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탈을 쓴 늑대

요한일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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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3월에 부산의 옥탑방에서 한 여성이 키우던 고양이 42마리가 구조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방에서는 악취가 진동했고, 고양이도 불결한 환경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 여성이 처음에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웠는데, 그 사랑이 변질되어 동물 개체 수를 늘리는 것에 집착하는 ‘애니멀 호더’라는 병에 걸려 결국은 동물을 학대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2019년 1월에 경기도 성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동복지공동체의 60대 원장이 2013년부터 6년간 자신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보호중이던 여성 8명을 10여 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원장은 1992년에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 근처에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고, 악기를 가르쳐 30년 가까이 공연을 열어 주변에서 ‘천사 의사’로 불렸던 인물이라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 라는 이솝 우화처럼 겉모습은 양이지만 속은 남을 해치기 위한 늑대처럼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는 경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런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요한서신을 받아보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견해 차이 정도가 아닌 심각한 반목이 있었습니다.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고, 동일한 믿음을 선언했지만 실상은 다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할 만큼 심각하게 경계하며 바른 믿음을 가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원래 적그리스도라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대항하여 일어날 인격화 된 악을 의미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적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견해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아주 악랄하게 박해했던 로마의 황제 네로가 적그리스도라 여겨졌습니다. 수많은 유대인을 죽였던 히틀러 역시 적그리스도라 여겨졌습니다. 이들처럼 교회 밖에서 신앙 공동체를 핍박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 역시 있었습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반대하는 자들은 교회사 속에 언제나 존재하며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교회 안팎으로 많이 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적그리스도를 판단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본문 22절이 명백하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사람, 예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제2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곧 거짓말하는 자이고 적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했느냐는 어떤 신학적인 문제만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에 관한 문제 뿐만 아니라 여러 모습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 가르침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자들과 같이 공동체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어렵게 하는 자들에 관해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한 목사님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 시비를 걸었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내용 중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목사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죽으셨다고 표현’할 수 있냐고 시비를 걸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고, 돌아가셨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나는 예수 못믿겠다고 말해서, 이 목사님이 이런 것 가지고 트집 잡으려면 그냥 믿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식으로 사소한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 큰 부분에서 신앙 공동체를 흐트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한편으로 볼 때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라는 요한의 말 속에 담긴 훨씬 현실적이고 포괄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모습으로 인해 성도간에 어려움이 생기고 불화가 일어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이시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완전주의입니다.
완전주의라는 것은 잘 아시다시피 모든 면에서 확실하고 완전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완전주의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다같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것을 기다리지 않고 나의 완전함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완전의 영역으로 도달하는 시간을 참지 못하여서 교회 안에서 어려움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에베소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하나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모두가 흠이 없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옳고 완전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옳고 완전한 것이 신앙이 아니라, 완전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나 또한 부족했던 것을 기억하는 겸손으로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라는 속담을 잘 아실 것입니다. 개구리가 연꽃 위에 앉아서 물 속에서 헤엄치는 올챙이들을 보면서 이렇게 놀리는 것입니다. ‘너는 물 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나처럼 멋지게 점프도 못하지?’, ‘물에 있으면서 다리는 왜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짧아서야 나처럼 점프도 못할텐데 다리는 왜 달고 있는거야?’. 그러자 지나가던 자라가 개구리를 보고는 ‘너도 얼마전까지 저 올챙이처럼 꼬리도 달려 있었고, 다리도 짧았는데 그걸 기억을 못하나 보네? 넌 건방진 데다가 기억력도 나쁘구나’ 라고 혀를 차며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못나고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어려움도 이런 개구리와 같은 사람에게서 생겨납니다. 나는 이제 개구리처럼 어느정도 완전한 모습을 가진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이 없이 다른 이들을 판단하여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어려움은 옳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개구리와 같은 사람에게서 대부분 일어납니다.
