져내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그들이 불쌍했기 때문일까요? 해외에서 들려오는 뉴스들 가운데 안타까운 소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 속으로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는 관점이 단순한 안타까움과 불쌍함이실까요?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들을 긍휼이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침내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왕과의 첫 대면서부터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백성을 보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너의 소유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의 소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는 단순히 애굽이라는 장소를 빠져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핵심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은 누구의 것인가?’ 질문에 대한 답. 그리고 그 답에 대한 책임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와 모세의 줄다리기 하는 ‘제사 문제’는 애굽을 빠져나가려는 핑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단순한 종교 의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2절은 말합니다. “다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12절도 말합니다. “다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스라엘과 그 소유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확인되어야 하는 언약 백성의 정체성이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바라는 소원이 있고,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기도 제목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먼저 해야하는 것은 ‘나는 누구의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이유는 막연히 우리가 불쌍하기에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온갖 억압들로부터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를 자신의 소유, 자신의 백성,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마치 우리가 내 물건에 이름표를 붙여놓듯이, 우리를 향한 자신의 소유권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굳이 장자와 첫 새끼만 이야기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것이 대통령이고, 기업의 총수가 그 기업을 대표하듯이 장자가 그 가정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자들이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이스라엘은 장자로서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이스라엘의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돌리고, 이스라엘의 장자와 백성들은 다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이십니다.
12-13절입니다.
“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여기는 굉장히 의미심장하면서 중요한 대목입니다.
장자와 처음 난 것들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데 이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정결한 제물을 드릴 때 / 또 하나는 부정한 제물을 드릴 때입니다.
정결한 짐승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려질 때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게 되어있습니다. 그 제물 그대로를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정결하지 않은 부정한 짐승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의 피로 대속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장자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요? 정결한 제물 or 부정한 제물인가요?
부정한 짐승의 예로 오늘 본문은 나귀의 첫 새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통굽을 가지고 있고,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은 부정한 동물입니다.
또 성경에서 나귀를 어떻게 묘사하나요? 고집 센 동물, 등에 짐을 멘 동물로 표현합니다.
고집이 세고, 짐을 진 부정한 것.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바로 나귀는 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나귀와 같이 완고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저기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길들여지지 않는 나귀 새끼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러한 나귀 첫 새끼는 부정하기에 목이 꺾일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나귀 첫 새끼를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속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속은 빚을 대신 갚는다는 것입니다.
목이 꺾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빚은 무엇으로 갚아야 하나요. 바로 누군가 대신 죽고 피흘려야만 갚을 수 있습니다. 부정한 나귀 첫 새끼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정결한 어린양이 대신 죽어야 하는 것이죠. 어린양의 피가 있기에 나귀는 하나님께 받아드려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정하고 완악한 우리는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만 대신 피를 흘려야만 살 수 있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은 정결한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첫 걸음은 바로 ‘대속’입니다.
애굽에 있을 당시 열번째 마지막 재앙 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를 대문의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일이였습니다. 어린양의 피의 대속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양의 피의 대속을 원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 / 죄사함을 받았습니다.여기서 대속이라는 말은 빚을 대신 갚는다는 말일 뿐만 아니라 소유권도 함께 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당근마켓이 유행입니다. 쓰던 중고물건을 올리고 사고 팔고를 하는 것이죠.
저도 퇴근하는 길에 아내에게 카톡으로 ‘이제 출발’이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아내에게 전화가 옵니다. 그런데 가끔 어디 좀 들릴 수 있냐하면, ‘아기 물건’ 좀 받아올 수 있냐라는 연락을 받기도 합니다.
정당한 대가를 주고 물건을 받는거죠. 그 후에는 그 사람이 이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아니죠. 정당한 대가를 치렀다면, 이제 그것은 내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른 사람들은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대해서 쉽게 말하기 쉽습니다.
“신앙생활 뭐 별거아니네. 그냥 내 죄를 고백하고,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것 아니야? 구원받았으니까 끝난거 아니야?” 착각하는겁니다.
그러나 구원은 단순한 생명 연장의 차원이 아닙니다. 구원받았으니 끝! 이제 내 맘대로 살거야 / 하나님 자유주셔서 감사해요가 아닙니다.
구원에는 소유권이 함께 걸려있습니다. 구원받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것 - 이마에 도장이 꽝 찍혀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은 이제 나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신 것도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이유는 단순히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를 구별하여 / 내 것이라 말씀하시고자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본문2 무교절 - 하나님의 소유된 우리는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3절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
유월절 전의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의 삶을 살았습니다.
노예는 자기 시간이 없습니다. 자기의 재산도 없고, 자신의 미래도 없습니다.
그런 노예의 삶을 살다가 430년의 노예생활을 청산하려니 짐은 짐대로 챙겨야하고 마음이 얼마나 급박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요이땅!하면 곧바로 튀쳐나가야 했기에 그들은 옷을 다 갖춰입고, 신을 신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식사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방식대로 누룩을 밀가루 반죽에 넣고, 발효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 유월절 기간이 되면, 평소와는 달리 급하고 불편하고 맛없게 식사를 함으로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누룩은 성경에서 종종 죄를 상징합니다. 누룩을 넣은 빵이 부풀어오르는 모습을 변질과 외식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레위기에서는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물에 누룩을 넣지 말라고 합니다.
