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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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 파스틱이라는 설교가는 미국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데는 4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활 습관이나 어떤 관습 때문에 교회에 나갑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그 설교를 듣기 위하여 교회에 나갑니다. 교회란 좋은 곳이라 교회에 나가서 활동하면 사회에서도 인정받기 때문에 교회에 나갑니다. 일시적인 위안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갑니다.
이런 이유는 미국인 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는 통계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습관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일시적인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기도 합니다. 서울에서는 마치 문화생활의 일종처럼 교회를 다니며 자신도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수 년 전 종교와 관련된 조사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왜 교회나 절, 또는 성당에 다니는지에 대한 결과를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불교는 건강이나 재물, 성공 등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절에 간다고 대답한 사람들의 비율이 가장 높았고 그 다음으로 마음의 평안을 위해 간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천주교는 마음의 평안을 위해 성당에 간다고 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아쉽게도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는 사람이 가장 많았습니다. 물론 구원과 영생을 위해 나온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저 마음의 평안을 위해 교회에 출석한다고 말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신도들과의 친교를 위해서 나온다는 비율은 3.5%로 가장 낮았습니다.
이런 수치로 우리 모두를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런 통계들이 한국 교회의 연약한 모습을 잘 비춰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이유, 또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은 어떤 것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첫째,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빌레몬서의 편지 스타일은 당시 그리스-로마의 편지 양식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로마의 편지에는 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자신이 믿는 신의 건강을 기원하는 식의 내용이 편지 도입부에 많이 쓰였습니다. 하지만 편지에 신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감사라는 것이 당시에 편지를 쓰는 스타일에서 필수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편지에는 거의 항상 감사의 내용이 나타납니다. 빌레몬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바울 서신에는 감사가 등장합니다. 그 감사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오늘 빌레몬서에서도 바울의 감사가 등장하는데 그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께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말로 본문의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 장 중요한 단어가 바로 ‘감사’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사람에게 받은 호의나 도움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인해서, 또한 이 후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5절 말씀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바울이 빌레몬에 대해서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그대가 가진 사랑과 주 예수님을 향하여 그대가 가진 믿음에 관하여 듣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바울이 들은 빌레몬에 관한 이 소식은 한 번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빌레몬에 관한 5절 말씀과 같은 사랑과 믿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5절 말씀을 그냥 읽으면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이 예수님과 성도들 모두를 향한 것처럼 이해됩니다. 하지 만 원어를 통해 살펴보면, 빌레몬의 믿음은 “주 예수님을 향한 것”이고, 그의 사랑은 “모든 성도들을 향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라고 번역된 ‘아가페’라는 단어는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며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빌레몬은 모든 성도들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 을 골로새 교회의 예배와 교제의 장소로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로 돕는 선 한 일들을 행했습니다. 빌레몬의 모습을 통해 그가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빌레몬의 사랑은 주 예수님을 향한 그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향한 올바른 믿음이 빌레몬에게 있었기에, 그 믿음에서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전도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들 을 사랑하는 마음 역시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만 가능합니다. 사랑이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며, 그의 믿음과 사랑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믿음을 가지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가 믿음을 가지고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유튜브에서 가수 유열씨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4년 전부터 몸이 안 좋아졌는데 성대 역기능이라는 특수한 증상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숨을 들이마시면 성대가 열리는 것이 정상인데 그는 도리어 성대가 닫히는 그런 증상이 생긴 것입니다. 좋다는 병원을 다 다녀 보았는데 뇌가 스스로에게 반대의 신호를 보내서 이런 증상이 생겼다고 합니다. 스트레스가 아주 많이 쌓이면 아주 간혹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데 안타깝게도 그 간혹의 경우가 그에게 생긴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하니 아내가 일을 그만 내려놓고 제주도에 한 달 정도 살아보자고 해서 내려갔습니다. 그 한 달의 시간이 너무 귀하고 달콤하게 다가오니 이렇게 된 김에 1년 정도 살아보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1년을 살게 되었는데 제주도에서 살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몸도 마음도 삶도 아팠는데 그걸 덮어놓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여름 어느 날 새벽기도에 나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의 시간을 되돌아보는데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저에게 길을 알려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데 너무 따뜻한 느낌과 함께 “너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후 기도하는데 계속해서 회개하게 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 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겪고 있는 것 중에 당연하지 않은 것이 있니?’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마음 을 느꼈습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밥을 먹고, 함께 예배드리고 생활하는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누리는 것 중에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고백이 이렇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감사가 빠지잖아요. 그래서 당연의 반대말은 감사였더라고요” 이런 깨달음을 가지고 이후의 치료들과 회복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자신에게 베푸신 구원뿐만 아니라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을 듣고 그것이 감사해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하는 것이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방금 이야기로 전해드린 가수 유열씨는 당연하게 여기고 누리고 있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삶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나의 사업이 확장되고 좋은 일이 생길 때 감사하십니까? 나의 자녀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감사하십니까? 내가 준비하던 것들이 잘 진행될 때 감사하십니까? 