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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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피아 식별이다.

Notes
Transcript

1. 도입

오늘 말씀도 역시 하나님의 계명이 적혀 있는 신명기서 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무엇이 정의인지, 정의로운 행동에 관한 관점을 나누고자 합니다.
<전환문> 무엇인 정의로운 행동일까요?

2. 다른 사람의 명예와 인격을 지키십시오.

4절을 보시면,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정말 이상한 말씀입니다. 소가 추수하고 있을 때, 입에 망을 씌우지 않으면 추수하는 곡식을 다 먹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할 때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명령은 정말 이상한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4절 말씀은 소 라는 동물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계명이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셨는데, 갑자기 소를 위한 계명을 정하실 이유는 없겠지요. 이 말씀을 인용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9장 9절에서 10절을 보겠습니다.
1 Corinthians 9:9–10 NKRV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4절 말씀은 소를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사람을 위한 말씀입니다 . 즉, 일을 했으면, 그 일한 정당한 값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추수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를 빌렸다고 합시다. 소를 열심히 일을 시켰는데, 입에다 망을 씌우고 일을 시켰습니다. 그 소는 몇 날 몇 일을 먹지도 못하고 일만 하고, 원 주인에게 돌려 주었을 때, 그 소의 상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빼삭 말라 비틀어져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몇일 못 살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소를 빌린 사람은 그 소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갈 때 원래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4절은 1절에서 3절 말씀의 핵심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설명하면, 이와 같습니다.
두 사람간에 송사가 생겼습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은 잘 한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잘 못한 것이 밝혀 졌습니다. 잘 못 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벌을 받아야 하지요. 그런데, 그 벌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Deuteronomy 25:2 NKRV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그 악인, 즉 잘 못한 사람은 그 잘 못한 양 만큼 태형, 즉 매를 맞습니다. 그런데, 그 잘 못한 양이 아무리 많아도 40대 이상은 때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Deuteronomy 25:3 NKRV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매를 지나치게 때려서 그 악한 사람, 여기서는 “네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그 형제를 경히, 즉 업신 여기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에게 많이 맞았지요. 한 두 대는 어떻게 참겠는데, 그 이상 맞으면, 죽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무조건 두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태형을 당할 때 지나치게 때리면, 그 맞는 사람은 아픔과 공포 때문에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주변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기게 되겠지요. 성경은 그 기준을 40대로 정해 놓았습니다.
오늘 날 흉악 범들에게 내려지는 가장 최악의 형벌은 아마 얼굴 공개 일 것입니다. 수 많은 카메라와 기자들 그리고 살기를 가진 눈으로 쳐다 보는 수 많은 군중들 앞에서 얼굴을 공개 할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죄의 양보다 자존심과 인격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얼굴을 공개 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 죄인을 업신 여기고, 경멸하고 다시는 이 사회에 나와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함이지요. 조두순이 대표적인 예 이지요.
그것은 소에게 망을 씌우는 행위입니다. 마치 소가 벌을 받는 것처럼, 사람에 의해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려고 소에 망을 씌웁니다. 완전히 망가 뜨리는 것이지요. 죄인도 죄 값을 치르도록 하는데, 그가 죄 값을 치르고 나오더라도 그가 죽을 때까지 수치와 눈치와 불 이익을 받게 하여 평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정의는 죄 지은 그 만큼만 처벌하고, 그가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의 명예와 인격을 살인 하지 않는 것이 정의입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의 명예와 인격을 유지 시키고 높여 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수혼제도가 있었습니다. 계대 결혼이라고도 합니다. 5절에서 10절까지는 이러한 계대 결혼을 어긴 사람에 관한 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계대 결혼은 이와 같습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Deuteronomy 25:5 NKRV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함께 사는 형제 중 하나가 자식 없이 죽을 때, 다른 형제가 그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도록 하는 제도 입니다. 이 제도는 당시 이스라엘 분배된 땅을 지키며, 또한 자식 없이 죽은 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매우 특수한 결혼 제도 입니다.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자녀는 자신의 자녀가 되지 않습니다. 그 죽은 형제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대를 이어가게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종가 집 장손이 아들이 없으면, 형제의 자식 중 한 아들을 종가집 종손으로 보냈었습니다. 제가 그럴 뻔 했었습니다. 저희 큰 집이 종가 집 장손 집인데, 딸만 5명이 내리 태어 났습니다. 반면인 동생인 저의 아버지는 아들인 저를 낳았습니다. 당시 집안 풍속 대로라면, 저는 큰집의 아들로 호적하고, 그 집에서 길러져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의 완강한 반대로 다행히 저는 저의 부모님 밑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문화가 달라져서 옛 이야기가 되었고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수 천년 전의 고대 이스라엘 에서는 형제의 재산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바로 계대 결혼 이었습니다. 함께 사는 형제는 반드시 죽은 형제의 재산과 명예를 지킬 의무가 있어서 이 계대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아도 자신의 자식이 아니고, 재산도 자신의 재산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어 죽은 형제의 이름으로 남겨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신의 실익과 형제의 명예 중 자신의 실익을 위해서 계대 결혼을 거부하면, 그 거부한 그 형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독을 받는 것입니다.
9절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Deuteronomy 25:9–10 NKRV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그 죽은 형제의 아내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거부한 형제의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모독 합니다. 그리고 그 거부한 형제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는 했지만,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습니다. 남의 명예를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한 같은 크기의 형벌이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그의 명예를 깍아 내리지 마십시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명예를 지켜 주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정의입니다.
<전환 문> 또 무엇이 정의로운 행동일까요?

