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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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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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도입
예전에 광고업계에서 일하시는 분을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광고를 만드신다기에 저는 그분께 “광고를 만들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답해 주셨습니다. “좋은 광고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익숙함과 새로움입니다. ‘저 광고는 내 얘기네’라고 하면서 익숙함을 느껴야 사람들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익숙함만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계속 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새로움입니다. ‘저것은 뭔가 좀 새로운데. 궁금하다. 갖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저는 이 대답을 듣고 이래서 광고가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또 편하다고 느끼지만 그 익숙함에 금세 싫증납니다. 그래서 새로움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평안한 삶이 편하고 좋지만 막상 특별한 일이 없는 삶을 살다보면 무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안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다가 하나님을 잊고 죄를 짓습니다.
호세아의 말씀을 듣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호세아는 주전 8세기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의 왕이었을 때 활동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열왕기하 14장 23절과 24절은 여로보암 2세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찬란했던 솔로몬 시대의 영토만큼 회복시킬 정도로 성공을 거둔 왕이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또한 활발한 대외무역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렇게 나라가 발전할 때 이스라엘은 번영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호세아 4장 6절과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번성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고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호세아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물질적으로 번성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풍요에 빠져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인 호세아 6장을 통해 하나님을 잊고 범죄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기 원하실까요? 본문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Ⅱ. 회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 읽은 호세아 6장 1절부터 6절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분은 1절부터 3절이며, 두 번째 부분은 4절부터 6절입니다. 첫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고백을 담고 있다면, 두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먼저, 6장 1절부터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1절과 같이 스스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선포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는 선포는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였던 자신들의 모습을 회개하는 목소리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만을 섬기자는 자성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가면 비록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신들을 찢으시고 치셨지만 도로 낫게 하실 것이며 싸매어 주실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2절과 같이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살리실 것이며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은 3절과 같이 형식적인 예배에 만족하기보다 하나님을 알자고 서로 권면했습니다. 3절의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표현은 “계속해서 여호와를 알아가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계속해서 알아갈 때 하나님은 새벽 빛과 같은 은혜, 마른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은 은혜를 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1절부터 3절은 죄악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의 표현이자 자신들을 회복시키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믿음의 고백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 이제서야 너희가 너희 죄를 회개하는구나! 너희의 죄를 용서하고 회복시켜주마”라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함께 4절을 읽겠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4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고백을 받으시는 기쁨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자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근심 어린 목소리로 한탄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와도 같습니다. 여기서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유다는 남유다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를 향해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에게 애끓는 마음으로 “얘들아!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내가 어떻게 해야 너희가 돌아올 수 있겠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며 믿음의 고백을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셨을까요? 4절 후반절을 보니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인애, 즉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침 구름이나 쉽게 없어지는 이슬과 같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랑이 지속되지 않고 변질되었기에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던 것입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고백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꾸준히 지속되기보다는 아침 구름이나 이슬처럼 금방 사라져 버리고 변질되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죄를 회개했으며 하나님을 힘써 알아가겠다는 고백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계속될 것만 같았던 그들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바뀌자 금세 사라져 버렸습니다. 회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 같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새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빠져 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녀의 학업과 미래가 더 중요하고, 이 세상에서 먹고 살아가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고 한탄하시며 안타깝게 말씀하십니다.
Ⅲ. 인애
그렇다면 아침에 반짝 했다가 사라지는 구름이나 이슬과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그와 같이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성경에서 이 말씀만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두 가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번제, 즉 예배를 원하지 않는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제사와 번제를 비교하는 것이지 예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사와 번제, 즉 예배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입니다. 다만, 아무리 예배가 중요해도 형식적으로만, 말로만 드린다면 그런 예배보다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말씀인 동시에 우리에게도 원하시는 바입니다.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인애입니다. 인애라는 우리말은 어질 인(仁), 그리고 사랑 애(愛)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어진 마음으로 사랑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질다고 하니 뭐든지 다 받아주는 너그러운 사랑으로 생각됩니다. 인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헤세드입니다. 이 헤세드는 자비, 선하심, 신실하심, 충심을 뜻하면서 조금 더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세드라는 단어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사용되는데 이때는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상대방을 향한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을 뜻합니다. 참된 우정으로 유명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서 바로 이 헤세드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갈 때 사무엘상 20장 8절에서 요나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즉 바라건대 네 종에게 인자하게 행하라 네가 네 종에게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 하니라).” 이 말씀에서 “인자하게”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당시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사울의 미움을 받고 도망가야 했던 다윗보다 훨씬 더 우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요나단에게 인자하게, 즉 미천한 자신에게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 헤세드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이 도망가도록 돕는다면 자기 아버지 사울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요나단이 굳이 다윗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의 부탁대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 주면서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요나단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친구 다윗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아버지 사울로부터 미움을 사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요나단은 도망가는 다윗에게 훗날 그가 왕이 될 때에는 자기와 자기 집에 헤세드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윗은 훗날 왕이 되고 나서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에게 헤세드를 베풀며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요나단과의 약속을 꼭 지켜야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나단은 전쟁에서 죽은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다윗이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해를 당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친구 요나단이 베풀어주었던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 헤세드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에게 자신도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셨던 인애, 헤세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그들에게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잊고 떠나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셨고 한결 같은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결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고 우상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낫게 하실 것이다”라고 외쳤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좋은 제물도 아니요, 화려한 예배도 아니라 나를 향한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늘 한결 같기 쉽지 않습니다. 고난을 만나면 그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살고자 자기 신념이나 생각을 바꿀 때가 있습니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을 잘 하는 방법이나 기술이 따로 있을까요?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만 들으면 어떻게 연애를 잘하는지에 대한 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음악이나 미술을 배우듯이 사랑도 배워야 하는 일종의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사랑에 대해 공부도 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노력도 해야 하며, 사랑을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관심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합니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사랑은 나에게 갑자기 찾아오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경험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인애, 즉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로만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해 베푸시는 그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닮아가며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입니다. 서림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신실한 사랑, 인애를 매일의 삶속에서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변함 없는 신실한 사랑, 인애를 경험하는 데서 끝나지 말고 받은 사랑을 하나님께도 그대로, 변함 없이 신실하게 드리시고 이웃에게 베풀기를 축복합니다.
