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굴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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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views제 한계를 인정하며 겸손히 주님의 지혜를 구하며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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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잠언 마지막 설교입니다.
물론 묵상은 다음주 수요일날 마치지만 주일 설교로서는 마지막인 거 같아요.
2달을 돌아보면 개인적으로는 참 힘든 설교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 나이가 아직 삶의 지혜를 깊이있게 이야기하기에는 좀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연구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등장하기 때문인데요.
바로 아굴이라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왜 하필 잠언 31장중 30장인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 아굴의 기도가 등장할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제 생각에 아굴의 이 기도의 고백은 잠언을 본인이 쭉 다 읽고 나서 느낀점을 기도하는 듯 합니다.
여러분도 이 아굴의 기도를 통해 나의 마음을 한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굴은 당시 사회 모습을 매우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1절부터 보지 않고, 그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10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1]
먼저 10절은 당시 사회에 있던 갑질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 사회는 주인과 종이 있었는데 누군가 힘없는 종을 모함하고 비방해서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위 ‘을’에 속한 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을 모함하고 비방한 그 사람을 저주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자기 힘이나 능력으로 복수를 할 수 없다면 저주하는 방법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약자들의 저주를 들으셔서 그 모함하고 비방한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런 대항을 할 수 없는 약자들을 비방하거나 저주하는 일, 다시 말해서 갑질하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갑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최근에 놀랐던 것은 한 김밥가게 사장님이 새우튀김 하나때문에 소비자에게 괴롭힘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별점 테러하고, 전화 테러하고 말이죠.
그래서 사장님이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쓰러졌는데 결국 죽었습니다.
소비자가 자신이 가진 권리를 남용해서 갑질한 케이스입니다.
다음에 11절은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를 저주하며 어머니를 축복하지 않는 무리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모를 저주하는 부류는 돈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모의 유산을 노리고, 부모를 저주하며 싸워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아굴은 탐욕의 문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당시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거의 사형에 처해지는 죄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부모의 재산을 노리며 부모와 다툼을 벌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돈때문에 가족간의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난 것이죠.
이런 일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제 12-14절은 교만하고 오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12절 보십시오.
“더러운 것을 씻지도 않고 깨끗한 체 하는 무리가 있다”
세상에 자기가 더러운 지도 깨닫지 못하고, 깨끗한 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뉴스보면 유명한 사람들중 추악한 모습이 드러난 사람들 많잖아요.
아굴은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중 위선자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교회에서는 참 좋은 집사님인데 자기 직장에만 가면 완전 이상한 사람이 되곤 합니다.
직원들한테 함부로 말하고, 지적질하고 못되게 굴고 말이죠.
더 큰 문제는 자기가 뭘 잘못하는 지 모른다는 거에요.
이런 사람들 우리 주변에 꽤 많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13절에서 표현합니다.
눈이 심히 높아서, 눈꺼풀을 치켜 올리고, 남을 깔보죠.
또한 이런 교만하고 오만한 사람들은 주로 사회적 약자들을 착취하려 합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이런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을 이빨이 긴 칼과 같고, 턱이 큰 칼과 같은 야수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먹이감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약자는 보호의 대상이 아닌 착취의 대상입니다.
여기서 아굴은 약육강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15절에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매우 풍자적인 말로 표현합니다.
거머리에게 매일같이 ‘달라, 달라’하며 보채는 딸이 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머리를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거머리에게는 두개의 빨판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두개의 빨판을 거머리 딸들로 표현했습니다.
거머리가 이 두개의 빨판으로 끝없이 피를 빨아대는 모습이 마치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자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 15절 후반부에는 이런 자들을 풍자하는 또다른 비유들이 등장합니다.
“전혀 배부른 줄 모르는 것이 셋,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넷이 있으니"
다시 말해서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욕심부리는 모습을 네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스올인데 이 스올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끊임없이 생명을 파괴하려는 그런 존재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라도 이 죽음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아이 못낳는 태인데 어떻게든 생명을 잉태하려는 여자의 강렬한 욕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세번째는 물로 갈증을 없앨 수 없는 땅인데 아무리 물을 부어도 다시 회복되지 않는 그런 땅을 말합니다.
네번째는 만족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불인데 이 불은 어떤 것이라도 그 안에 들어가면 다 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죽음, 아이 못낳는 태, 물로 갈증을 없앨 수 없는 땅, 만족할줄 모르는 불 이런 것들처럼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욕심부리는 모습이 이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독특한 표현들인데 아굴이 세상을 둘러보면서 이런 것들이 그런 자들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발견한 것입니다.
왜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까요?
교만하고,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약자들을 괴롭히고, 위선적이고 말이죠.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만 옳다고 여기고,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기들 삶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의 모습을 보며 아굴은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본론2]
먼저 아굴은 2절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자신을 ‘우둔한 짐승’이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혜가 너무나 부족하고 자신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비관적이라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3절은 그가 말하는 지혜가 어떤 지혜인지를 말해줍니다.
“나는 지혜를 배우지도 못하였고,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아는 지식도 깨우치지 못하였다”
그가 말하는 지혜는 세상 철학이나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아굴은 정말 하나님을 몰라서 자신을 이런 미련한 짐승이라고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아굴은 잠언을 잘 알고 있고 누군가에게 잠언을 전달할 정도로 매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 지혜로는 하나님의 크기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과 계획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때마다 소름돋기도 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나는 내 눈 앞에 있는 것 밖에 못 보지만 하나님은 제 인생 전체를 보시니까 그 분 앞에서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겪고나면 아굴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앞서 우리가 본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인양 자기가 가장 똑똑한 사람인양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똑똑해져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코로나 바이러스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는 4절에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고백합니다.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이 누구냐?
