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왕상 19: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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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MBTI가 어떻게 되세요? 라는 말 요즈음 자주 들으시지 않으십니까? MBTI란, 마이어스 브릭스 유형지표라는 말의 심리검사의 줄임말입니다. 이 검사는 외향성과 내향성, 감각 또는 직관, 사고 또는 느낌, 판단 또는 지각 중에서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질문지들을 피검자가 풀어나가면서 이루어집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그 결과를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인지를 파악하고 행동양식 또한 유의미하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MBTI가 뜨거운 관심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검사가 자신의 성향이나 행동양식을 비슷하게 맞추고 더 나아가 타인의 성격유형을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이 무엇을 어떤 사람인지 대강 파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앞두고 제가 왜 MBTI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사람마다 각자의 MBTI결과가 다릅니다. 이 말은 사람마다 선호하는 환경이 다르고 사람마다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또 누군가는 반대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좋아합니다. 여럿이서 왁자지껄 노는 편이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친한 사람 둘셋이서 노는 것이 편한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 맞추어주기도 또 맞추기도 하면서 관계라는 것을 맺습니다. 서로가 다르기에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관계를 맺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람이 정말 매력적이어서 나와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인데도 서로가 맞추어나가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관계의 조율을 잘 하는 사람들 곁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인싸’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강점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나에게만 맞추어주기를 바라는 사람,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여주길 바라는 사람의 주변에는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이 적을 확률이 높습니다.
제가 보니 여러분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배려도 하고 존중하며 칭찬하고 칭찬을 듣는 인싸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십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서론
서론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나눌 말씀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길 소망해봅니다.
본문 속에서 우리가 알고있는 친숙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로 엘리야라는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열왕기상 17장에 별안간 등장하여서 아합 왕에게 자신의 말이 없으면 수 년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는 까마귀들이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가져오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한 과부의 집에서 음식을 마르지 않게 만드는 기적들도 일으킵니다. 심지어 엘리야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들 중에서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바알 선지자들과의 영적 전투입니다. 총 850여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이기고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당당하게 묻는 엘리야의 모습, 그리고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참 감동과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멋지게 하나님을 선포한 엘리야의 모습이 19장으로 들어와서 급격히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인 엘리야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엘리야를 자신이 섬기던 신들의 이름으로 죽일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방인이었던 이세벨이 섬기던 신이 바알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브엘세바로 도망가고 거기에서 모자라 광야로 하룻길 즈음 더 들어가서 그곳에서 자신은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고백합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무너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보이신 기적을 통해 무슨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랬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엘리야가 여러 기적들을 통해서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심판과 다시금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알 선지자들을 숙청했고 이제 이스라엘이 돌아와야 하는데 돌아온 결과가 자신을 죽이려고 다짐하는 이세벨의 경고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엘리야는 자신이 경험한 기적들과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이제 넉넉하니 이방 여인에게 거두일 목숨일 바에 차라리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실망했고 좌절했습니다. 여러분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셨고 모든 기적과 이사들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는 하나님의 일을 했을 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지는 못했음 보게 됩니다. 최소한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께 실망했고 또 삐져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경험이 없으셨습니까? 분명히 내 삶에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기적적인 일들을 행하셨는데 정작 그 은혜는 온데간데 없고 내가 기대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자 하나님을 향한 실망과 절망만 남아있던 때가 있지는 않으셨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지 않아서 하나님께 삐져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지 못했던 엘리야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음식을 주시고 40일을 더 걸어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나눌 본문의 사건이 벌어지는 호렙 산으로 인도하십니다. 호렙 산은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시내 산과 같은 곳입니다. 이제 이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또 저와 여러분께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함께 귀 기울여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엘리야는 호렙 산의 어느 굴에 들어가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원어나 영어 번역본을 보면 이 말은 엘리야에게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냐고 묻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물음에 엘리야는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로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서 남들과는 다르게 하나님께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직 저만 남았고 그들이 저의 생명을 찾아서 빼앗으려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는 지금 이세벨을 피해서 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는 아합의 이야기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세벨의 이야기도 없는 것을 봅니다. 엘리야는 오직 자신의 사역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자신이 하나님 앞에 특별한 선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엘리야가 서니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숩니다. 그리고 지진이 있었고 불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 나타나는 자연현상들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뵈었을 때도 비슷한 자연현상이 있었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엘리야는 이 자연현상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바알 선지자들을 이겼던 때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도구가 바로 ‘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구름과 바람을 일으키셔서 비를 내리시고 3년의 기근을 끝내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했고 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곳에 하나님께서 계셔야 하는데 웬일인지 이 곳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엘리야가 원했던 것은 바람과 불 혹은 여러가지 기적들로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자신이 바람이나 지진 혹은 불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엘리야가 바랐던 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의 전부가 아님을, 어떤 기적이나 심판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의 전부가 아님을 말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역사하여 주시기를 바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멋지게 바람으로 또 지진으로 불로 어떤 초자연적인 방법들로 내 삶 속에 역사하여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맞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서 그렇게 역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역사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베푸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엘리야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께 실망하고 삐져있었습니다. 우리도 같은 이유로 하나님 앞에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왜 나의 기도와 삶에 응답해주시지 않으시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품고 하나님 앞에 따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시는 방식대로 역사해 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초자연적인 현상에 더 이상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음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실 것이라 말씀해주십니다. 계속해서 살펴볼까요?