개구리 같은 사람은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합니다. 질그릇이 보배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보배를 갖고 있는 질그릇으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보배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왜 질그릇이 보배로 바뀌지 않는 것입니까? 말씀에서 말하듯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신문지 뭉치를 뺏어가려고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신문지를 뺏어가려고 싸우겠습니까? 신문지 안에 무언가 귀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신문지 안에 돈다발이 들어있으니 겉으로 볼 때는 신문지를 뺏으려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안에 있는 돈뭉치 때문에 싸운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존재입니다. 질그릇인 우리는 이 신문지처럼 보잘 것 없지만 그 안에 담긴 보배가 귀중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의 다음 말씀에서는 그 보배가 ‘예수님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보배를 몸에 짊어지고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내 안에 담긴 예수님의 죽음이 보배이기에 나도 귀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완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완전과 다른 모습이지만 이미 우리는 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주의자가 착각하는 것처럼 내가 완전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그릇이 보배로 바뀌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완전주의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잘난 것이 있다고 여겨지고, 다른 이들보다 나은 모습이 있다고 느껴서 내 안에 겸손이 사라지고 교만이 들어오게 되면 누구나 이런 잘못된 완전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저 성도는 교회 다닌지가 언제인데 아직도…’라는 마음이 든다면, 지금 당장 그 마음에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더이상 나의 완전하지도 않은 그런 완전을 자랑하고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질그릇이고 내 안에 담긴 보배이신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완전주의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자랑이요 보배임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Link.이처럼 잘못된 완전주의에 빠진 사람은 신앙 공동체를 어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이런 완전주의 말고 또다른 모습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둘째, 율법주의입니다.
완전주의와 같이 율법주의는 교회 안에 늘 문제를 일으키고 성도들의 교제의 일치를 깨뜨리는 주범이 되곤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이 문제에 관한 좋은 지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18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고 말하면서 육체를 따르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것과 육체를 따르는 것이 서로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더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자의 모습, 즉 율법에 얽매인 자의 모습은 이렇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자는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율법에 얽매인 자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만,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율법주의에 얽매인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시면 바리새인이 얼마나 율법주의에 얽매인 삶을 살아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을 주신 내용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바리새인은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고 자신이 죄를 짓는 다른 자들이나 세리와 같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며 자신을 높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주후 70년경 ‘네드훈야 벤 하 카나’라는 유대인 랍비의 기도문을 이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로 나로 하여금 율법을 배우는 자들 중의 하나가 되게 하시고,
시장 모퉁이에 앉아 있는 자들 중의 하나가 되지 않게 하심에 대하여 감사하나이다.
나도 일찍 일어나고 저들도 일찍 일어납니다.
그러나 나는 율법의 말씀을 위해 일찍 일어나지만,
저들은 천박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납니다.
나도 일하고 저들도 일합니다.
그러나 나는 일하고 상을 받지만, 저들은 일해도 상을 받지 못합니다.
나도 달음질하고 저들도 달음질합니다.
그러나 나는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달려가지만,
저들은 파멸의 웅덩이를 위해 달려갑니다.
이처럼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기 위해 남을 깎아 내려야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나는 잘났고 남은 못났다는 식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주의는 결코 성도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는 자에게 어떻게 신앙의 성숙이 있겠습니까. 옆에 있는 성도의 잘못되고 틀린 점을 들춰내야 하니 교회 안에 어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8장 1절과 2절 말씀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와 사망의 법에 살아가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거하게 되었기에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전에는 마지못해 성령을 따랐지만, 이제 성령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도록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도 기쁨으로 따라갈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슬리피 할로우’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다고 합니다. “악마는 하나님의 얼굴로 온다. 악마는 여러 가지 탈을 쓰지만, 선의 탈을 쓸 때 가장 무섭다.” 완전주의와 율법주의는 마치 하나님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완전주의와 율법주의라는 악마는 마치 그것이 선인 것처럼 선의 탈을 쓰고 오는데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에 잘못 빠지면 선을 앞세워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마치 적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잘못된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면 됩니다. 내가 개구리라고 생각하여 올챙이들을 바라보며 비난하지 않으면 됩니다. 나도 저 올챙이와 같은 때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나보다 연약한 성도들의 신앙 역시 자랄 것을 믿고 사랑하며 오래 참아주시면 됩니다.
또한 내가 여전히 질그릇임을 기억하면 됩니다. 나는 질그릇이고 보잘 것 없지만, 내 안에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서 질그릇인 나도 완전함을 고백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 우리 입술에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가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고 생명의 성령의 법에 거하게 하신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게끔 도우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이상 나의 잘남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질그릇인 나를 자랑하려고 애쓰고 남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보배이신 예수님을 자랑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를 위해 기꺼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원수 같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온갖 고초를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구원자 예수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 다해 자랑하고 전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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