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하나님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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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많은 공동체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제일 기본적으로 나의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직장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됩니다. 또 지인들과의 여러 모임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주 유명한 말을 하나 했습니다. 바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제는 단 연 하나님과의 교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죽 은 사람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다음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교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교회 공동체와의 교제입니다. 다른 공동체도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공동체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함께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짧지만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안에 담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시간 말씀을 통해서 우리 교회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이며, 우리는 이 공동체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우리는 동등한 믿음의 형제자매입니다.
첫째, 우리는 동등한 믿음의 형제자매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야 직접적으로 오네시모를 위한 간청을 하기 시작합니다. 앞선 본문에 서는 계속해서 간청을 한다고만 말하고 무슨 내용인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모와 관련되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문제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5절로 이루어진 짧은 편지에서 16절까지는 직접적으로 오네시모를 위한 간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17절에 이르러서야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낸 목적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7절을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바울은 앞 단락에서 말 한 것에 근거하여 간청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이 강조한 것은 오네시모가 완전 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익한 오네시모가 유익한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간청은 ‘나를 영접하듯 오네시모를 영접해 주시오’였습니다. ‘영접하다’는 말은 ‘맞아들여 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빌레몬서에 나오는 첫 번째 명령형 동사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신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받아들이시는 곳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곳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받아들여 주신 것처럼, 빌레몬도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를 용서하고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네시모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주님이 자신 을 용서하신 것처럼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오네시모를 ‘나처럼’ 맞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노예 제도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이 요청은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종을, 심지어 손해를 입히고 도망친 종을 사도를 맞아들이는 것처럼 맞아들이라는 그 요청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바울도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기란 쉽지 않은 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렇게 요청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에는 종도 없고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인종이나 신분, 지위, 재산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는 종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과 동등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네시모를 사도 바울을 맞이하는 것처럼 동등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유튜브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한 교회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만 명 정도 되는 성도가 있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야기는 그 교회에 새로운 담임 목사님이 부임하시기로 한 주일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들뜬 마음으로 교회 주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30분 전 냄새가 지독한 한 거지가 교회에 나타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사먹게 돈을 달라고 구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단 3명만 그 거지에게 간단한 인사를 할 뿐, 그 누구도 돈을 주며 그의 허기를 달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다가오자 거지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맨 앞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가와 당신은 앞자리에 앉을 수 없다면서 맨 뒷자리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거지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옮겼습니다.
예배가 시작하고 찬양이 끝나고 교회 장로님이 나와 새로 오신 담임 목사님을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소개가 끝나고 ‘목사님이 나오셔서 설교해 주시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모든 성도들이 일어나 목사님을 환영하는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강대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당황해하던 그 때 맨 뒤 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냄새를 풍기며 돈을 달라고 했던 그 거지가 강대상으로 올라가고 장로님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았습니다.
거지를 본 성도들의 박수소리는 점차 줄어들고 모든 성도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보았던 그 거지, 맨 뒷자리에 앉으라고 했던 그 거지가 강대상으로 갔으니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경을 펴서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40절 말씀인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을 읽고 난 뒤 아침에 교회 앞에서 목사님이 겪은 이야기를 해 주었고, 교인들은 고개도 들지 못 하고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재산이나 다른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동등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요즘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새가족들이 거의 없는 상태이지만 새가족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안에서도 혹시 우리 마음 안에 다른 형제자매들을 동등하게 대 하지 않고 있던 부분이 없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정말로 내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 나 의 형제자매들을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된 우리 성도들을 모두 동등하게 대하는 자세를 가지기 소망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자신과 같이 여기며 맞이할 것을 요청한 그 요청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주신 것을 기억하며, 우리도 하나님 사랑에 반응하여 모든 형제자매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로만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금전적 손해를 끼쳤다면 그것을 자신이 갚아주겠다고 말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오네시모를 종으로 여겼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대신 빚을 갚아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8절의 “내 앞으로 계산하라”는 말은 상업적인 용어인데 바울이 오네시모의 빚을 떠안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어 서 19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오네시모의 빚을 갚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갚으려니와”라는 말은 ‘보상하다’, ‘손해 배상금을 지불하다’를 뜻하는 전문적인 법률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연달아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며 이제 법적으로도 오네시모의 실수를 자신이 바로잡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8절 마지막의 “내 앞으로 계산하라”와 19절의 “내가 갚으려니와” 사이에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서명과 같은 개념입니다.