하나님께서는 불 후에 세밀한 소리로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엘리야는 이 소리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서 굴 어귀에 섰습니다. 하나님을 영광을 보는 자는 모두 죽기 때문에 아마도 그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던 것 같습니다. 그 소리는 다시금 엘리야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리고 엘리야는 동일하게 대답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입니다. 그리고 오직 나만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서 빼앗으려 합니다. 아직 엘리야의 마음이 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차라리 그 이유를 설명해주시거나 뭐라 혼내기라도 하시면 속이 시원할텐데 그 답은 동문서답과도 같은 이야기들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길을 돌이켜서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엘리야에게 어떠한 대답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바로 순종하여 움직이는 것을 이후에 본문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엘리야에게 무슨 답이 되었을까요? 엘리야는 깨달음을 얻어서 다시금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깨달았던 것은 여호와께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시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람과 불과 지진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위대한 일들, 기적적인 일들을 일으키는 자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는 자들이 역사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당장 정치적인 체제는 아합과 이세벨이 역사를 주관하는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왕과 선지자들을 계속해서 세워나가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다윗이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 못했던 것처럼 엘리야 또한 자신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거나 회개를 불러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기적이나 놀라운 일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시고 역사를 사용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들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때에 이방 왕을 사용하셔서까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또 회복하시는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왕 하사엘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남은 자들은 예후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 남은자들은 엘리사가 죽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자기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지만,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 7천명이 있었음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뜻을 위하여서 예비하신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삐져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상한 마음과 심령을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일과 뜻에 자신을 맡깁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속 엘리야는 하나님과 가까워보이십니까? 엘리야는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자신을 통하여서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멋진 기적들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시고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마음이 상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좌절과 실망의 이유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이루신 것들을 보았고 이루실 일들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오직 자신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들을 구할 때를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큰 역사와 기적을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효과적인 결과들을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기를 원하고 또 바랍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과 기적들을 행하시기를, 저와 여러분의 기도에 선하게 응답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 기도와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역을 하던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떤 일들을 이루시던지 그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일들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고 불이 떨어져도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라 자신과 친밀해지자고, 자신의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밀한 음성을 들을 때야말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항상 눈에 보이는 큰 역사와 기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조차도 오늘 제가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의 삶이 송두리째 변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들이나 기도의 응답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대로 역사하여주시지 않을 때에 우리는 주저앉아 하나님께 삐진 태도를 보이진 않으십니까? 마치 오늘 본문 속 엘리야와 같이 말입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없음을 우리는 고백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복된 소식을 선포해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게 지내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말씀이십니다. 우리에게 본이 되셔서 우리로 말미암아 모든 일들을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또 그분의 사역을 바라봄으로 예수님과 같이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
함께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 9절에서 12절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4:9–12 (NKRV)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시다시피 40일을 금식하시고 가장 배고프고 가장 힘이 들 때에 시험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 때에 달콤한 사탄의 속삭임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방법과 관련하여 소개시켜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한 번 보실까요?
한 청년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가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섰습니다. 그리고 별안간 그가 떨어집니다. 그런데요, 떨어지는 중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지키더니 땅에 떨어질 때에 어떠한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게 또 사뿐하게 착지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믿으세요.”
이 때 당시 예수님께서는 별 볼일 없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의 출신에 한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랐고 그를 그저 요셉의 아들 예수라던가 목수의 아들 정도로만 생각했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잘난 것 하나없는 유대인 청년이 외치는 천국이나 복음은 어떤 소리던지 별 효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외치는 소리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불편하게 다가왔고 얼마나 불폈했는지 예수님을 죽이고자하는 생각마저 하게 만들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청년 예수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행하였다면 어떠하였을까요?
