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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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보는 사람들

사도행전 4:1-12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사도행전 4장 1~12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는 신약성경 191페이지에 있습니다.
1절 한절만 함께 읽고 한절씩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성전에 나오신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베드로와 요한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걷게한 기적을 행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성전 미문에 어렸을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이 구걸을 하기 위해 앉아있었습니다.
성전 미문은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예루살렘 성전 동쪽 출입구입니다.
금과 청동 장식물로 아름답게 꾸며진 문으로, 단어 그대로 미문, 아름다운 문입니다.
성전 출입구이기 때문에 기도하러 오는 신자들이 드나드는 곳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장식이 잘 되어있고,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돈이 많은 이방인, 여인들이 주로 드나드는 곳으로 추정됩니다.
그곳에 나면서부터 못걷게 된 앉은뱅이하루를 벌어먹기 위해
구걸하려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 곳을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갔고,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하루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 돈을 구걸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의 물질적 요구에
그대로 반응하지 않고, 그 영혼의 불쌍함을 보았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자,
나면서부터 못 걷던 앉은뱅이 걸인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기적임을 깨닫고,
곧바로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했습니다.
이 기적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이 사건이 주변에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온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더하여 갔습니다.
오늘 본문의 4절에서 또 한번 큰 부흥이 있었는데
그 때에는 남자의 수만 약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을 지켜보던,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무슨 일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을 어떻게 해야될지 논의했습니다.
1절에 보면,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모였습니다.
제사장은 그 당시 성직자들이고,
성전 맡은 자성전 경비대의 대장으로,
제사장중에 대제사장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사람입니다.
사두개인제사장의 한 계파로서 대제사장, 성전 맡은 자들이
대부분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하고 있는데,
제사장 그룹의 실세들이 우르르 들이닥친 상황인 것입니다.
그들이 왜 베드로와 요한에게 찾아왔을까요?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르치자
그 설교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판단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더 이상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그 당시에는 날이 저물면 회의를 소집하여 재판할 수 없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3시부터 말씀을 전하였던 것을 생각해볼 때,
그들이 말씀을 전한 지 몇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나아온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아지는 것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미 날이 지나 회의하여 재판할 수 없기에,
다음날까지 베드로와 요한을 가두어 둔 것입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드디어 다음날이 되어서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 모였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 및 다른 사도들을 추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회의를 통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재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6절에 보면, 거물급 인사들이 다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주후 6~15년에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현재로는 원로가 된 셈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주후 18~36년까지 대제사장 직을 수행하였고,
현직 대제사장이며, 안나스의 사위입니다.
그다음 나오는 요한은 가야바에 이어 36~37년까지 대제사장을 맡게 되는 사람입니다.
현재는 차기 대제사장이 될 사람으로, 유력한 실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 당시 시대배경, 문화, 사회, 경제, 정치구조,
인물의 인지도나 정치성향 등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와 종교가 통합된 나라이다 보니,
제사장들이 정치의 업무도 함께 맡아서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라는 직책은 대통령과 같은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종교와 정치가 통합되어 있어서
대통령교단 총회장들의 총회장 역할도 함께 병행하고 있으니
한 나라의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대제사장의 원로, 현직, 차기, 그 무리의 세력들이 다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을 추궁하며, 자신들의 위치와 권위를 이용하여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것들을 재판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된 재판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들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너네 누구믿고 함부로 나대느냐?
누구 백이냐? 어디 소속이야? 너네 보스가 누구냐?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함부로 말하고 다니느냐?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인가, 그 일을 통해서 어떤 유익이 있는가.
정말 제대로 잘 해결된 좋은 일인가. 그 진위 여부를 따져야지.
누구 권세로, 누구 이름으로, 누구 편에 서있는 자인가.
이것은 그들의 정치논리이지 사건의 옮고 그름을 따지는 재판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너희가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된 것이다.“
베드로의 대답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은 착한 일입니다.
지금 병자가 고침을 받았는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화가 나 있습니다.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자가 기적을 행한 것이
상당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대해서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병자가 고침 받은 것너무나 귀하고 잘 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욕심에 빠져, 병자의 아픔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둘째, 병자가 고침받음으로 그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생각했던 구원
그들이 정한 율법과 정결예식을 잘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나아갈 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지도 않았고, 지금껏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깨끗한 모습으로 정결하게 예배를 드리지도 않았던 앉은뱅이 걸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런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누구의 권한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권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과 관습에 의해 구원을 함부로 정의했던 것입니다.