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그 두 단어 사이에 자신의 이름을 직접 쓰며 그 사실 관계를 분명히 하면서 빚을 갚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말들에 이어서 바울은 빌레몬이 바울 자신에게 진 빚에 관하여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19절 하반절 에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라는 이 말은 빌레몬도 오네시모와 다를 바 없는 채무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 다른 점은 그 빚진 것은 바로 빌레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네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빌레몬의 존재 자체를 가리킵니다. 빌레몬이 바울 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즉 빌레몬은 바울에게 자기 존재 자체를 빚진 것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의 복음 사역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바울에게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런 그가 바울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기를 바라며 바울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면서 빌레몬을 압박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면서 빌레몬에 게 하고 싶었던 것은 오네시모보다 빌레몬 자신이 더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적은 빚을 진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타나는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처럼 자신은 그 많은 빚을 탕감 받았지만 작은 빚을 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기를 바울은 원했습니다. 빌레몬이라는 그 존재 자체 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는데,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그 종을 용서하지 못하고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빌레몬이 행하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울은 20절에서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호소하는 근거이자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잘 나타냅니다. 이 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그리스도의 영향 아래서”라는 의미입니다. 빌레몬은 로마 사회의 질서와 가치에 따라서 오네시모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새로운 신분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사회 영향 아래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향 아래서’ 오네시모를 형제로,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이 단어들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한번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대학시절 알게 되어 교제하게 된 송주현 전도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전도사님은 ‘나눔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주변에 나눔을 잘 하는 분이었습니다. 특히 부 산역에 있는 노숙자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방을 얻어주기도 하고, 여름이나 겨울에 그들에게 필요한 옷가지들을 드리고 식사를 대접하는 등 정말 많은 나눔을 실천하는 분이었습니다. 부산역 뿐만 아니라 부산 영 도의 쪽방촌에 홀로 계신 어른들에게 연탄을 나누고, 쌀과 반찬거리를 나누는 삶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연애를 하면서도 함께 이런 나눔들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많은 도전을 받았었습니다.
2015년 11월에 이 전도사님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고 그가 결혼식에서 하기로 한 일을 듣는데 이 사람이 진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을 하게 되면 좋은 결혼식장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그 시간들을 보내고 싶은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전도사님은 결혼식을 고신대학교의 음악당으로 사용하는 곳에서 올리면서 대단한 결심을 하나 보였습니다. ‘나눔 전도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나눔을 열심히 하던 그가 자신의 결혼식에 부산역에 서 만나 교제하던 그 노숙자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자신이 고신대학교에서 결혼하니 참석해 달라고 말하자 도리어 노숙자들이 참석을 꺼려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전도사님이 설득해서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를 했고 준비된 뷔페에서 식사를 꼭 하고 가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결혼식장의 식당에서 정말로 그들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이 전도사님이 노숙자들을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하여 그 잔치상을 함께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이 전도사님이 자신이 사역하던 대상인 그 노숙자들을 단순히 사역의 대상으로만 보았다면 자신의 결혼식에 그들을 초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남들에게 잘 보이고 이런 사역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하며 사역했다면 자신의 결혼식장까지 그들을 불러 그 잔치상을 함께 나눌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모습과 같이 말로만 가족이 아니라 참된 가족으로서의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도 풍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문을 정하고 말씀에 대한 묵상을 하는데 지난주일 목사님의 설교 중 오늘 말씀과 잘 어울리는 한 문장 이 있어서 급하게 적어두었던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이 가족이다”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이 가족이다” 가족은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가족에게 무엇을 해주면서 아깝다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조금 비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은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기에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이 마땅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대구청구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한 형제자매 된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 가족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형성된 가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한 가족이 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 리 죄를 위하여 흘리신 십자가 위에서의 그 보혈로 인해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의 그 피를 통해서 우리를 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진정으로 한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을 나의 형제요 자매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저 사람은 나랑 수준이 맞지 않으니 안 되고, 이 사람은 나랑 스타일이 다르니 안 되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여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으로 멀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기준에 따르면 우리는 죄인이라 결코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지만 하 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공동체 안의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여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 가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서로 사랑하며 기도하며 헌신하는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 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대구청구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