IV.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한 우리에게 원하시는 두 번째는 6절 후반절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도, 지금 말씀을 듣는 우리도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치고 하나님을 모를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다아트’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압제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아신다고 했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아는 것’은 상대방의 아픔이나 고통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며 불쌍히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히브리어 단어 ‘다아트’는 부부가 한 몸을 이루어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호세아 6장 6절의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마치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며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하나가 되듯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아가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그 어느 민족보다 잘 안다고 자신했습니다. 애굽의 압제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자신들을 친히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은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율법과 말씀을 주신 하나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그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각종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안다고 확신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정작 “너희가 나를 알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적하셨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아가며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려는 마음과 노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며 친밀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남편, 아내와 일평생 친밀한 관계를 갖다보니 서로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사귀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나갈 때 어느 순간에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한결같이 신실한 은혜, 즉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다보면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가며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인애는 변할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인애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며 변함이 없는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 한결 같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 인애가 우리를 여전히 붙들고 계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두 가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나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을 받는 데서 그치지 말고 우리도 하나님께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을 드리며 사랑을 베푸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이것이 인애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V. 결론 및 적용
요즘 많은 사람들이 복잡하고 정신없는 삶속에서 자기의 개발을 위해 습관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에 일조한 책 중의 하나가 <타이탄의 도구들>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성공한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침에 일상적으로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자리 정리하기, 명상하기, 한 동작을 5회에서 10회 반복하기, 차 마시기, 아침 일기 쓰기 등.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이런 작은 습관을 매일 아침에 반복하고 이루어내면서 결국 큰 목표를 이루어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습관 혹은 루틴을 만들기 위해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함께 만나 참여하고 있고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습관을 만드는 데 투자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meet me라는 플랫폼을 들어본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밑미는 자아성장 큐레이션 플랫폼으로 온라인으로 함께 습관을 만드는 모임을 돈을 내고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습관이나 일종의 루틴에 열광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사소하고 단조로운 반복으로 보이지만 그 습관이나 루틴을 통해 자신이 의미 있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글을 쓰고 운동하면서 바쁜 삶속에서 내가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고 있구나 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습관은 의식 혹은 의례적인 일을 뜻하는 영어 단어 ‘리추얼’이라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그런데 ‘리추얼’은 원래 종교상의 의식 절차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우리에게는 리추얼은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주 반복되는 예배가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반복되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배 외에도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경건생활도 단조롭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오늘 말씀의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우리에게 갖도록 도와줍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침대나 이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짧은 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 성경을 노트에 그대로 옮겨 적는 필사, 아침 출근길에 차 안에서 듣는 목사님의 설교 말씀 등. 이런 소소한 경건의 습관이 매일의 삶에서 반복될 때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 삶속에서 채워지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대단한 체험이 아니라 이러한 작은 경건의 습관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변함없이 신실한 사랑을 베푸시듯이 우리도 그 하나님께 변함없는 사랑을 드리기 위해 매일의 평범한 삶에 감사하며 그 일상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경건의 습관을 지속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묵상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외치는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인애를 깊이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립니다. 예물을 드리는 우리의 마음과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코로나19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피할 길을 내어주시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으로 위로하여 주옵소서. 육체의 연약함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시고 속히 건강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안식주간 가운데 있는 위임목사님에게 영육간 강건함을 허락하시고 날마다 새 힘을 공급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서림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변함이 없는 사랑,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들은 여러분도 하나님을 변함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 속에 하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하나님을 닮아가기 결단하는 서림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가정 위에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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