셋째,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자의 고침과 구원은 누구의 권세와 이름으로 가능한 것이냐?
하나님의 권세와 이름이냐?
맞다.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이름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3장 13절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들이 믿는 그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
너희에게 복을 주시려고 보내셨는데, 너희가 그를 빌라도에게 넘겼다.
심지어 빌라도도 죄가 없다 하고 놓아주기로 했는데,
너희가 거부하여 다른 죄인을 풀어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버리고, 거부하고, 죽인 그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오늘 너희가 보고 있는 이 병자를 고치시고, 구원하셨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이제는 너희가 버린 그 예수님을 집 모통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계획이라는 큰 집을 짓는데 주춧돌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에, 예수님의 이름 없이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너희가 지금 이것에 대해서 나에게 묻느냐?
오늘 너희가 하나님의 일의 증인이 되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자들이 된 것이다.
베드로가 지금 성령의 감동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 장로들과 관리들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베드로에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누가복음에 이 일에 대해서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1~12절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두려워 하지말고,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가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잡혀가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할 말을 입에 넣어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이 오늘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왜 그토록 하나님의 일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 수많은 기적들을 보여주시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는데,
왜 그들만은 그 구원에서 배제가 되어,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며
제자들의 전도사역을 방해하며 하나님의 일에 걸림돌이 되었을까요?
제가 파트전도사 때 중등부만 담당해서 사역을 할 때였습니다.
예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 뒤늦게 예배당을 어슬렁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는 학생들이 꼭 있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설교시간에 들어오고,
어떤 학생은 예배 다 마치고 항상 공과시간에 오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심한 학생은 친구들이 공과시간까지 다 마치고 교회를 나올 때,
교회 입구에서 만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학생들을 보면, 맨 뒷자리에 앉아계시다가
호통을 치며 실랑이를 벌이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항상 맨 뒤에 앉아서 학생들의 예배상태를 점검하고,
늦게 온 학생들을 혼내는 학생주임과 같은 호랑이 선생님이 꼭 1-2명씩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분들이 신앙이 없거나, 예배에 대한 열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어른 예배 때 보면 가장 열심히 앞자리에 앉아서 찬양하고,
아멘도 제일 크게하고, 교회 봉사뿐만 아니라 남전도회장, 구역장 가리지 않고
맡겨만 주면 다 열심히 잘 해내는 그런 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꼭 중등부 예배만 오면, 학생들이 드리는 예배에는 집중하지 않고,
학생들의 예배 태도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분들 생각에, 이미 어른 예배를 통해 주일성수를 지켰다고 여겨서인지
교회학교 예배를 정식 예배로 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는 정식예배, 서브예배란 것이 없습니다.
모두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볼 때, 연극과 참 많은 요소들이 닮아 있습니다.
심지어 예배 때 연극, 공연, 콘서트를 많이 포함하거나
대체해서 드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볼 때, 연극의 요소들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요소를 생각해보고,
각각의 역할과 관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PPT화면 - <예배 vs 연극>
화면에 보여드린 그림을 보게 되면, 각각의 3요소들을 나열했습니다.
신학적으로 구분한 것은 아니고, 여러분에게 연극과 예배의 요소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정리한 연극의 3요소, 예배의 3요소를 뽑아보았습니다.
연극을 구성하는데는 배우, 감독, 관객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도 마찬가지로 목회자, 하나님, 회중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요소가 어떻게 연결이 되어야 맞는 것일까요?
5초간 생각해볼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각자의 생각이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연결을 많이 합니다.
배우는 목회자, 감독은 하나님, 관객은 회중.
물론 예배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만 본다면,
맞게 연결된 것일 수 있습니다.
지금 오늘도 예배 드리는 공간의 외형적인 모습을 보면
이 무대에 저 혼자 올라가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독이 되어주시고, 제가 배우가 되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배의 대상과 목적을 분명히 한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누구를 위해서 드리는 것인가요?
