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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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독일의 구텐베르크라는 사람이 기계식 인쇄술을 발명하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전에는 책을 한 권 만들기 위해서 일일이 손으로 필사를 해야 했었지만 그의 인쇄술로 인해 이전과 달리 대 량 인쇄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필사를 해야 했던 시절에는 성경 66권을 사려면 집 10채 값을 지불했어 야 했기에 성경은 교회나 수도원만이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대량으로 보급되어 누구나 성경을 소유할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도 우리 생활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집에 컴퓨터가 있는 가정도 별로 없었고,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려면 집에 있는 전화선을 뽑아서 천리안이나 누리텔 같은 파란 화면으로 인터넷 아닌 인터넷을 즐겼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인터넷이 발전하고 기술이 발전 하니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작은 핸드폰으로도 인터넷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쇄술이나 인터넷 기술 등의 발전은 우리의 생활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쇄술의 능력, 인터넷 기술의 능력이 우리 삶의 모습을 변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인쇄술이 우리 삶에 들어와 누구나 책을 사서 볼 수 있는 시대를 만들었고, 인터넷이 발달해 누구나 쉽게 모르는 것을 검색할 수 있게 한 그 능력처럼 복음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면 복음은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 해 죽으시고 삼 일 뒤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복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복음을 매 주일 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경험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게 되면 어떤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까? 인쇄술이나 인터넷 같은 것이 우리 삶에 들어와도 우리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데 하물며 복음이 우리 삶에 들어왔는데, 복음은 우리의 삶에 어떤 능력을 행하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을 통해 복음이 우리 삶에서 어떤 능력을 행하는지 살펴보고 그 능력을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첫째,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야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본격적으로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자신에게 있음을 8절에서 밝힙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 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사도의 직분을 가지고 있던 바울이었기에 성도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권한을 사용하지는 않겠다고 말합니다. 일방적인 명령은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고 반발을 불러일으키지만, 사랑으로 호소하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가 아닌 그리스도인의 한 형제로서 빌레몬에게 사랑에 근거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9절 앞부분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라는 말은 “사랑 때문에”, “사랑에 근거하여”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형제로써 “사랑 때문에”, “사랑에 근거하여” 빌레몬에게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변화시키시고 그를 아들로 받아들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호소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형제인 빌레몬이 사랑으로 응답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오네시모를 위해 호소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한 간청을 바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한 간청에 앞서 오네시모의 변화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이렇게 부른 것은 가택 연금 중에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를 아들과 같이 여겼습니다. 오네시모는 육체적으로는 빌레몬의 종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바울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오네시모의 과거와 현재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무익’한 자였지만, 이제는 ‘유익’ 한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함을 통해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에게 무익한 존재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오네시모’라는 이름이 ‘이익이 되는’, ‘유익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름은 당시에 종에 게 유행하던 이름이었습니다. 주인들이 자신의 종이 유익한 존재가 되기 바라면서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네시모는 그 이름의 뜻과 다르게 주인에게 무익한 존재였습니다. 주 인에게 재정적인 손해를 입히고 로마로 도망까지 갔기에 그는 무익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오네시모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전에는’ 무익한 존재가 ‘이제는’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대와 나에게도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오네시모는 종의 신세를 한탄하며 주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모습으로 무익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됨으로써 주님을 섬기듯 빌레몬을 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유익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게도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기에 바울에게도 유익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런던에서 목회를 하며 교도소 선교를 하고 계신 송기호 목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송 목사님은 매주 목요일마다 교도소에 가서 복음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특히 중범죄를 지은 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동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부분 살인범이나 극악무도한 죄 수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전하는데 특별히 스탠리라는 죄수가 눈에 띄었고 주님께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기 원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가 “지금까지 가장 큰 실수는 그 사람을 죽이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평생에 그렇게 말한 사람은 처음 만나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원한 관계로 어떤 사람을 칼로 수 없이 찔렀는데 그 사람이 살아서 그것이 아쉬웠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던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스탠리가 자기의 과거를 고백했고, 복음을 듣고는 예수님께 나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원한에 의한 살인미수였기에 용서가 되지 않고 복수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에게 두 아들을 죽인 이를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의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간증을 듣고 스탠리가 송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있죠?” 이 질문에 송 목사님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나는 안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힘, 용서의 힘을 주셔서 가능 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큰 실수는 그 사람을 죽이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던 스탠리의 마음이 점점 녹아내렸고, 송 목사님의 안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스탠리의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2년 뒤 출옥하게 되면 죽이려고 했던 그 사람을 만나서 용서를 구하겠다고 말합니다. 복음이 중범죄자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원망이 가득한 상태에서 변화되어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의 모습으로 변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무익한 사람을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살인하고자 했던 마음을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변화시킵니다. 오네시모는 무익한 사람이었지만 바울에게서 복 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 뒤에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복음은 여전히 사람들을 구원하며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미 복음을 받은 우리는 복음으로 변화되었습니까? 