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
고린도에서 흔히 나타나는 왜곡된 남녀 관계에 비추어 결혼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미혼이었는가? 상처하였는가? 아니면 이혼하였는가? 라는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 독일의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 교수는 바울이 상처한 홀아비였다고 논증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필자의 스승인 영국의 브루스(F. F. Bruce)교수는 여러 정황 증거들이 열성파 유대주의자였던 바울이 갑자기 그리스도인이 되자 그의 아내가 그와 이혼하여 떠남으로 홀아비가 되었다는 견해를 더 잘 뒷받침한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바울같이 성적 절제의 은사를 받은 이는 결혼하지 않고 전심으로 주를 섬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가 아니라 다른 은사를 받은 이는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기를 바람은 모든 사람이 자기같이 성적 절제의 은사를 갖기를 바라는 것을 뜻합니다(참고 마 19:12).
즉 “너희가 꼭 그런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원하면 한시적으로 해도 좋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말함은 양보이지 명령은 아니다.”
여기서 “이것”은 5절을 지칭합니다; “서로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 그러나 내가 너희 가운데 금욕주의자들에게 한 가지 양보하겠는데, 남편과 아내가 합의하여 일정 기간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성관계를 중단할 수도 있다.”
바울은 3절의 충고를 이제 부정적인 형식으로 되풀이합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서로의 성적 권리를 부정하여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 내에서 금욕이 허용될 수 있는데, 그것은 상호 동의하는 가운데 일정 기간 동안만 영적 목적을 위해서 허용되는 것입니다.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잠시 성관계를 중단할 수 있습니다.
이중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첫째, 남편과 아내의 완전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말합니다. 둘째, 결혼관계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자기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스스로가 상대방의 권위 아래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엡 5:21). 한국의 남편 우위사상과는 정면으로 대조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포괄적으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필요(needs)를 충족시키는 “섬기는 사랑”의 관계를 가져야 함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기 “빚 갚음”은 일차적으로 성관계에서 상대방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의무를 다하라는 뜻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빚을 갚고, 아내도 자기 남편에게 마찬가지로 하라”(문자적 번역).
2~4절에서 바울은 남녀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졌음을 철저히 표현합니다. 이와 같은 남녀 상호주의적 윤리는 고대 사회에서는 혁신적 사건이었습니다(참고 갈 3:28; 엡 5:21). 이러한
결혼생활 내에서의 성관계가 음행을 피하게 하는 하나의 목적을 충족시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음행의 죄를 피하기 위한 것이 결혼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사회의 영향으로 고린도 교회 내에서도 음행의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참고 5:1 이하; 6:12 이하). 바울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충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구호를 일단 수용하고, 그러고 나서는 그것을 수정하고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않는 것이 좋다.”
이 구호는 창세기 2:18에 완전히 배치됩니다.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바울은 랍비들이 요구한 남자의 결혼 의무에 대항하는 한편, 고린도의 금욕주의자들이 요구한 무결혼 또는 성적 금욕주의 원칙에도 대항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방종과 율법주의는 둘 다 속박임. 참고 12절: 방종과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를 보호)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독신 생활을 선호할 것이기는 하나,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합당한 것이고 일반적으로 사람을 음행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독신 생활의 장점을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비추어 천명하고 있습니다(29절 이하).
고린도의 그런 금욕주의적 태도는 앞의 5~6장에서 살펴본 열광적 방종주의적 태도와 똑같은 헬라적 이원론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의 오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금욕주의자들의 입장은 결혼한 부부는 이혼을 하든지 아니면 같이 살면서도 성관계를 하지 말든지 해야 하는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근본 문제는 “성관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학적으로 용인되는 것인가?”입니다.
그는 이제 7장에서는 반대로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않는 것이 좋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모든 성관계를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금욕주의자들의 문제를 다룹니다.
첫째로 다루는 문제는 그들이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결혼을 거부하는 문제입니다.
이 말은 7장에서 16장까지 다루는 문제들에 대한 제목입니다(참고 7:25; 8:1, 4; 12:1; 16:1, 12)
그러므로 우리가 이곳에 담긴 결혼에 관한 바울의 자상하고 균형 잡힌 가르침들을 살펴보면서 고린도인들의 상황이 정해 준 바울의 가르침의 한계점을 충분히 감안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