결과적으로는 예배를 통해 우리가 은혜를 받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드리는 것도 맞지만,
그것은 결과이고, 예배를 드리는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고,
피조물인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땅히 올려드릴 영광을
예배를 통해서 올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극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감독? 배우? 연극의 주인은 관객입니다.
관객을 위해서 감독과 배우가 연극을 잘 준비하여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관객이 그 연극을 만족하지 못하면, 연극은 실패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배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예배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극과 예배의 요소가 어떻게 연결되어야 맞는 것일까요?
관객은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의 회중인 여러분은 어떤 역학을 해야될까요?
여러분이 감독일까요? 목회자가 연기를 잘 할 수 있도록
제가 지금 설교를 하나님께 잘 올려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이 저를 지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바로 예배의 주인공입니다.
여러분이 배우가 되어서, 예배의 주인공이 되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어떤 역할입니까?
여러분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도록, 감독이 되어서,
여러분의 예배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설교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지금 이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온전한 예배가 되어지도록
이렇게 드려라, 저렇게 드려라, 지도하고 가르쳐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중등부 사역을 할 때 보면, 예배를 보는 교사들이 참 많았습니다.
교사들이 관객이 되어서 아이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리나,
제가 어떻게 설교를 하나, 감시하고 감독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저를 너무 사랑해서
어린 전도사가 더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에
많은 지도와 권면을 해주셨지만, 근본적으로 교사 자신의 예배는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배 때, 아이들을 지도하는 교사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예배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 예배를 드리지 않고, 아이들이 예배를 잘 드리는지 지켜보면 되는 것이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항사 예배를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거룩한 행위와 외식을 자랑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체하며,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성전 뒤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사고팔며 이득을 취하고,
가난한 자들이 소득을 탐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아첨하며
자신의 성공과 부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매일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경건의 행위를 쌓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
하나님의 때에, 그분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가끔 성도님들 중에 “예배를 본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배를 본다는 것은, 예배의 회중이 되어, 예배를 관람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분들이 전부 그런 태도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말을 통해 우리도 모르게 예배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대한 태도와 습관을 바로잡는 것과 함께
용어 또한 바르게 사용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예배에 대한 수많은 규칙들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예배를 위해 하루 전날인 토요일에 일찍 잠들기.
예배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기.
주일에는 가장 좋고, 단정한 옷을 입기.
헌금은 가급적 빳빳한 새 지폐로 준비하기.
예배시간에 음식물 섭취하지 않기.
휴대폰을 미리 꺼놓기.
다리꼬지 말고, 바른 자세로 앉아서 예배드리기.
그런데 이런 규칙들이 우리가 연극의 배우, 주인공이라고 하면 당연한 일이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 연극의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연극 전날에 늦게 잘 수 있습니까?
물론 너무 떨리고, 준비할 것이 많아서 늦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다음날 연극 당일의 컨디션을 위해서 일찍 자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인공인데, 연극에 늦는다.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10분이 아니라, 1시간, 2시간 전부터 이미 도착해서 옷 갈아입고,
따뜻한 물 마시고, 날계란 입에 털어넣고, 입 풀고, 거울보며 머리 다듬고
난리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준비하는데 다른사람의 시선이 신경쓰일까요?
이제 몇분뒤면 내가 주인공인 연극이 시작되는데.
예배시간에 앞자리에 앉아, 아멘하면서 적극적으로 말씀에 화답하고,
박수 크게 치고, 신나게 찬양하는 것도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당연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연극에 조예가 깊은 관객이라면,
그 연극을 보는 순간, 배우가 얼마나 연극을 준비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서
평소에도 꾸준히 연습하며 실력을 쌓아놓는 것입니다.
연습까지도 모두 연극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드리는 이 1시간, 2시간의 예배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주간 살아가는 삶을 통해 예배를 연습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의 거룩한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주가 어떻게 살아가며 하나님께 최선을 다했는가.
어떻게 삶의 예배를 거룩하게 잘 드렸는가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예배 시간이 되면 외식하는 모습으로 예배를 보고, 감시하고,
예배드리는 회중들의 예배상태를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도,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배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예배가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찬양 - 예배자
기도제목
1. 예배의 회중이 아닌, 예배의 주인공이 되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2. 주일의 예배만이 아닌 거룩한 삶의 제사를 통해 온전한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3. 나의 삶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내가 속한 모든 가정과 일터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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