“40일을 금식하던 한 유대인 청년이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데 글쎄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받치고 그가 땅에 떨어질 때에 돌이랑 부딪치지도 않았대.”
별볼일 없던 청년은 아마도 단숨에 인기를 얻었을 겁니다. 그리고 영향력을 얻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그는 요셉의 아들이나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선지자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기적을 행하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면 그의 인기와 영향력에 힘입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잘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뿌리쳐내십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 시험이 다 끝나신 후에야 천사들에게 수종을 받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무조건 이겨내셔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또한 사탄이 짰던 계획이었음을 우리가 압니다. 사탄은 가룟 유다의 마음에 그리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저주받은 사형틀인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얼핏 보기에 이 계획은 성공한 것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저주받은 나무 사형틀에 묶어 죽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탄의 계획에 카운터를 날리며 ‘부활'이라는 하나님만의 감추어진 비밀을 통하여 십자가 사건을 십자가 사역으로 만드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우시고 완벽하신 지혜로 사탄이 얼마나 뛰어난 계획을 세우던지 그것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본문 속 시험의 때에 예수님께서도 이 사탄의 계획을 사용하셔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이 사탄의 계획을 사용하셔서 십자가의 사건처럼 사탄을 농락하실 수 있으셨지만, 이를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에 계시지 않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기적을 행하는 성전 꼭대기에 계시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셨습니다. 당장 성공하여서 인기와 영향력을 등에 업고 스타가 되는 ‘지름길'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실 때에 하나님의 뜻은 기적을 행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계계를 꺾으시고 이겨내는 것이었습니다. 성공한 스타의 삶이 아니라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들으셨고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엘리야는 그 세밀한 음성에 순종하여 자신의 삶을 걸어갑니다.
여러분, 저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 위해서 영향력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가 바람과 불과 지진을 일으키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털끗하나 상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삶을 그리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치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거나 수많은 유혹들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엘리야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지 못하고 어느샌가 인기를 추구하거나, 물질적인 안녕을 추구하거나, 내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 좀 살만 해 지기를 추구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바라는 대신에 지금 당장 볼품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삶에서 벗어나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잘 되어야 하나님께서 잘 되십니까? 내가 세상에서 주인공이 되고 드러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 중에 충만하시며 우리의 어떠함으로 인하여 그 영광이 가감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지으실 수 있고 영광을 취하실 분이십니다. 이를 알지 못하면 오늘의 본문 속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께 삐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유혹을 이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뜻을 하나님의 지혜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는 물론이고 이방 왕을 심지어는 사탄의 계획을 보기좋게 역으로 사용하셔서까지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나 혼자만 열심이라고 생각했던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7천명의 하나님의 백성이 있음을 알게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결코 혼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지 않으십니다. 주변을 둘러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이세상에 무릎을 꿇지 않는 여러분을 예비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분이십니다. 내가 모든 일들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낮아지셨고 비천한 인간의 육체를 입어 이 땅 가운데 내려오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시며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는 이러한 관계입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모든 사역들을 다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게 맞추어 역사해주실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효과적인 삶, 합리적인 삶보다 바른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효과적인 것, 합리적인 것, 유용한 것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사단의 속삭임’이었습니다. 바른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임을 보게 됩니다. 비록 그 일은 세상과 우리 주변과 심지어는 가족들에게 있어 인정받지 못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바보같고 멍청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그 말씀에 의지해서 가는 길이라면 저와 여러분이 가는 이 길은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는 길인 것입니다.
정리
정리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고자 한다는 말에 그는 낙담하고 절망하여서 하나님의 사역으로부터 도망갑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그 기적 가운데 있지 않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사람을 세우게 하셨고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람들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이루실 것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열심인 사람이 자신 혼자 뿐이라고 생각했던 엘리야에게 그렇지 않음을, 바알 앞에 무릎꿇지 않는 자가 7천명이나 더 있음을 말해주십니다. 엘리야가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그 기적 자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 하나님의 말씀임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들을 이뤄 나가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하여서 그 사실을 알지만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귀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에 그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서 유명해질 수 있으셨고 또 영향력을 끼치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일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우리에게는 ‘지름길'로 느껴지지만 ‘바른 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것이 기적이나 어떤 놀라운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는 일 즉, 말씀을 듣는 일임을,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따라 걷는 것일임을 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지름길이 아니라 바른길을 따라 가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밤이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는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살게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기도하고 담임목사님께서 나오셔서 계속해서 기도 인도해주시겠습니다.
기도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