이천년 전 오네시모는 복음을 듣고 변화되었는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은 매주일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도 오네시모와 같이, 또한 중범죄자 스탠리와 같이 복음을 통해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도 복음이 들어가면 변화될 줄 믿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도, 전도해도 안 바뀔 것 같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 그 친구들도 복음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먼저 겁먹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내가 먼저 변화되고 주변에 믿지 않는 자들도 내가 아니라 복음이 변화시킬 줄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둘째,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둘째,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복음의 능력을 통해 무익한 자에서 유익한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오네시모를 자 기 곁에 두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와 관련하여서 빌레몬에게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를 내세울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떤 압력이나 강요도 없이 최대한 빌레몬을 존중하고, 정중한 태도로 그를 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마음이 1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붙들어 두고 싶었지만 빌레몬의 승낙을 얻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해서 그런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오네시모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빌레몬에게 있음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바울이 빌레몬에게 기대하는 것은 법적 권한에 따른 결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따른 결정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모든 성도들에게 베푼 그 사랑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선한 일을 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이 자 의로 행해야 하는 일은 1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너의 선한 일”입니다. 빌레몬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 이루신 모든 선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일을 행해야 했습니다. 이 선한 일이 바로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15절과 16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한 다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5절 앞에는 이유를 의미하는 ‘가르’라는 접속사가 포함되었습니다. 이 접속사를 잘 살려서 번역해 보면 “아마도 그가 이것을 위하여 잠시 동안 떠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떠나게 되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개입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상태인 신적 수동태로 쓰였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분리된 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네시모를 바울에게로 인도하시고 그에게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네시모의 잘못을 오네시모 자신과 빌레몬을 위해서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잘못을 용서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네시모를 로마로 보낸 분이 하나님이심을 빌레몬이 인정하게 되면 그도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것처럼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영원히 돌려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영원히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 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네시모를 “영원히 돌려받는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 영원히 계속되는 관계 안에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빌레몬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형제들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둘의 이 관계는 변하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네시모를 빌레몬과 함께 영원히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하기 위해 그를 잠시 동안 빌레몬의 곁에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영원히 돌려받게 될 것인데 이제는 그를 종과 같이 대하지 않고 사랑 받는 형제로 돌려받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오네시모의 실제적이며 법적인 신분입니다. 그는 육신적인 차원에서는 빌레몬의 종이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는 더 이상 종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종이 아닌 사랑 받는 형제로 빌레몬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제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이중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16절 마지막에서 “육신과 주 안에서”라는 표현 이 이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육신적으로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지만, 주님 안에서는 그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1900년대 초 충남 금산에서 있었던 한국교회사의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덕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 시절부터 비단 장사를 해 부유한 집에서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이자익이라는 사람은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조덕삼의 집에 있는 마실에 지내며 마부생활을 하던 종이었습니다.
이 때 전주 선교를 하던 테이트 선교사가 우연히 조덕삼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테이트 선교사와 이자익이 만나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후 조덕삼과 이자익은 같은 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선교가 잘 되어 많은 사람이 모이자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건축한 다음 해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장로 선출 건으로 교회가 시끄러워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로 후보가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선출 결과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주인과 종이 함께 장로 후보가 되어서 투표를 했는데 종이 장로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이야 뭐 무슨 문제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교회가 분열될 수도 있는 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조덕삼은 선출 결과에 승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이었던 마부 이자익을 장로로 인정하고 섬겨주었습니다. 단순히 인정하고 섬긴 것을 넘어 이후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서 신학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이자익과 조덕삼의 관계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주인과 종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덕삼과 이자익은 그런 관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으로써 서로 형제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에서 조덕삼은 이자익을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보았기에 그를 장로로 인정해주고 그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 습니다. 마치 빌레몬과 오네시모처럼 육신적으로는 이자익이 종이었지만 주님 안에서는 한 형제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새로운 관계처럼, 조덕삼과 이자익의 새로운 관계처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복음의 능력으로 새로운 관계 안에 있습니다. 저기 옆에 앉아 있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 물론 여전히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 을 부를 때 직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자라서 형제고 여자라서 자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한 가족이기에 형제요 자매라 부르는 것입니다. 누구든 지 하나님을 믿는 자는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한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익하고 피해만 줄 줄 알던 사람을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복음에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변에 믿지 않는 지인들을 바라보며 저 사 람은 안바뀔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변화시키려고 하면 무조건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복음이 들어가면 누구든지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될 줄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는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형제자매 되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혹시나 있으십니까. 그 사람도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한 가족으로서 더 서로 사랑하며, 배려하고, 양보해 줄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 하여서 정말로 말로만 복음 복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이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그 복음의 능력이 우리 삶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