여기서 ‘하늘’이란 ‘광대한 우주’를 말합니다.
아직도 인간은 가장 가까운 달조차도 제대로 못가고 있죠.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아직까지 우주의 원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손에 움켜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아무도 없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만 알아도 허리케인이나 태풍같은 자연재해를 거의 막을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하잖아요.
물은 어떨까요?
구름을 통해 비가 내리잖아요.
그것을 아굴은 옷이 물을 감싸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어느 누가 통제할 수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바다와 땅의 모든 경계선은 어떻습니까?
그 경계선도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요?
아굴은 하늘과 땅, 바다, 바람, 비를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앞에 겸손히 인간의 한계의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굴처럼 천천히 세상을 둘러보면 세상의 엄청난 질서들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이번에 우리에게 닥친 코로나가 대표적인 예이죠.
우리가 쓰고 있는 마스크가 인간의 미련함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교만하고 탐욕스런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를 계속 파괴하자 이런 문제가 발생한거잖아요.
그런데 아굴은 이렇게 자연 속 하나님의 질서에서만 그 지혜를 찾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 지혜의 보물창고인 하나님 말씀으로 시선을 이동합니다.
말씀 속에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아굴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하다’고 말합니다.
순결하다는 것은 그 속에 불순물이 없고 결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본 인간의 지혜란 불순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온전해서 우리가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방패가 됩니다.
방패 아시죠?
막을 수 있고, 숨을 수 있고,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여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믿을 수 없는 연약한 방패라면 우리가 어떻게 의지하고 숨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6절에서는 하나님 말씀에 아무것도 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더한다는 것은 그것이 불완전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씀의 완전성을 확신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만들다가도 뭔가 맛이 부족하면 간장도 넣고 소금도 넣잖아요.
그런데 완벽한 음식에는 아무 것도 더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말씀은 완전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더 첨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100프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굴의 믿음입니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모든 지혜를 담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혹시 말씀을 빼거나 더하거나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해서 내 생각을 보태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이 듣기에 좋은 말씀만 들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말씀을 뺀 거죠.
우리를 책망하고 훈계하는 말씀이 있는데 그건 잘 안 보려고 하고, 매번 축복의 말씀만 보려고 하면 그게 바로 말씀을 뺀 것과 같습니다.
저희 교회가 묵상 책을 가지고 매번 그 순서에 따라 성경을 전체적으로 모두 보려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제 7절부터는 오늘 본문의 하이라이트인 아굴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아굴의 기도는 정말 감동입니다.
볼 때마다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아굴은 단 2가지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두가지를 이번만 기도한 게 아니라 평생에 걸쳐 마음에 두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죽기 전까지 이 기도가 계속해서 이뤄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첫번째 기도는 자신이 허위와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허위가 뭘까요?
허위사실 유포 이런 말 하잖아요.
한마디로 말해서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말도 마찬가지죠.
아굴은 자신이 어떤 경우에도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않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듣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평범한 기도 같잫아요.
그러나 그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이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거짓되기 쉬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음이 항상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속임수와 거짓말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게 쉬운 거 같지만 꽤 어렵습니다.
저도 절대로 편법쓰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는데 어느 순간 편법쓰고 있더라구요.
우리가 살면서 편법 안 쓰고 살려고 하면 참 귀찮고 돈도 많이 듭니다.
윈도우같은 프로그램도돈 내고 정품쓰고, 노래도 돈 내고 듣고, 인터넷에서 영화도 다 돈내고 보고 이거 작은 거지만 쉽지 않습니다.
저도 지금은 안그렇지만 전에는 남들 다 하니까 나도 그냥 넘어가자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굴은 마음 깊이 일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정직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그의 두번째 기도는 탐욕에 대한 것입니다.
내용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부유하게도 가난하게도 만들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부유하면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게 많아지면 주님에게서 멀어질 위험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아굴은 너무 부유해서 하나님이 필요없어질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해지게도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9절에 나오죠.
너무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게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자기 것은 없으니까 남의 것에 욕심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사람이 너무 가난하면 물질적인 것들 때문에 신앙생활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배고파 죽겠는데 무슨 기도하고 말씀 볼 정신이 있을까요?
하루 하루 겨우 먹고 살아야하는데 신앙생활을 할 여유가 어디있을까요?
그러니 너무 가난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필요한 양식만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도 이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당한 수준의 재물만 있으면 된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기도하기 쉬울까요?
우리는 주기도문을 그렇게 자주하면서도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죠.
아굴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삶에 최고의 가치가 바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 너무 부자가 되는 것도, 너무 가난해지는 것도 경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무조건 부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의 말씀대로 자기 분야에서 정직하게 성실하게 일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풍성한 결과를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부자가 되려고해서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한 일의 결과로 그것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우리는 이제 잠언을 마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아굴은 수많은 잠언들을 배웠지만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특별합니다.
하나는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게 해주시라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과 속임수로 자기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도 자신만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묵묵히 살아가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만들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남의 것을 탐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고, 너무 부유해도 하나님이 필요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겸손한 기도입니까?
거머리의 두 딸처럼 맨날 ‘달라, 달라'하고 하나님께 보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도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이 아굴의 기도 앞에서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기 원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 교회가 작아도 괜찮습니다.
한 무명의 목회자로 제 인생을 마감해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 식구들이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해주세요.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모두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