물 론 이럴 때에 우리가 감사해야 하겠지만 이 때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 하신 하나님의 선한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한 공동체에 있는 자의 믿음과 사랑의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 나님, 내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다른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런 감사의 제목들이 항상 기도에 넘쳐나 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로 인해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 믿음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믿음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6절의 말씀은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원어가 쓰여진 의미에 조금 더 가깝게 읽어보자면 “그대가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선을 깨달음으로써 그대의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효력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6절에서 말하는 “그대의 믿음의 교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문구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입니다.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이 ‘코이노니아’ 라는 단어는 신약에 19번 나오는데 그 중에 바울 서신에서만 13번이나 등장할 만큼 바울이 중요하게 생각 하는 단어이고 개념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교제, 구제, 연보’ 등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바울은 오늘 본문에 서 ‘친교나 교제’의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그대의 믿음의 교제”라는 표현은 빌레몬이 믿음을 가짐으로써 가능하게 되어진 교제, 즉 믿음을 가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표현을 ‘믿음의’ 교제라고 했기에 믿음이 교제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과 더불어 교제하는데, 그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가지는 믿음의 교제가 “효력 있게 되도록” 기도합니다. 효력이 있게 된다는 말에는 활동과 활력이라는 생동감 있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교제가 활력 있게, 풍성하게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과 나누는 교제가 더욱 더 친밀해지고, 더 깊어지기를 소망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믿음의 교제가 더 효력 있게, 활력 있게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선을 알게 됨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이라고 해서 빌레몬이나 바울에게 있는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을 가리킵니다. 빌레몬이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선인 하나님의 선한 일들을 온전히 깨닫게 될 때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의 교제가 효력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선한 일은 일차적으로는 그들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복음 사역을 통해 빌레몬과 다른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골로새에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빌레몬뿐만 아니라 오네시모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빌레몬 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포함하여 행하신 모든 선한 일을 알게 될 때, 오네시모의 변화 역시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선한 일 역시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빌레몬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을 알게 됨으로써 그의 믿음의 교제가 효력 있게 되어 야 하는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빌레몬 자신의 유익이나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서 모든 선을 알고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자신의 재물을 훔쳐서 도망친 종인 오네시모를 진정으로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와 성도의 교제를 나눌 때에야 비로소 빌레몬의 교제가 완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는 성도간의 교제, 즉 성도의 교제입니다. 이 성도의 교제라는 말은 우리가 매주일 예배드릴 때마다 빠지지 않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믿노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우리는 매주일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배를 마칠 때 우리는 또다시 이 성도의 교제에 관해 매주 듣습니다. 목사님의 축도 속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에게 있도록 기원하는 부 분이 있는데 이 교통하게 하심이 바로 성도간에 교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의 시작과 끝 에 항상 이 성도의 교제, 믿음의 교제에 대해 고백하고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속한 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만약 교회에 교제가 없다면 그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군중이라고 밖에 표현이 안 될 것입니다. 그만큼 성도의 교제, 믿음의 교제가 교회라는 공동체를 잘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됩니다. 만약 교회에 오지만 그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고 그저 설교 말씀을 통해 어떤 유익만을 얻으려 한다면 그 사람이 참으로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전부터 이런 논란 아닌 논란이 있었고 특히 요즘 코로나 사태로 대두되고 있는 문제 중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TV나 인터넷 방송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3년 전 이맘 때 바른 미디어라는 기독교 인터넷 채널에서 저희 신대원 이성호 교수님과 이 문제로 인터뷰 한 영 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성호 교수는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TV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기본적으로 코이노니아, 즉 교제이기 때 문입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의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집에서 드리는 그런 방송으로 드리는 예배로는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간의 교제를 뛰어 넘 어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 가는 것이 참된 교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코로나 사태로 인해 불가피하게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예배를 드려야하는 안타까운 경험을 최근에 겪었고, 지금도 여러 상황으로 인해 함께 예배하지 못하고 집에서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참 된 성도의 교제가 있는 예배는 우리가 함께 이 자리에 모여 예배드림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 외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구역 모임으로, 전도회 모임으로, 또 여러 모임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 안에서 교제함을 통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믿음의 교제, 성도의 교제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잘 나누고 있습니까? 나의 삶을 돌아보면 나는 성경이 말하고, 또 내가 매주일 고백했던 그 성도의 교제, 또한 축도를 통해 들은 그 성도의 교제를 얼마나 우리 삶에서 이루고 있습니까?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 이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깨 닫습니다. 말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믿는 대로 행하지 못하는 너무나 연약한 저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믿음의 교제가 활력이 있게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선한 일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선한 일을 깨달아야만 참된 교제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한번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다니고 계십니까? 서두에 말한 것처럼 혹시 습관을 따라 교회에 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위안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선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넘쳐 그 감사함으로 예배하기 위함이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얼마나 대구청구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교제, 성도의 교제가 활발하게 있었는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나의 유익만을 쫓기 위한 공동체가 아니었는지, 그저 일주일 에 한두 번 나와 말씀 듣고 끝나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었는지 되돌아봅시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 사태가 잦아들고 다시금 모여 예배드리는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가 넘쳐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교제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