6-7절입니다.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
무교절은 누룩을 치우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유월절 전에 대청소를 하면서, 바닥에 떨어져있는 과자 부스러기까지도 제거한다고 합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노예의 삶을 벗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제 죄된 모습과 옛 습관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내 인생, 시간, 미래, 소유는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나의 영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이상 세상의 종처럼 살아가고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주인이신 하나님의 뜻 아래) / 하나님의 백성(왕이신 주님의 뜻아래) / 하나님의 자녀(가장이신 하나님의 뜻 아래)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전의 내 뜻과 고집을 꺾고, 내가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8-9절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본론3 -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전하라]
무교절 규례와 장자의 규례들의 마무리는 동일합니다.
8-10절입니다.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16절입니다.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이마에 작은 네모난 상자를 하나 달고, 왼쪽 팔에도 하나를 묶습니다. 이것은 테필린이라고 하는대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기억하기 위해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이런 유대인들의 구전 문화를 가볍게 웃고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19절입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나의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요셉은 죽기 전에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 유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유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실제로 그 후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모세가 요셉의 이 말을 전해 들었으며, 기억하고 행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50장과 출애굽기 13장이 성경으로 몇 장 안떨어져있기에 당연히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요셉 시대와 모세 시대의 시간차는 무려 430년입니다. 저희로 생각하면, 조선시대의 조상 중에 한 분이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를 기억하고 행했다는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성함도 잘 모릅니다. 게다가 모세가 모세오경을 기록했기에 이전에는 기록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기록이 없었다면 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죠. 어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나는데 어떻게 430년 조상이 한 말을 알고 실천한단 말입니까?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구전 가르침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세대를 넘고 넘은 신앙의 가르침이 430년을 흘러흘러 모세에게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 세대 신앙 계승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어렵고 수고스럽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계승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세대 간의 신앙 전승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유월절 규례가 언제까지 흘러갈까요? 한 세대, 두 세대가 아닌 수십 세대를 넘어 예수님 때까지 이어집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시대간 차이는 1500년입니다. 1500년을 넘어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져왔고, 예수님은 내가 제자들과 이 유월절 식사 나누기를 원하고 또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수천년 동안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했던 디아스포라를 이루었던 유대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생존할 수 있었을까요?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억하며, 또 자녀들에게 전하고 전했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기억하고 전해야 합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전해야 할까요?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에서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유대인들이 유월절의 사건을 기억하고 대대로 전하며 하나님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기억했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 끝날까지 기억하고 전해야 합니다.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전하는 시간은 단순한 역사를 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우리의 주권자가 누구이신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이 누구이신가?’ ‘우리 공동체의 주인은 누구이신가?’ ‘모든 역사의 주인이 누구이신가?’ 강한 손으로 우리를 건져내시고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려주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감정 조절사나 헬퍼가 아니시고, 또 슈퍼히어로처럼 우리의 어려운 상황에 갑자기 나타나서 도와주고 사라지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동시에 우리의 주권자이십니다.완고하여 끊임없이 내 고집대로 하려는 부정한 인생을 자신의 피로 대속하시고 영원한 생명과 해방을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왕, 나의 주인이 되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며, 그 분을 기억하고 전해야 한다.
[결론 -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바로에게서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백성,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함이였습니다.
“너는 내 것이다” 말씀하시는 것이죠.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내 삶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쫒아 사는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은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이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발걸음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백성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가시도록 인도해가십니다.
그 당시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지중해 해안’을 따라 걷는 길입니다.
열하룻길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지름길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안 길에는 ‘블레셋’이라는 민족이 터를 잡고 있었고, 그들은 그당시 이미 철기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길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방향은 최단경로가 아니십니다. 목적지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정해져있지만, 그 방향도 그 시간도 하나님께서 정하여가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는 것’을 알게 하는 방향으로 그들을 인도해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굉장히 세심하십니다. 하나님은 갓태어난 아이에게 뛰라고 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초신잗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어린 아이의 신앙을 원하지도 않으신다. 날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기를 원하시고, 때에 맞추어 세심하게 인도해가십니다.
마지막으로 21-22절을 함께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광야라는 새로운 환경 안으로 하나님과 함께 걸어들어갑니다. 현재 우리도 코로나라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광야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드시 찾아오리라’ 약속했던 주님이 우리의 삶에 이미 찾아오셨고, 우리를 인도해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기억해내는 일입니다.
광야라는 처음 겪는 환경이 주는 감각들로 인해서 비틀대기보다 나의 삶을 인도해가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이 원망스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앞서가는것 같은데 나만 뒤쳐지는 것 같아보일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했으면 내가 더 많이 했고, 말씀을 읽었으면 내가 더 많이 읽고,
섬기기를 했으면 내가 더 많이 섬겼을 것 같은데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나만 뒤쳐진 것 같아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소유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때로는 지름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미련해보이는 길일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광야와 같이 위협받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에 홀로 보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주님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의 광야길을 함께 하시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가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과도 함께 하시며, 인도해가실 것입니다. 그 과정이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전하고 정금같은 믿음으로 아멘!으로 나아가시는 온 사랑의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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