3. 반칙과 편법을 행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조국에 관하여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책과 언론 등 평생을 말해 온 “공정"이라는 말과 다르게, 편법과 반칙을 사용하여 자식을 의사 만들고, 자산관리 했다는 이유로 비판 합니다.
반칙과 편법을 사용하는 것 그것은 정의가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반칙과 폅법을 사용하는 것을 즐거워 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반칙과 편법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의 반칙과 변법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두 사람이 싸우는 경우입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Deuteronomy 25:11 NKRV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그의 남편을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데, 자신의 남편이 불리하니까 갑자기 그의 아내가 그 싸움에 끼어 들어 상대편 남자의 급소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2대 1로 싸우는 것도 불리한 일인데, 갑자기 급소를 공격하면 그 싸움은 이미 결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아마 그 여자는 자신은 정당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Deuteronomy 25:12 NKRV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지니라
그 급소를 공격한 여자의 손을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무시 무시 합니까? 그리고 불쌍하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여자는 반칙을 썼기 때문입니다.
또, 편법을 쓰는 행위가 있습니다. 바로 장사하는 사람이 무게를 속이는 것이지요. 13절 부터 15절까지는 무게 추와 다른 크기의 되를 쓰는 것에 관한 규정입니다. 사실 오늘 날은 저울이 발달해서 정확한 계량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추를 가지고 무게를 쟀었죠. 그런데 그 추의 크기는 동일한데 무게를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어떤 물건을 살 때는 작은 무게의 추를 사용하고, 물건을 팔 때는 큰 무게의 추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득이지요. 그리고 부피로 물건을 팔 때는 작은 크기의 되로 물건을 팔고 큰 크기의 되는 물건을 살 때 재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득이지요 .이것은 편법입니다. 불가 10 몇년전까만 해도 이러한 편법이 시장에서 종종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보라는 이름으로 편법을 사용하지요. 또 그렇게 편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반칙과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늘 날, 이 사회에서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정의롭게 사는 것은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기독교 인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반칙과 편법에 대해서 정의롭지 못하다 분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반칙과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손해를 보더라도 정의롭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기독교 인의 모습입니다.
<전환문> 또 무엇이 정의로운 행동일까요?

4. 하나님을 떠나 정의를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본문 17절에서 19절까지는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와 광야를 헤메고 있을 때, 지친 이스라엘을 공격한 아말렉에 관한 내용입니다.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Deuteronomy 25:18 NKRV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말렉은 매우 비겁하게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약점만을 공격했습니다. 사실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성경 역사에서 에서는 이스라엘과 한 형제이고, 이삭의 두 쌍둥이 아들들입니다. 성경에서 그 두 아들들은 매우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둘 간의 관계는 그 두 형제의 후손 가운데서도 일어 났던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야곱의 후손들과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약점을 놓치지 않고 공격 했던 것입니다.
적의 약점을 파고 들어 공격하는 것은 매우 좋은 전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그 지역입니다. 그 지역은 바로 르비딤입니다.
출애급기 17장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Exodus 17:8 NKRV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여기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쟁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은 물이 없다고 불평했었습니다.
Exodus 17:1–2 NKRV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종 되었던 애급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르비딤에 이르러 물이 없음으로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나님과 다투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생명의 위협이 일어나자 하나님과 다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다툼은 불신앙이었습니다. 물이 없어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의심을 한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Exodus 17:7 NKRV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지에 관해 의심하고 하나님과 다투었습니다. 그러한 물이 없어 목말라 지쳐서 하나님의 계심을 의심한 이들을 향하여 공격한 이들이 바로 아말렉 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아말렉의 공격을 받은 것은 그들이 목마르고 지쳐 있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길 때 이스라엘의 대적자인 아말렉이 공격한 것입니다.
사실 정의는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정의란,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의란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때 베스트 셀러로 주목을 받았던 책이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철학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200만권이나 팔렸습니다. 저는 이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찾아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에서는 정의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철학 사조인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 주의에 관하여 이야기 하면서 정의를 논하고 있습니다.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철학서 입니다.
이 책의 주제는 아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생각은, 정의란 각자 사람마다 세운 기준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 공리 주의자들은 최대다수를 행복하다면 소수가 불행해도 그것을 정의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정의란 판단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기 기준에 따라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정의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떠나서 정의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떠나 정의를 말하면 그것은 기독교의 정의가 아니며, 또한 절대 정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르비딤에서 물이 없어 하나님과 다툰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이미 진정한 의미의 정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란 당장 물을 마시는 것 그것이 정의 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정의에 대한 가치관에 혼돈이 생긴 것입니다. 이 때, 대적자인 아말렉이 처들어 왔고, 그들의 약한 부분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약해 질때,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의 정의에 대한 기준이 흔들릴 그 때 우리의 대적자는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 대적자는 사탄이라고 말할 수 도 있습니다. 사탄은 늘 우리를 고소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으로 부터 떠나려고 할 때 우리를 늘 공격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과 생각 가치관이 옳고 정의롭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물이 없어서 목이 말라 살수 없다고 여길 때 아무 곳에서나 물만 먹을 수 있다면, 그 행동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고 해도 그 행동은 정당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 생각하고 해동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설사 이스라엘 민족처럼 물이 없는 광야에서 몇 날 몇 일을 물 한모금 먹지 못하고 뙤앝볕에서 걸어야 하는 그런 삶의 처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제공하지 않는 현실의 필요를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가며 반칙과 편법으로 얻어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또 자신의 자존심과 허영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명예와 인격을 모독함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을 정당하다 여기지 마십시오.
정의로운 하나님은 결코 반칙과 편법을 쓰는 곳에, 다른 사람의 명예와 인격을 모독하는 곳에 결코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은 없고, 오직 아말렉과 같은 우리의 원수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하나님안에서 정의로운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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