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쁨과 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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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6 토요일 새벽기도회
찬송 : 455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자
본문 : 요 17:13-14 (신 p.177)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안의 연약함과 내 안의 죄성, 내 안의 완악함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과 도무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일하게 악한 것들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무엇 하나 잘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 앞에 내세울만한 것도 없으며, 업적도 없고, 공로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드릴 만한 것도 없는, 볼품없는 우리 이오나,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어, 독생하신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심에 감사합니다. 도무지 구원받을만한 어떠한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한량없는 구원의 은혜 베푸심에 감사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매 순간 성령께서 도우셔서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게 주셔서 그 말씀을 받아 먹고 힘을 얻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하심에 감사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고, 세상은 이러한 우리를 향하여 모진 박해와 손가락질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들고 가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러한 주님만을 간절히 바라보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에 확신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께서 말씀 가운데 함께 하셔서 친히 깨닫는 지혜를 부어주시고, 말씀붙들고 기도할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혹은 고별의 기도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장이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하여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비롯하여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주신 것에 반해서, 오늘 본문이 속해있는 요17장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기도의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의 진수가 들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예수님의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오직 요한복음만이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다루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예수님의 기도를 부각시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는 당시 독자들이 처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신앙적 용기를 더해 주기 위함이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요한복음의 배경에는 교회를 향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을 무렵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밀려오는 불이익과 핍박, 박해와 시험 속에 실족하고 넘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도 요한은 오직 예수님이야말로 영생을 주관하시며 모든 육체를 다스리시는 분이시기에, 교회의 성도들이 제국의 박해나 회당으로부터의 출교를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미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중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서, 그들에게 신앙적인 용기를 북돋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드린 기도 내용이다. 이제 주님은 머지않아 십자가를 지시고 끔찍한 고통을 당하시어 죽으셔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런 비극을 앞두신 주님의 기도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13절을 보면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신다. 물론 이 본문 만을 떼어놓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자체를 기뻐하셨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얼마나 장차 닥칠 그 고난을 괴로워하셨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 십자가라는 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시다가 예수님이 흘리신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었다는 구절도 있지 않던가.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쁨은 십자가의 고통 자체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후에 예수님 자신과 특별히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을 미리 생각하면서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십자가 죽음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이토록 주님은 기뻐하시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택한 백성들의 죄사함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후에 우리의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기뻐하셨다. 창세 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모든 택함을 받은 자들의 죄가 완전히 사함을 받게 될 것을 아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끊어졌던 사랑하는 백성들과의 관계가 성자의 죽으심을 통해 회복될 것을 아셨기에 이토록 기뻐하셨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친히 뒤집어 쓰시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서 우리의 죄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해결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고, 또한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하신 예수님 자신의 뜻이었다.
주님께서 기뻐하신 두 번째 이유는,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 부활이 일어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끔찍한 고통이 마침내 끝이 날 것이고, 그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흠향하셨다는, 기쁘게 받으셨다는 표징으로 부활이 이어질 것을 아셨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그 쓰디 쓴 잔을 앞두고 계시면서도 지금 기뻐하며 기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제자들을 비롯하여 이어질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하여 모든 교회시대 성도들 안에도 그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기도하고 계신다.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러한 주님의 기도에 따라서, 실제로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승천 이후에 기쁨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 그 기쁨은 더욱 더 충만해져 갔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더이상 예수님과 그분의 성도들을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특히 부활 이후에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시작된 것이다. 죄와 사망이 지배할 수 없는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왔고,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이미 임한 천국,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완성을 향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 기쁨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우리에게도 십자가 고난이 임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속하는 십자가 고난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우리 죄를 해결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나도 지고, 앞서가신 주님을 따라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가는 차원에서 우리에게도 그 고난이 임하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마치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처럼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도 생겼었다.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 확산되고 있는 이 시국에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를 향하여 온갖 비난과 정죄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지금 우리의 상황은 기뻐하기 어려운 상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십자가 고난 이후에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회복의 은혜를 생각하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고달픈 상황 자체가 기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고난이 가져오는 영광스러운 결과를 믿음으로 내다보고, 교회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닙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주님처럼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14절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비롯하여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다고 말씀하는가? 아버지의 말씀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주셨다고 하신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 생명의 복음을 가리킨다.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또한 알려주신다. 이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물론 때로 우리가 도덕적으로 뭔가를 잘못해서 비난을 받고 미움을 받을 때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고, 우리가 그 말씀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고 계신다.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말씀이 교회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 생명의 복음을 믿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세상으로부터 받는 미움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 우리에게는 물론 이런 일들이 괴로울 수 있지만,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상황이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14절 중반부터 보시면,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라고 하신다. 우리 인체는 참으로 신비하여서 우리 몸 안에 아주 작은 바이러스만 침투해도 건강한 신체는 그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해 온갖 독소물질들을 그 바이러스에 쏟아 붓는다. 왜냐하면 그 바이러스는 원래 내 몸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
잠시 잠깐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천국 시민이다. 단지 이 땅을 나그네와 같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만일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에 속하여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구별 없이 살아간다면 그들이 우리를 미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그들의 죄와 불의와 어두움을 십자가 복음으로 폭로하고 드러내며, 그들의 온갖 미움과 위협과 박해에도 예수님처럼 온유하게 맞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 곧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세상은 계속해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를 미워하고 대적하겠지만, 간절히 바라옵기는 그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그 말씀을 우리의 무기로 삼아, 그 말씀을 기준으로 이 땅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두 가지를 살펴보았다. 십자가 이후에 주어지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또 우리에게 아버지의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하루가 시작되는 이 시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기쁨을 더욱 사모하고 그 기쁨을 누리는 오늘 하루가 되시길 바란다. 복음과 반대되는 세상이 당연히 오늘도 우리를 미워하겠지만 악에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온유함으로 대응하면서,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천국을 더욱 사모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